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나 | [날마다 기막힌 새벽 #186]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 2281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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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 새벽묵상 (한글 자막 유)
[날마다 기막힌 새벽 #186]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

본문말씀 마태복음 26장 36절 ~ 46절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찬송가 563장 예수 사랑하심은
1.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2.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
3.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4.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 가는 날 천국가게 하소서
[후렴]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아멘
#김동호목사 #새벽QT #날마다기막힌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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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는가 – 크리스천투데이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기 위함이셨다. 성경의 진리는 무엇인가? 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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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나? – Daum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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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나요? | 성경닷컴

[질문]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나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라고 하는데 왜 하나님의 아들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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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미 – 하나님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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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십자가형을 받으셨을까 – 패스티브

십자가 –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형(十字架 刑)은 로마제국의 잔인한 형벌 중 하나다. … 대한민국의 한 법의학자는 그뤼네발트 작품 <십자가형>에 묘사된 예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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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질문들

예수님은 무슨 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나? …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나요? …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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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나 – Prezi

죄에 대한 사람들의 이론과 하나님의 이론. 3번째 강의. April 2014. 지난주 REVIEW. 이번주 강의 내용.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우리의 구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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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몇 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 성경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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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십자가형을 받으셨을까? – yesHEis

신성 모독죄는 율법의 죄 중 사형에 처할 만큼의 큰 죄였습니다. 결국, 율법에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예수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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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esheis.com

Date Published: 11/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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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나

  • Author: 김동호 목사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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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pVTaubtDnV0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나?

(Why did jesus die?)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귀걸이나 목걸이 심지어 팔지에 십자가를 달고 다닌다.

이런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아마도 죄수를 처형하는 교수대나 전기의자에 달린 줄을 걸고 다닌다면 무척 놀랄 것이다.

사실 십자가는 로마시대에 아주 무서운 죄인을 처형할 때 사용했던 사형 틀이었다.

인류에게 알려져 있는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십자가 형이었다.

십자가형은 315년 로마가 국교로 공인이 되고 얼마 지나서 폐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조차도 이십자가 형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복음의 상당 부분은 사실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신약성경의 상당 부분은 거의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교회가 성찬식 예배를 드릴 때에도 예수님의 상처받은 육신의 몸과 흘리신 피에 중심을 두고 있다.

교회 첨탑은 거의가 다 십자가로 장식되어져 있다.

사도 바울의 고백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 24)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거나 세계를 변화시킨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끼친 삶의 영향 때문에 기억된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가장 크게 세계 역사의 모습을 바꾸어 놓으셨지만

그의 삶보다는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욱 기억되고 있다.

문제제기(Issue) :

왜 예수님의 죽음이 그토록 주목되고 있는가?

그의 죽음과 소크라테스나 공자, 석가의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순교자들이나 전쟁의 영웅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는 무엇이 다른가?

그는 왜 죽었는가?

그로 인해서 무엇을 얻었는가?

신약성경에서“그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었다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이 무엇인가?

“여기서 이런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자 한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무엇인가?

가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기독교가 필요 없어요.

나는 무척 행복해요.

나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꼭 예수를 믿어야 하나요?

과연 그럴까?

우리는 왜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사도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악랄한 살인범이나 강도에 비해서는 깨끗할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된다.

작가인 섬머셋 모음이 이런 말을 했다.

“만약 내가 이제 까지 생각한 모든 것과 저지른 모든 행동들을 다 적는다면 사람들은

내가 사악한 괴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했다.

죄의 근원, 죄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떨어지게 되어 삶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우리는 엉망이 되어버린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1. 죄로 인해 오염됨(마가복음 7:20-23)

2. 죄의 권세(요한복음 8:34)

고약한 성미, 질투, 교만, 자랑, 이기심, 중상모략, 성적인 방탕함에 중독되기도 한다.

우리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나 습관적인 행동에 중독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힘의 종이 된 상태다.

