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7절 | 요한복음 8장 상위 15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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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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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요한복음 8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7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행했다고 해도 스스로 죄가 없다고 인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간음한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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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5/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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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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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6/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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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7절 | 갓포스팅

요한복음 8장 7절. 2017년 11월 15일. 0. 7. 10476. 그들이 계속 질문을 퍼붓자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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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p.godpeople.com

Date Published: 6/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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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8장7절-9절 “지혜로운 대응” 2021년 1월 25일

요한복음8장7절-9절 “지혜로운 대응” 2021년 1월 25일.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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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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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8장 1~2절에 보면,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 …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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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5/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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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죄의 돌을 막으시고 용서로 새롭게 하시다 (요한복음 7:53~8:11)

정죄의 돌을 막으시고 용서로 새롭게 하시다 (요한복음 7:53~8:11) ·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그 죄를 간과하지는 않으십니다. · 나도 너를 정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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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gntv-compass.tistory.com

Date Published: 6/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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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요한복음 8장은 7장에서부터 계속되고 있는 초막절 강화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하는 … 에는 7장 36절이나 44절 뒤에 넣은 사본도 있으며, 더러는 요한복음 21장 2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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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8/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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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CTM-QT

[요한복음 8: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 간음한 여인을 데려온 사람들(1-5절) …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6-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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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ctm.kr

Date Published: 12/30/2021

View: 1294

요한복음 8장 주석 – Daum 카페

요한복음 제 8장 =====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7:53-8:11까지의 기사는, 사본상 문제가 있는 부분이 다. 이 중요한 사본들(* , B, L, 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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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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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 – 문제와 해설]

7절;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 지라; 계속해서 물었다는 것이다.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빨리 대답하라고 계속 윽박지른 셈이다. 4.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이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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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ong.org

Date Published: 7/17/2022

View: 8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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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요한복음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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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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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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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ㄱ)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나는 세상의 빛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ㄴ)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내가 가는 곳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요한복음 8장 7절

1 50

예수님의 권능을 가장 처음 마주한 베드로의 반응은 이것이었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당신의 권능을 내가 차마 감당할 수 없으니, 부디 나를 떠나달라는 요청. 예, 베드로의 판단이 맞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죄의 돌을 막으시고 용서로 새롭게 하시다 (요한복음 7:53~8:11)

2020.01.31.금 생명의 삶 문영재 목사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이 여인은 수모와 모멸을 당합니다.

하지만 여인은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7장 53절 부터 8장 11절의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정죄의 돌을 막으시고 용서로 새롭게 하시다

요한복음 7장 53절에서 8장 11절 말씀 입니다

본문말씀 보기

본문말씀 접기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8: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본문말씀 접기

말씀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3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현장에서 잡힌 여자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말씀을 자세히 보면 음모(陰謀)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음행 중에 잡힌 여자’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현장을 덮쳐 이 여인을 잡아왔음을 기록하였는데, 매우 계획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또한 여인만 이곳으로 잡혀온 사항도 이상합니다.

이들은 여인을 끌고와 예수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요한복음 8장 4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잡으려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이 여인의 희생으로 예수님을 올가매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에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먼저 발견하는 것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죄 모습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는 죄와 보이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들켰느냐, 들키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보게 되는 것은 죄는 여인을 끌고 온 서기관과 이 바리새인의 죄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여인을 이용하여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죄의 모습입니다.

법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려는 매우 교활하고 악랄한 방법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종교적으로 의롭다고 여기며 여인을 심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서 스스로 죄를 지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죄의 모습은 이 간음한 여인에게 온갖 비난과 욕설을 퍼붓고,

그녀에게 돌을 던지기 위해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는 죄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정의롭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나는 깨끗하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설 때 정말 부끄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의롭게 여기며 돌을 던지려 하였지만,

그들 역시 죄인이였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날마다 나의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정결한 자의 모습으로

이 하루도 나를 돌아보며 주님 앞에 온전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왔나요?

목적을 위해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언행을 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떨고 있는 여인을 보시며 반응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6절 말씀입니다.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십니다.

말씀을 보면 여인의 상처도 아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교활한 죄도 하시며 흥분한 군중들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십니다.

간음한 여인을 잡아 분노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며 못마땅하게 여기고 다그칩니다.

요한복음 8장 7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은 땅이 무엇을 쓰셨을까요? 사람들은 많은 추측을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죄가 없다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그 죄를 간과하지는 않으십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것과 죄의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또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이 틀렸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고,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나 갑니다.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떠나 가고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이 남았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위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 진리가 선포되는 순간, 모든 위장과 교활과 가식과 거짓은 떠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적인 권의입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히 접근할 수 없었고, 예수님의 영적 권위를 느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0절 말씀입니다.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발한 자가 어디 있느냐?’ ,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시며, 예수님께 죄를 고백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자유케 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11절 말씀입니다.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공포 속에 떨고 있는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 하십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이 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죽음의 세력은 떠나가고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치욕스러운 과거는 떠나가고 죄로부터 찾아온 저주와 비극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주님은 우리에게도 모든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며, 죄로 부터 해방하시며, 모든 죄에서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가라’ 동일하게 말씀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더불어 사랑의 말씀을 건내십니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예수님은 여인의 처지를 이해하십니다.