3. 죄의 대가(형벌) – 로마서 6:23

인간 본성에는 정의를 갈망하는 무엇인가가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아주 악한 자들의 만행이나 몹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분노가 일어나면서

그런 짓을 한 사람들이 잡혀서 벌을 받기를 바란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죄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롬 6:23)

4. 죄의 이간성 (이사야 59:1,2)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체적인 죽음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죽음이다.

육체저인 죽음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영적인 죽음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만들어서

하나님과 분리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악한 일들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벽을 만들게 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행하셨나?

(기독교의 출발점)

우리 모두는 사는 동안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1. 하나님이 친히 대속하심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 2:24)

존 스토트는‘하나님의 자기 대리’라는 말을 썼다. 자기 대리란 이런 뜻이다.

예) 에네스트 고든이 쓴 책 <콰이강의 다리> 이 책은 2차 대전 중에 미얀마 철도 작업을 했던

전쟁 포로들이 겪은 실제적인 이야기다.

매일 매일 일과가 끝나면 작업반은 연장을 반납해야 했다.

어느 날 일본인 감독관이 삽 하나가 모자란다고 소리를 지르며 누가 가져갔는지 말하라고 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서 연장을 가지고 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다 총으로 쏴 죽여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총을 포로를 향해 겨누었다.

그 순간에 한 포로가 앞으로 나갔다.

차렷 자세로 말없이 서있는 그 병사를 그 감독관은 심하게 총으로 때려서 숨지게 했다.

포로들이 숙소로 돌아간 후 연장을 다시 세워보았을 때 삽의 숫자는 꼭 맞았다.

그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아무 죄도 없는데 대신 앞으로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신(대리)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앞으로 나오셨다.

대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셨다.

키케로는 말하기를 십자가는“가장 잔인하고 저주스러운 고통”이라고 했다.

2. 십자가의 고통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로마 군병의 채찍에 맞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발가 벗기운 채로 채찍 기둥에 묶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뼈 조각과 납덩어리가 엮여진 네다섯 가닥의 가죽 끈으로 된 채찍에 맞으셨다.

3 세기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로마의 채찍질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고통받는 자의 혈관이 훤히 드러나고… 희생자의 근육과 힘줄, 창자는 찢겨져 속이 드러나 보였다.’

예수가 집정관 앞으로 끌려갔을 때 가시관이 그의 이마 위로 씌여졌다.

그는 600여명의 군중들에게 조롱당했으며 얼굴과 머리를 맞았다.

그런 다음 무거운 십자가를 피가 흐르는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했으며,

그가 쓰러지자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를 대신해 짊어지게 했다.

그들이 십자가가 서게 되는 터에 당도하자 다시 예수를 발가벗겼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 위에 눕히고 15cm되는 못을 손목 바로 위인 전박에 박았다.

무릎은 옆으로 비틀어서 아킬레스 건과 경골 사이 발목에 못을 박았다.

십자가는 그를 달리운 채로 들리운 다음에 땅에 미리 파놓은 구멍에 쳐 넣었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사람들이 조롱하는 가운데 뜨거운 태양열과 견딜 수 없는 갈증 속에 시달려야 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약 6 시간을 매달려 있으면서 그의 생명은 조금씩 사그라져 갔다.

그의 고통 중에 가장 무서운 고통은 육체적인 상처나 십자가의 아픔이 아니고,

또한 자기의 제자들과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정서적인 아픔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그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순간적으로 외면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분리되는 영적인 고통이었다.

십자가의 결과는 무엇인가?

(The result) – (롬 3:21-26)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에는 많은 면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도 역시 많은 단면들이 있다.

십자가 위에서 악한 어둠의 세력들은 무장해체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골 2:14,15)

죽음과 마귀의 힘은 패배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는 세상에 오셨고 고통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본을 보이였다.

Four Images (네 가지 모습)

1. 용서 – 법정 : 칭의 (롬 3:24)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롬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라고 했다.