기막힌 처지에 빠진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여인을 용서하시고 그녀에게 희망과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라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불행한 과거에 살지 않으며,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이 찬양을 계속해서 불러보았습니다.

1절 가사는 이렇게 됩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2절 가사는 이렇게 됩니다

맘속에 시험을 받을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 때에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3절 가사는 이렇게 됩니다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아멘

기도 하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불쌍히여기시며 다가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을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희망을 또한 자유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가라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불행한 과거에 지더라 살지 않게 하시며,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시며,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되도록 성령 하나님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여인이 누렸던 복을 우리도 누리는 귀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은 약한 종교 지도자들의 시험을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남을 정죄하고 시험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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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은 7장에서부터 계속되고 있는 초막절 강화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 부분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대해 중요한 내용들을 많이 밝히신다. 계시된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이 우리에게 어두움 속에서의 빛이 되기도 하며 죄의 종 된 상태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오기도 한다. 반면 그를 믿지 아니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의 어두움 속에 갇히게 되며, 스스로가 아끼고 자랑하는 모든 기득권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심판 아래에 놓이게 된다. 이토록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앞에 진지하고 겸손하게 나아간다.

삽입된 에피소드(8:1~11)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7:53~8:11)는 사본상의 문제 때문에 우리 한글 번역 성경에서도 괄호 안에 묶여 있다. 가장 믿을만한 고대의 대문자 사본들 속에는 이 부분이 들어 있지 않다(p66, p75, a, B 등).1 알렉산드리아 사본(A) 등에는 이 전후 부분이 유실되고 없으나 공간을 계산해보면 이 이야기가 들어갈 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고대 역본들 또한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를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은 주로 서방 계통의 사본들이며 베자 사본(D)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들어가 있는 위치도 일정하지 않아 어떤 경우에는 7장 36절이나 44절 뒤에 넣은 사본도 있으며, 더러는 요한복음 21장 25절 뒤에나 누가복음 21장 38절 뒤에 삽입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본래부터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독립적으로 볼 때 이 이야기는 아름답고 신빙성이 가득한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채택되지 않았고, 별도의 방식으로 존속하다가 어떤 시기에 와서 현 위치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어거스틴이 소개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가 그리스도인 여성들의 행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일부의 우려가 이 과정에 작용했는지도 모른다.2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은 그를 동정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를 통해 예수를 얽어매려 하는 비정한 동기를 가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에 걸려 있다. 이 여인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moicheuein)가 미혼자보다는 기혼자의 부정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던 것에 비추어 이 여인은 기혼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3 정황 자체를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혼자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여성이 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형평성의 문제 따위는 이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오는 군중의 분위기 속에 다 파묻혀버리고 있다. 사람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것인 만큼 이 여인에 대해서는 이미 죽어도 무방한 존재로 단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적 지위가 심각하게 도전받는 상황 속에서 자신만을 먼저 생각하고 그에 따라 상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역시 군중의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중심판에 영합하지 않으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과 그 필요를 보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그 여인은 일회용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죄를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의 삶을 살아야 할 한 소중한 인격으로 보신다.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은 숨긴 채 남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이중성을 보신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재판관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글을 쓰시다가 마침내 입을 열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땅에 쓰셨을 지에 대해 고래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일부 사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그들 각각의 죄’를 썼다고 첨부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로마의 관습이기는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죄의 선고가 있기 전에 먼저 죄목을 기록하는 일이 보편적이었다.4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땅에 기록하셨을 것으로 보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정확히 보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한다. 어느 누가 과연 먼저 돌을 던질 것인가? 신명기 17장 7절은 이런 형태의 유대식 형벌의 경우 증인이 먼저 돌로 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들의 죄의 증인을 앞에 두고 과연 누가 이 여인에 대한 심판적 증인 노릇을 할 사람이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 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이 이 여인보다 낫다는 상대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기세등등하게 몰려 왔던 사람들이 어른으로부터 시작해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다 발길을 돌렸다. 남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진정한 심판자 앞에서 스스로 돌을 맞아 마땅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결과일 것이다. 남을 정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필요가 있다. 참된 심판자는 외면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내면과 동기까지 살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후대의 필사자들이 현 위치를 적합한 것으로 본 데에는 나름대로의 혜안이 있다고 본다. 이 부분은 그 앞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핵심적인 논지가 어디에 모아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좌표의 역할을 한다. 앞으로는 7장 24절과 51절, 뒤로는 8장 15~16절, 26절, 50절에 이어지는 심판의 주제가 부각되고 있다.5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다. 반면 예수님은 하늘의 관점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내면까지를 다 살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짧은 한 찰나 속에서 자기 자신조차도 제대로 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영원의 시각을 가시신 분을 심판하려 하는 것이다. 정작 그런 그들에게 돌아갈 심판의 엄중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들은 보아야 한다.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테스트 케이스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심판 앞에 선 자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부당한 심판권을 그리스도 위에 행사하려 하는 자들은 보다 깊은 정죄 아래 떨어지고 만다.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8:12-30)

우리가 이 삽입된 이야기를 별도로 두고 볼 때, 8장 12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또’(palin)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음을 본다. 우리는 이 부분이 7장 37~38절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에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막절 절기 중 아침 제사 때 시행되었던 헌수(獻水, libation) 예식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수의 근원으로 밝히시는 것에 이어 8장 12절에서는 역시 초막절의 저녁 시간대에 거행되었던 빛의 예식과 관련하여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신다.