여기서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법정 용어다.

법정에 섰다가 사면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의롭게 된 것이다.

예) 두 사람이 있었다. 같은 학교와 대학에 진학하면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한 사람은 판사가 되고, 다른 사람은 계속 내리막 길을 걸어 범죄자가 되었다.

그 친구가 법정에 서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자기 옛친구가 법관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죄를 범한 친구는 자기의 죄를 인정했다.

판사는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판사로서 공정하게 재판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 친구를 봐줄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그 친구에게 벌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죄에 합당한 벌로써 벌금형을 선포했다. 이것이 공의다.

그런 다음 그는 판사로서의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와서 그 벌금에 해당되는 액수의 수표에 사인을 했다.

그는 그것을 친구에게 주면서 자신이 대신해서 벌금을 내겠다고 했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 예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향해서 하신 일을 예로 들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해서 반드시 처벌하셔야 한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내려 오서서

우리를 대신해 벌을 받으셨다. 그는 심판자인 동시에 구원자이시다.

그러나 이 예화에도 3가지가 정확하지 않다.

첫째는 , 우리는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형벌은 벌금형 정도가 아니다. 죽음이다.

둘째는 , 더 친밀한 관계다. 단순한 친구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아버지들이

그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세 번째는 , 그 대가가 더 컸다.

하나님이 치루어야 했던 대가는 돈이 아니라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그가 죄의 대가를 치루었다.

2. 몸 값 (배상금) – 시장 : 구속

빚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빚은 진 사람에게 큰 부담이 된다.

그래서 고대시대에는 누군가가 빚을 지게 되면 그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팔아야 했다.

한 남자가 시장에 서서 자신을 노예로 내놓았다고 가정하자.

누군가 그를 불쌍하게 생각해서“당신의 빚이 얼마요?”하고 물었다.

빚진 사람은 “2천 만원”이라 했고,

그 손님이 그 돈을 내준 다음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었다고 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몸값”을 치러 그를 구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롬3:24).

예수님은 막10:45에서 말씀하신대로“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대속의 값을 치르셨다.”

 죄의 권세가 깨지다.

우리는 이렇게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 8:36) 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잡고 있던 죄의 지배력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

3. 씻음 – 성전 : 성화

구약성경에는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상세한 율법으로 명시되어 있다.

일반적인 경우 죄인이 속함을 받기 위해서는 짐승을 잡아야 했다.

그 짐승은 가능한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

죄인은 그의 손을 그 짐승 위에 얹고 그의 죄들을 고백했다.

그렇게 하면 죄는 죄인으로부터 짐승에게로 옮겨가고 짐승은 죽임을 당한다. (로마서 3:25)

히10:4에“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 줄 수는 없다”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그림 혹은‘그림자’일 뿐이었다. 실체는 예수님의 희생과 함께 왔다.

오직 그리스도, 우리 대리자의 피만이 우리 죄를 없앨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완벽한 삶을 살았기에 그분만이 완벽한 희생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피는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주며 죄로 인한 오염을 없앨 수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4. 관계 – 가정 : 화목

죄의 뿌리도 죄의 결과도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라고 했다.

반대로 십자가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다. (고후 5:19)

탕자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그의 사랑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 관계는 단지 지금의 삶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것이다.