초막절 미쉬나(Mishnah Sukkah 5.1)에는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지켜졌는지에 대해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막절 절기의 첫날이 끝나갈 때 사람들은 여인들의 뜰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황금 등대들이 있었는데, 등대들 각각에 네 개의 황금 주발들이 놓여 있었으며, 그 곁에 네 사다리들이 있었다. 제사장 계열의 네 명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손에 기름 종지를 들고 주발마다 기름을 채웠다. 심지는 제사장들이 입던 바지나 앞치마 등으로 만들었다. 이 헌수의 장소로부터 나는 빛에 의해 예루살렘의 뜰이 밝혀지지 않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경건한 사람들과 그 의로운 행실이 잘 알려진 사람들이 무리들 앞에서 손에 횃불을 들고 춤을 추었으며, 그들 앞에서 노래와 찬양을 불렀다.”6

초막절에 행하여졌던 이와 같은 빛의 행사를 통해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이끌어 주었던 불기둥을 재현하고자 했다. 더군다나 이 절기가 추분과 겹쳐 있는 만큼 이때를 정점으로 기울어가는 여름과 가을의 빛을 아쉬워하며 붙잡고자 했을 것이다. 이 절기 중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장소가 어디인지를 일러주는 단서가 8장 20절에 나타난다. 그는 성전의 “연보 궤 앞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신다. 성전을 찾는 유대인들은 여인들의 뜰에 마련된 13개의 뿔나팔 모양의 연보 궤를 통해 헌금을 드리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들의 뜰에 계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시점이 7장 37절의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연결되는 것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빛의 축제가 이루어지는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횃불의 빛이 환히 밝혀진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빛으로 계시하시는 것이다.7

이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빛이 단순히 황금 주발에 기름을 채워 밤을 밝히는 한 축제일의 빛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으로 세상 가운데 오신 살아 있는 인격인 그분 자신이 진정한 빛이심을 알리시는 것이다. 과거 광야 생활의 장막 위에 임하였던 그 영광의 빛을 그들이 사모하고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빛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이 손으로 지은 장막이나 성전 위에 임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는 성육신하신 아들 위에 그 빛이 임하고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사실이 다른 시점도 아닌 초막절 절기에 맞추어서 선포되었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일이다. 빛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이 최고조에 이른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빛으로 선포하고 계신다. 그것도 단지 유대인들의 기대만을 만족시키는 제한된 의미의 빛이 아니다. 그는 온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앞서 7장에서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이라는 시점 속에서 유대인들을 사로잡는 기대가 무엇인지를 잘 아시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이다.8 그들이 과거의 기적들을 상기하며 간절히 사모하는 생수나 빛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 속에서 성취되어졌다. 이제는 그들의 기대, 그들의 소망,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것이 빛이요 생수의 근원이신 그분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나타내기 위해 멀리 있는 소재들을 끌어 오시지 않는다. 사람들의 삶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것을 사용하시고, 또 그것들이 새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닫혀 있던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빛이신 사실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9장의 한 예를 통해 생생히 제시되고 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고 눈을 떠서 빛을 보게 된다. 그는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게 된 것만이 아니라 차츰 믿음의 눈을 뜨고 하늘로부터이신 분 ‘인자’를 믿게 됐다. 그 안에서 그는 새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고, 세상을 진정으로 바르게 보는 자가 됐다. 빛이 있을 때만 우리는 세상의 비밀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이 빛이심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환히 보게 된다. 그 빛을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만이 아니다. 불트만의 이해는 이런 면에서 다소 제한적이다. 불트만은 이 빛을 통해 “실존 자체가 밝혀지고 그것이 그 본래의 것으로, 곧 생명으로 오게 된다”고 말한다.9 인간 실존의 진정성(authenticity) 이것이 계시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헨첸이 잘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진정성의 문제는 하이데거의 주제일지 모르나 요한의 주제는 아니다.10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아발견을 넘어 하나님의 진리를 보게 만든다.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선언은 바리새인들 속에서 즉각적인 반대를 불러일으킨다.11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증거가 적법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5:31)라는 이전의 말씀을 들어 예수님을 꼬투리 잡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점에서 형식적인 법적 절차에 관심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인격의 본질을 나타내시는데 관심을 가지신다. 이런 점은 예수님이 자신의 기원에 대해 아시는 것과 바리새인들이 이를 모른다는 것 사이의 대비를 통해 강하게 대조되고 있다. 그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그는 알지만 바리새인들은 모른다. 바리새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예수님의 판단은 그를 보내신 자에 따른 것이다(8:14~15).

이 부분에서의 논쟁은 7장과 유사성을 가진다. 7장 27~30절에서 예수님의 기원과 그의 보내신 자에 대한 언급,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를 잡고자 하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언급 등은 8장 14~20절속에 병행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8장 21~22절속에서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언급과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 역시 7장 33~36절속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이런 반복 속에서 예수님의 참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런 면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던지는 결정적 질문 “네가 누구냐”(8:25)에 대한 이 복음서의 대답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요한이 빈번히 부각시키는 오해가 발생하고 있다.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8:21)는 말씀을 받아 “저가 자결하려는가”(8:22)라고 유대인들이 반응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오해의 희생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표피적 면만을 건드릴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죽음의 의미를 아는 자들은 이것이 얼마나 복된 영광의 길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것의 차이는 단순한 지식의 차이로 그치지 않고 영원한 생사의 분기점을 만든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hoti ego eimi)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8:24)는 것이 육신을 따라 판단하는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판결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 생사의 분기점은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서 결정적으로 판가름 나게 된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hoti ego eimi)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8:28). 이처럼 끝까지 자신들의 육신적 판단에 따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있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믿더라”(8:30)고 보고되고 있다.

다시 논쟁 속으로(8:31~59)

이 믿음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 31절부터 이어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또 다른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곳에서와 유사하게 이 논쟁 역시 예수님의 도전적 선언에서부터 시작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1~32)는 말씀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종이 아니라는 항변으로 이 말씀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이 무엇으로 나타나든지 상관없이 이 구절의 핵심은 예수님의 자기선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하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지정하신다. 그것은 그의 말씀 안이다. 그의 말씀은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요(17:8) 또한 그 아버지의 말씀을 그가 제자들에게 주셨다(17:14). 그 말씀을 듣고 또한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8:51)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된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부분에서 언급하시는 진리는 예수님 자신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과 직결된다. 하나의 추상명사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할 때 알지 못하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진리이다(14:6). 따라서 그 진리가 초역사적 추상성 속에서 파악되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실제적 삶 속에서 계시되었다는 사실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12 따라서 본문 속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는 말씀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는 말씀과 상호 호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언에 이어지는 논쟁은 빌라도가 물었던 것처럼 “진리가 무엇이냐”(18:38)라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진리의 근원이 되는 아버지가 누구냐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되고 있다. 예수님의 “내 아버지”에 대한 언급과 “너희 아비”에 대한 강한 대조가 두드러진다(8:38).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아버지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아무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8:37)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증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지만(8:47) 사람들이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 됨에 대한 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른 근원을 가짐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짓의 아비”인 마귀라고 지적하신다(8:44). 이 마귀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는 자”이다. 곧 그에게 속한 것은 전부가 거짓이며 이 거짓의 생산소로부터 모든 거짓들이 나온다. 따라서 그는 거짓 속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자이며 진리 앞에서 가장 불편함을 느끼는 자이다. 이 때문에 그는 진리를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 진리가 자신의 기만성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기만된 자들 또한 마귀와 공동체 의식을 느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공격이 마귀의 자녀들을 통해 예수님께 가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폭로의 말씀 앞에 유대인들은 가장 심한 말로 반격을 가한다.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귀신이 들렸다고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8:48, 52). 이를 위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육신적 지위에 집착한다. 이미 7장 속에서도 ‘육신에 따른’ 많은 판단들을 하였지만, 이 부분 속에서 그들의 무기는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8:39)는 것이며, 그에 근거해서 자기들의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라”(8:41)는 것이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적자(嫡子)인 반면 예수님은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이며 귀신 들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7장에서 강조하던 ‘갈릴리 사람’에 이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사회적 카테고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지위에 손상을 입히고 결국 이를 박탈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13 그를 존경 대신 천대 받을 부류 가운데 하나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진정한 영광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영광은 자신이 스스로 획책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8:54)라고 말씀하신다. 이 분을 유대인들은 아버지라 부르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아버지께서 영광을 돌리는 그분께 유대인들은 영광 돌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곧 자신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실제로는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다(8:55). 사람들이 불순종의 극치 가운데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지라도 그는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 자기 생명을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버리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10:17~18).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하는(8:44)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주장하는 말들의 허구성을 하나씩 하나씩 밝히고 계신다. 먼저는, 앞서 나타난 것처럼, “너희가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그 하나님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아들과 아버지의 상호 영광 돌리심을 떠나서는 바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다루고 있다. 그가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너희가 너희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아브라함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아브라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8:56)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난다.