단지 죄에 대한 형벌이나 죄의 권세,

죄로 인한 오염, 죄로 인한 분리 뿐 만 아니라 죄라는 것 자체로부터도 자유로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기 대리로 가능해진 일들이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시며 보통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 하나하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듯이 우리와 친해지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단순히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

것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Righteousness from God”(로마서 3:22)

–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로움

 이사야 53:6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

(갈라디아서 2: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는 십자가를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그럴 때에 내 삶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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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가 죽은 이유는 인류가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6:23; 에베소서 1:7) 또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사람이 극심한 시험을 받더라도 하느님께 충성을 지킬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습니다.—히브리서 4:15.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그처럼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가 죽은 이유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1:14. 첫 인간 아담은 죄 없이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고의로 하느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즉 죄는 그의 모든 후손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로마서 5:19. 예수 역시 완전한 사람이었지만 죄를 지은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 희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 1서 2:2, 각주)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인류 가족이 죄에 오염되었다면, 예수의 죽음 덕분에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이 죄에서 깨끗해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담은 인류를 죄에 팔아넘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희생함으로 인류를 자신의 소유로 도로 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돕는 이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 1서 2:1.

예수가 죽은 이유는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3:16. 아담은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죄를 짓고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왔으며, 이와 같이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로마서 5:12. 반면, 예수의 죽음은 죄의 흔적을 없애 주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형벌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그 점을 이렇게 간략히 설명합니다. “죄가 죽음과 더불어 왕으로 다스린 것과 같이, 과분한 친절도 의를 통해 왕으로 다스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로마서 5:21. 물론, 오늘날 사람들의 수명은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이며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켜 그들 역시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부터 유익을 얻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편 37:29; 고린도 전서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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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셨는데 그것은 안팎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안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기록되어 있더라. 한마디로 이스라엘백성들의 타락과 부패함을 하나님게서 친히 밝히시는 것이죠. 예수님이 오셨을 유대나라에서도 여전히 그랬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징계를 당한 겨죠. 이것이 대략적인 구약의 이스라엘에 관한 내용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신데요. 그것은 “구원”은 사람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온갖 종교적인 것으로 졸기를 지키고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고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증한 우상숭배를 한것입니다. 사람의 어떠한 성행과 구제와 봉사와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 값을 속량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구원방법이며 작정하신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라야만 그 피로 죄를 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하나님게서 받으실 제물이 예수님입니다. 그 어떤 구약의 짐승들의 피로는 우리의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은 죄를 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던 못하던간에…. 창세기3장15절의 언약하신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 외에 다른 어떤던 것도 하나님앞에 인정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결론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피가 나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겨주셨다고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하신 사건을 믿으십니까? 아무 공로없이 예수님을 통하여 구 십자가에서 다 해결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믿으십니까? 로마서5장 6.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느니라 . 7. 의로운 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 감히 죽고자 하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반응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믿고 받아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선물은 공짜이며 누구든지이며 원하는 자들에게 거져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져 주신 선물이라도 내가 거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억지로도 아니고 강요당해서도 아니며 미안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게 마지못해서 어거지로 선물을 받는 다면 선물을 주시는 분이 무시를 당하는 것이고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과 호의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추천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미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저는 목사님이 읽어주시는 이 성경 구절을 종종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보혈로 온 인류를 구속하셨습니다. 저도 그 덕분에 하나님 앞으로 와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가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면 전 벅찬 감동을 느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굴욕과 고통을 참으신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감동하면서도 저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고 모든 일을 이뤄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천지가 개벽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사탄의 권세 속에 있는 인간을 구원해 내실 수 있으실 텐데 왜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방법으로 인류를 구속하신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형제자매와 목사, 장로님께 답을 구했지만 제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 안에 있는 자매님과 깨달음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제 중에 저는 마음속에 갖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고 자매님과 함께 답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자매님은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진리의 기묘함이 숨어 있답니다! 예전에 저도 그런 고민에 휩싸인 적 있었어요. 그러다가 한 책에서 이것과 관련된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제 고민은 해결되었답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류를 구속하신 건지 같이 보도록 할까요?” 그러면서 자매님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인데,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 항상 관념이 있어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구속하실 때, 사탄에게 ‘나는 전능하다. 네가 감히 인류를 나에게 안 주겠다고? 반드시 나에게 줘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기만 하면 해결됩니다. 하나님께는 권병(역주: 권세)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고 사람의 죄를 사해 준다고 말씀하시기만 하면 사람에게는 죄가 없게 될 텐데, 이런 일은 하나님의 한마디 말씀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한마디 말씀을 하시니 천지 만물도 다 생겼는데, 이 일은 왜 해결하시지 못합니까? 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까?”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전능한 면도 있고, 실제적인 면도 있다. 실제적인 면은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하여 땅에서 33년 반 동안 거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피를 흘리며 가장 심한 고통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죽음에서 부활하였는데, 부활은 전능한 면이다. 하나님은 어떤 예시로, 또는 피를 좀 흘리거나 비를 좀 내리는 것으로 그것이 곧 속죄제라고 말씀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친히 말씀이 육신 되어 온 인류와 접촉하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류에게 그런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하였다. 그 사실로 인류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구속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였는데, 하나님이 확실히 사람을 구원한 그런 증거가 있게 하였다. …영은 피를 흘릴 수 없고 육신만이 피를 흘릴 수 있는데, 그 보혈이 바로 속죄제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육신이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어 인류를 대신해 고통을 담당했다. 영은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기에 인류를 대신해 고통을 받을 수 없고, 사람의 죄를 속량할 수 없다. 그것은 인류를 위해 한 것으로, 실제적인 그 일면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이다. 왜 그를 하나님이라고 하고, 전능한 면이 있다고 말하겠느냐? 일을 할 때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전능한 면이 있고, 실제적인 면도 있다. 하나님의 전능은 바로 그의 실질이며, 그의 실제적인 면에도 그의 실질적인 면이 있다. 이 두 방면은 서로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은 후 자매님은 제게 이렇게 교제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는 건 하나님의 전능함과 실제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천지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는 관념이 없지만 하나님의 실제에 대해서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실제는 항상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고자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사역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가 애굽을 떠나려는 이스라엘 백성을 막아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와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셨을 땐 요나에게 니느웨 성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실제 사역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분부를 듣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쳐 여호와로부터 숨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배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선 파도를 일으키시어 요나는 배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졌고, 물고기에게 잡아 먹힌 후에도 사흘간 살아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율법시대 말기,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굴레를 쓰고 매일 죄 속에서 살아가 율법으로 정죄 되고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졌습니다. 그때 그들에겐 영원한 속죄제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성육신하시어 직접 인간 세상으로 오셨고 실제로 고통을 받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류를 죄에서 구속해주셨고 그렇게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을 향해 40일동안 나타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중 어느 단계의 사역을 하시든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신 확실한 증거이자 사탄의 권세를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증거로 사탄이 고개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매님이 읽어주는 구절을 듣고 자매님과 나누고 나니 마음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전능하심뿐만 아니라 실제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쁜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줄만 알았지 하나님께서 왜 성육신하시어 친히 인간 세상에 오시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는 몰랐어요. 이제야 하나님의 사역에서 전능하심과 실제가 공존하는 것이고 뗄래야 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늘 교제가 빛비춤이 정말 크네요.” 자매님은 웃으면서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실제적이신 것이라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도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몇 년 동안 갖고 있던 의문이 드디어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몇 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 성경의 오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책 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으시자 마자 여자의 자손과 뱀의 자손이 다툴 것이며, 뱀의 자손이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물지만, 여자의 자손은 그 머리통을 부술것이라는 복음을 아담과 하와에게 전해주십니다.

이런 중요한 사건에 대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류를 지적하며 조롱 합니다. 무슬림 신학자 Ally Shabir을 비롯 성경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유명한 비평적 신약 학자 Bart Ehrman 등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오류를 지적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실제로 그런 오류들이 존재하는 듯 합니다.

3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6시에 재판을 받으셨다고?

때가 세 시가 되매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마가복음 15:25>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끌고 나가서 돌로 포장한 곳이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갑바다라고 하는 곳에 있던 재판석에 앉으니라. 그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여섯 시쯤이더라. 그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왕을 보라! 하거늘 <요한 복음 19:13~14>

마가 복음에는 예수님이 3 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하고, 요한 복음에는 6시인데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고문을 받고 계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모순일까요?