다시 한번 유대인들의 즉각적 반격이 따른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는 오십이 되면 아브라함을 볼 자격이 생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십의 나이는 유대인들에게 원로로 대접받을 수 있는 나이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 그런 지위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14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느냐?”(heorakas)는 8장 57절의 질문은 일부 사본에서는 “아브라함이 너를 보았느냐?”(heoraken se)로 나온다(p.75 등).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보았다’는 56절의 예수님의 언급에 비추어서 이와 같이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메츠거가 잘 지적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보다 아브라함의 권위가 월등히 더 크므로 ‘감히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냐’ 하고 묻는 것이 보다 개연성이 있는 일로 보인다.15 예수님은 그들이 형식적으로 의존하는 아브라함의 권위를 능가하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신다. 곧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는 선언이 그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누구이시냐에 대한 중요한 선언이다. “내가 있다”는 표현은 ego eimi의 절대적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8장 24절과 28절의 “내가 그인 줄”(hoti ego eimi, 원문에는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에 이어 예수님의 신적 자기계시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표현 속에 나타난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감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 그를 치려했다. 곧 레위기 24장 16절 등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들에 대한 형벌을 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 다만 그들은 예수님을 그와 같이 믿지 않았던 것이다. 8장 31절에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들의 믿음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결정적인 면에서는 허점을 보이고 있다. 믿음과 불신앙의 파도타기는 요한복음 속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 가운데 하나이다.16

이 연속되는 논쟁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해 가지는 인식과 예수님 자신의 참 모습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육체를 따른’ 판단을 넘어 그의 참 모습을 깨닫는 자리로 나아오도록 하기 위한 초청의 과정이다. 예수님에 대한 표피적 이해에 그치는 오해의 희생자들이 되지 말고 그를 바르게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는 빛 속으로 나아가며 참 제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에의 적용

이 본문의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참으로 크고 중요하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 속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미혹된 견해가 형성되기 쉽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참 모습을 따라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필요와 조건에 따라 믿음으로 실상은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한 영광에까지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한복음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그에게 잘못된 이름들을 돌렸던 것과 같은 실수를 우리가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가지고 오시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그의 참 이름을 우리가 받을 때 우리 또한 그 안에서 빛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이 빛의 사람의 삶을 삶으로써 예수님께서 당대에 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의 일상의 기대와 소망을 진리의 빛으로 조명하고 재해석하게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주(註)

1. 이 부분의 사본상 문제점의 논의에 대해서는 참고, Bruce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nd edn. (DB and UBS, 1971, 1994), pp. 187~89.

2. 이에 대해서는 참고, George R. Beasley-Murray, John, WBC 36 (Waco: Word, 1987), pp. 143~44.

3. Beasley-Murray, John, p. 145.

4. 이런 주장은 T.W. Manson이 하고 있으나, Beasley-Murray는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참고, Beasley-Murray, John, p. 146.

5. 참고, D. Moody Smith, Jr., John (Nashville: Abingdon Press, 1999), p. 179.

6. Beasley-Murray, John, p. 127에서 재인용.

7. 이 점에 대해서 명확히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보는 견해로는 참고, Gary M. Burge, John,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0), pp. 254~257.

8. 참고, B.F. Westco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81), p. 123.

9. Rudolf Bultmann,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Oxford: Blackwell, 1971), p. 342.

10. Ernst Haenchen, John II (Philadelphia: Fortress, 1984). p. 26.

11. 7장과 8장 속에서의 논쟁들이 예수님의 선언적 말씀들에 의해 촉발되고 있음을 잘 정리해주고 있는 예로 참고, C.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3), pp. 345~46.

12. 참고, Anthony C. Thiselton, “Truth” in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III, p. 892.

13. 이 부분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의 좋은 한 예로는 참고, Jerome H. Neyrey, “Spaces and Places, Whence and Whither, Homes and Rooms: ‘Territoriality’ in the Fourth Gospel,” Biblical Theology Bulletin 32 (2002), 60~74.

14. 또는 ‘50년도 되지 않게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읽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참고, D.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illar NT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1), p. 359.

15.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p. 193.

16. 참고, 메릴 테니, 「요한복음 해석」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p. 129.

요한복음 8장 주석

요한복음 제 8장

=====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7:53-8:11까지의 기사는, 사본상 문제가 있는 부분이

다. 이 중요한 사본들(* , B, L, T, W)에는 없고, 중요하지 않는 사본들(D, E)에만

있을 뿐이다. 알포도(Alford)와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이 부분이 진정한 역

사성을 띠었지만 요한의 친필은 아니고, 구전적(口傳的)으로 돌아가던 것이 여기에 삽

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7:53-8:11)의 순정성(純正性)을 변호한 학자들도 있

다(I.W. Burgon, C.H. Van Herwerden, J.J. Van Oesterzee etc).

헨드릭센(Hendriksen)에 의하면, 이 부분을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 아니라고 하

는 학자들의 이유는, (1) 여기 있는 어떤 낱말들이 요한의 기록한 다른 책들에는 나타

나지 않는다는 것, (2)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부분이 중요한 사본과 번역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롸벌트손(A.T. Robertson)은, 이것이 본래는 변주(變註)에만 있

던 것인데 후에 서사자(書寫者)의 잘못으로 본문에 삽입되었다고 한다(Introduction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25, p.154).

그러나 이 부분이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들 수 있는

이유는, (1) 여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시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8장에 가르치신 바 진리가 죄인을 놓아준다는 사상(32절)과 부합한다. (2) 요한의 제

자 파피아스(Papias)도 이 부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하다. 유세비우스(Eusebius)

는 말하기를, “파피아스가 히브리 복음에 있는대로 주님 앞에 고소 당한 많은 죄 있는

여자에게 관한 이야기도 해석하였다”고 하였다(Ecclesiastical History, III. 39:17).

(3)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사본에서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뽑았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여자들이 그 이야기를 근거하고 정조 없

는 행동의 구실을 삼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라고 하였다(De Adulternis Conjugiis

II. 7). 이 점에 있어서 헨드릭센(Hendriksen)은 결론하기를, “여기 기록된 것이 확실

히 역사적으로 있는 사건이었겠고, 거기 포함된 사상이 사도적 사상과 충돌되지 않는

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의 복음에서 제외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유익을 위

하여 마땅히 보수해야 된다. 전도자들이 이 부분 말씀에 근거하고 설교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II.

pp. 33-35).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 그가 감람산으로 가신

것(1절)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겠고, 일찌기 성전으로 들어오신 것은 진리를 가르치시

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하심과 가르치심은 그의 주요한 일이었다.

=====8:3,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흠을 잡아 보려고 애쓴 자들이었다. 그들

은, 범죄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잔인한 월권행위를 감행하였다. 죄인은

법정에서 취급되어야 하는데, 법관이 아닌 그들로서 죄인을 끌고 다닐 권리는 어디 있

었는가?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레 20:10; 신 22:22 참조. 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진실히 문제를 해

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을 것이면, 로마의 정권을 거스리게 되었을 뻔하였

다. 그 이유는, 그때에 로마의 정권이 유대 민간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었

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더라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린 자라는 죄인 취급을 받으실 뻔하였다.유대인들은 저렇게 교묘하게 예수

님을 딜레마(Dilemma=窮地)에 빠뜨리려고 시험하였다.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로마 법에는 간음한 여

자를 돌로 치는 법이 없으니 만큼,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하라고 명하신다면

로마 법에 걸리게 되고, 모세의 법대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에 걸리

게 될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예수님께서 글을 쓰신 일은, 이 사건에 관련하여 한번 있었을

뿐이다. 그 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함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실언하

시는 허물을 찾아 보려는 간교한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것은, 그 여자보다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과 같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있어서 범죄자를 취급하는 새 계명(사랑)의 원리이다(갈 6:1). 이 말씀

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한 말씀과 같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셨으므로 저희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다.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혹설에, 그 때 그 쓴 글은 거기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이었겠다고 한다. 그들의 이름을 땅에 쓰신 목적은, 그 이

름의 소유자들이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려 함이라고 한다(렘

17:13). 그러나 이런 해석은 추측에 불과하다.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크로솨이데(Grosheide)

는, 그들의 나가게 된 원인이 예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그의 기록하신 글에도 있다

는 의미로 말하였다. 곧, “그들은, 예수님의 땅에 기록하신 말씀을 읽었으나 항복하지

는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였으니 만큼, 거기서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P.7). 그들이 “하나씩” 나

간 것은, 그들이 감심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지 못하여 행동한 증표이다. 그들은, 예수

님의 말씀을 양심적으로 옳은 줄 알면서 그래도 대항해 보려는 억지를 부릴 듯이 머뭇

거리다가 할 수 없어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저렇게 진리를 눌러 보려는 강퍅한

심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을 찌르신 주님의 옳은 말씀의 권위 앞에

서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모두 다 물러갔다.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

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죄과를 가볍게 보시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제멋대로 재판장이 되어 남을 정

죄하는 인간들의 월권 행동을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 뿐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이제 신약 시대를 당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때에 영적(靈的)으로 사죄함이 될 수

있는 사실을 암시한다.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회개자에게는 사죄를 선고하시는 사명을

가지셨다. 그러니 만큼, 그가 그 여자에게 회개를 권고하실 뿐이고 정죄하지 않으셨

다.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여기 이른 바 “나는 세상

의 빛”이란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만물 창조의 근본을 이룬 첫째 날의 빛을 연상케

한다고 하며, 그 빛이 없을 때에는 피조물이 하나의 혼돈체였으나, 그 빛으로 말미암

아 비로소 질서 있는 우주가 되었다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P.10). “빛”은 영적으로 세 가지 작용을 의미하는데, 곧, 밝

혀 주어 알게함 (계시를 의미함)과 구원하여 줌과 깨끗하게 함(성결을 의미함)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빛”이라고 하신 동기는, 메시야를 빛과 같다고 한 구약을 생각

하신데 있었을 것이다(사 9:2, 42:6, 49:6; 말 4:2). 눅 2:32 참조. “따르는 자”란 말

은, 어두움 가운데서 빛만을 따르는 것과 같은 태도를 생각케 한다. 그런 사람은, 예

수님 밖에 다른 데는 어두움만 가득한 줄 확신하고 전적으로 그 분만을 의지하고 따라

간다. 그러므로 여기 “따른다”는 말은, 신앙의 동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어두움”