이제 세계화로 인해 외국에 있는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갖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내가 깨어 있는 시간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깨어 있는 시간이 아님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시차라고 얘기합니다. 즉 분명히 동시이지만 한 나라에서 12시가 다른 나라에선 5시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해가 시작되는 날 즉 1월 1일을 우리는 설날이라고 부르고, 설날 동안 우리는 가족을 찾아 갑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구정을 세는데, 보통 구정은 2월 초에 있지만, 우리는 음력으로 1월 1일인 그 날을 설날 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유대땅에 있었던 두개의 시계

예수님이 있던 당시 예루살렘에도 이런 비슷한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유대식 시간과 로마식 시간 입니다. 당시 로마식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동일 합니다. 한 밤중에 0시가 시작이 되어, 한 시간씩 흐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다르게 시간을 계산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6시가 하루의 시작 즉 0시가 되었고, 그 이후 부터 한 시간씩 흐르다가 밤 즉 저녁 6시 부터는 시가 아닌 경으로 바뀝니다. 원래는 밤 12시간을 4 시간씩 나눠서 3경으로 나눴는데,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파수병들의 근무 교대 시간에 맞추어 세 시간씩 4 경으로 나눕니다.

주인이 만일 이경에 오거나 삼경에 왔을 때에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도다. <누가 복음 12:38>

즉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아침 9시는 이스라엘로 치면 3시이며, 저녁 6시에서 9시까지 1 경, 9시 부터 12시 까지 2경 이렇게 계산 합니다.

성경 기록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한 밤중에 잡아 간 후 대제사장의 집, 헤롯에게 끌고 갔다가 빌라도에게 데려 왔으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자신을 3번 부인할 것이라고, 즉 이른 새벽에 그런 일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었을 때에는 너희가 나를 치려고 손을 내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시간이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2:53>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던 3 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밤에 잡아서 대제사장의 집, 헤롯 궁전, 빌라도에게 와서 수 많은 군중들의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를 들으며 재판을 받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수 있었을까요? 그 새벽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서 재판 받는 것을 구경했을까요?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 3시는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새벽 3시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식 시간과 로마식 시간

그렇다면 가장 최선의 추론은 마가 복음에서 얘기하는 3시는 이스라엘 식 즉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라는 것 입니다.

또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간 것이 새벽 닭이 울고 거의 바로라는 사실을 통해 요한 복음에서 얘기하는 6시가 로마식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당일 동선을 이렇게 그려보면 정확할 것 입니다.

밤 새 괴로워 하며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새벽에 유다와 함께 온 군병들에 의해 잡혀가시고, 대제사장의 집, 헤롯 또 총독 사령부를 수 시간 동안 왔다 갔다 하시다가, 닭이 울고 곧 새벽 6시 경에 빌라도의 재판정에 도착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바라바를 풀어주라는 사람들의 외침에 아무 죄도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9시쯤 이스라엘 시간으로 3시쯤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리고 정오 즉 이스라엘 시간으로 6시 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시 이스라엘 시간으로 9시까지 계속 되고(마가 복음 15:33), 예수님은 6 시간 만에 숨을 거두십니다.(마가 복음 15:34)

이렇게 이해하고 설명하면, 아무런 모순이나 오류도 없으며, 다만 다른 시간 방식으로 기록을 한 것 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타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AD 70년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후 10~20년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유대인식 시간을 사용하지 않고 로마식 시간을 사용해야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고 이해하면 우리는 왜 복음서에 서로 다른 시간제를 사용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시간 계산을 하라고 주어진 책은 아닙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구속의 죽음의 장면 속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순과 조롱거리를 찾는 모습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의 덕분에 풀려난 가장 극악 무도한 죄인 바라바가 바로 나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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