은 무지와 죄와 불행을 모두 가리키는 비유이다. “생명의 빛”이란 것은, 생명에서 나

는 빛, 곧, 하나님과 사귄 생명에서 나는 빛으로서 우리의 지능을 밝게 하여 주는 것

이라고, 고데이(F,Godet)는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해석되어

야 한다. 6:35의 “생명의 떡”이란 말, 6:68의 “영생의 말씀”이란 말, 계 21:6의 “생명

수”란 말이, 모두 다 같은 성격 있는 문구로서 생명을 주는 떡, 말씀, 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이스(B.Weiss)는,이것을 “생명 중개(仲介)의 빛” 이라고 해석하였다(das

zum Leben gehorige Licht, welches dieses vermittelt). 그러면, 생명을 얻음이, 그

리스도의 선물인 빛을 소유함에 달렸다. 폰 슈렝크(Von Schrenk)와 푸리브노우

(Prinbnow)등도 이 말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빛은 진리를 아는데 인도하

고, 진리는 생명으로 인도한다”라고 하였다(Das Licht fuhrt zum Erkennen der

Wahrheit und dieses zum Leben. a. w. S. 72).

=====8:13,14

여기 바리새인들의 힐난한 말은 모순된 것이다. 그들은 빛의 자중성을 모른 것이

다. 빛은 다른 것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직접 자체의 밝음을 나타냄으로, 그 빛된

사실을 성립시킨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

하는 높은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는 자기가 친히 자기를 증거하심으로만 자기를 나타

내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 빛과 같다. 이 점에 대하여 228 페이지에 있는 설교를

참조하여라.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이 귀절과 다음 귀

절은, 사람에게 대한 바리새인들의 지식 방법과 예수님의 것을 대조한다. 바리새인들

은 남들을 외모(육체)로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판단(심판) 하시지 않는다. 그는 누구든지 그 때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

람이 죄인인 것은 일반인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처지에서 그는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

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심

을 가리킨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시며 증거하실지라도 그 증거는

참되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 증거는, 그와 및 그를 보내신 이(하나님 아버지)가

합하여 나타내시는 유력한 두 증인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8:17,18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 “두 증인”에 관하여

는, 민 35:30; 신 17:6, 19:15을 참조하여라. 예수님은, 두 증인의 증거가 유력한 사

실을 여기 지적하시고, 자기에게 대한 이런 이중의 증거자들이 계심을 말씀해 주신다.

아버지의 증거는 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5:37-39).

여기 이 귀절을 보아서도 신약에 사용된 “증거”, 혹은 “증인”이란 말이 법정의 증

거 원칙에 의한 것임이 알려진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관한 증인이 두 분인 사실을 유

대인의 율법에 근거하여 논하신 것이다. 스키페르스(R.Schippers)는, 예수님에게 대한

신약 증인들의 증거가, 법정 증거의 엄중한 성격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곧,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한 자들이다. 법정 재판도 그들을 정당성 있다고 간주해야

된다. 더욱 이 요한의 저술에 있어서는, ‘증거’란 말이 구약에서 처럼 법정 술어의 성

격을 띤 것이다. 거기서(요한 복음)는, 증인이란 것은 친히 보고 들은 사실을 증거하

는 자였다. 거기 기록된대로, 증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성부와 성령처럼

그의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성품에 기준하여 사실을 밝히 아시고 말씀하신 증거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있는 모든 증거는, 예수님에게 대한 사람들의 불신앙과 비진리를

걸어서 법정 증거의 성격으로 고소한 것이다. 법적 정당성과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법정에서는 사실이라면 정당성 있는 판결을 내

리는 법이다. 이 둘의 관련성은 엄중한 것이다. 이런 성격을 띠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요한 복음의 증거이다. 따라서 그 증거된 사실을 신앙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만큼 그 증거는 엄중하고 참된 법정 증거의 사

실주의에 입각한 것이다”(意譯)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1938, PP.198-199).

=====8: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그들

은, 예수님의 아버지, 곧, 참 하나님을 모르는 처지에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원인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드리지 않음(믿지 않음)에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는 중보자(中保

者)시다(5:38, 14:7, 9; 마 11:27).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

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연보궤”는 성전 안에 여자들이 서는

뜰 밖에 있다. 그곳은 산헤드린 고의회가 모이는 방에서 멀지 않다. 예수께서 거기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잡지 못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하락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

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이것은, 그 때에 저렇게 강퍅하여 회개치 않던 유

대인들을 경성시키려고 하신 말씀이다. 곧,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들에

게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별세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날이 온

다. 기회가 다 지난 다음에는 그들이 그것을 회상하고 사모하여도 소용이 없다. 하나

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신 기회는 천지 창조 이후 처음이요, 후

에도 없을 희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귀한 줄 몰랐다. 그들은 빛이

있을 때에 빛을 믿어야 된다(12:35-36).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저희 죄 가운데

서 영원히 멸망할 것 밖에 없다.

=====8: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

려는가 – 그들은, 이 말로써 그들의 지독한 강퍅과 불회개의 철면피를 그대로 드러냈

다. 앞절에 있는 예수님의 경고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많지 못함을 알려주신 무

서운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꼼짝하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만 토

한다. 자살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옥 가는 길이다(Josep,. Bell. Jud., 3, 8, 5).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

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 때 강퍅한 유

대인들과의 사이에 영적 융통성이 도무지 없었던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은 땅에 속하

여 죄악에 젖었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예수님의 가시는 곳(하나님 아버지의 계신 곳)에 갈

수 없다.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

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여기 “내가 그

이”란 말은, 그가 영원 자존자, 곧, 하나님 자신이시란 뜻이다(출 3:14; 신 32:39; 시

90:2).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과 생명의 관계를 가장 힘있게 고조한 것이다. 곧, 믿음 없는 곳에는 죽음이 있을 뿐

이라는 의미이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은 “죄 가운데서 영멸하리라”는 뜻이

니, 곧, 그 죄인이 죄 안에 있고 또한 죄로 인한 형벌 아래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하

나님과 그 사람과의 절대적 분리(絶對的分離)를 가리킨다(Grosheide). 엡 2:1 참조.

=====8: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그리스도는, 옛날부터 모든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

되신 내용이란 뜻이라고 함. 유대인들은 그를 모를 수 없으리 만큼 겹겹이 계시(啓示)

를 받아 왔고, 계약도 받아 왔다. (2)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기부터 자기가 누구라고

주장하여 오시던대로의 “그 이”란 뜻이라고 함. (3)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처음”

(곧, 만물을 지으신 영원하신 자)이라는 뜻이라고 함(Augustine). 그러면, 이 해석에

의하면, “그 처음이신 분이 너희에게 말씀도 하신다”(계시하신다)는 뜻을 이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처음부터”란 말

을, “절대로”란 뜻이라고 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선언하는 그대로이다”라는 말씀이

라고 한다. 곧, 그가 선언하시는대로 메시야란 뜻이라는 말이겠다. (5) 본질적으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내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함(J.H.Bernard). 곧, 예수님의 말

씀이 계시하는 바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위의 모든 해석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가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해석들이

그 아래 문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

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 곧, 그가 그들을 책망(“판단”)하실 말

씀이 많아도, 그는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복음)을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이는 메시야 밖에 없다. 이 말씀의 내용은, 그가 메시야라고 주장하심과 같다.

=====8: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 이것은, 얼마나 그들이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사실을 통탄하는 저자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윗절에 말씀하신바

“나를 보내신 자”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아직 몰랐다. 그들이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은, 결국 자신을 메시야라고 증거하신 예수

님의 주장을 모른다는 것이다.

=====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

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

리라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부자 관계를 모르

는(27절) 유대인들을 깨우치려 하심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런 관계를

가지신 예수님을, 그의 죽음 당하신 후에야 알게 된다고 여기 밝힌다. 벴겔(Bengel)의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지금 그의 말씀을 근거해서는 믿지 않던 그 이를, 장차 그에

게 일어날 사실(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사실)로 인해서 알게 될 것

이다. 여기 “너희”란 말은 그 때의 유대인들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후

에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게 될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들리우신 뒤에야 그를

알게 된 자들은, 예컨대 백부장(마 27:54)과, 가슴을 친 백성들과(눅 23:27), 회개한

3,000명이다(행 2:41). “그 인줄안다”는 말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고

메시야이신 사실을 유대인들이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

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

신 메시야란 뜻이다. 5:17,19,30 참조. 유대인들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다음에야 그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깨닫게 된 자들이 많이 생겼다. 예수

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를 알지 못하게 하는 인간들의 죄악의 장벽을 없애는 능력이

다.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이 때에 유대인들은,예수님을 반대함에 있어서 매우

강퍅하였다(22,25).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역사(役事)에 있어서 고독을 느끼지 않으

시고 외축하지도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

다. 하나님은 온 세계보다 강하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

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행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아

들 뿐이시다. 우리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그 안에 있으므로만, 하나님의 함

께 하여 주시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 이 귀절이 말하는대로 “많은 사람이 믿더

라”는 문구가, 일시적 신자를 가리키지 않고 참 신자들을 의미했다면 문제가 생긴다.

곧, 그들이 왜 잠시 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항하였을까 하는 문제이다. 31-59절 참

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33절 이하에 나타난대로 예수님을 항거한

사람들은, 30절의 “많은 사람” 가운데 포함되었던 일부 불순 분자들일 것이다.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

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

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48,52,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

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란 말

(* )은 “그 진리”란 뜻이니, 그 유일하신 진리를 가리킨다

(14:6). 이것은, 철학적인 추상적 진리, 곧, 개념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둘러싸고 계시(啓示)된 그의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으로 구체화 된 계시

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36절 에서 밝혀 준것과 같이, 하나님 아들(예수님 자신)이

그 속죄의 죽으심에 의하여 신자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귀절에 있어서 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된다.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결과가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와

예수님을 동일체라고도 할 만하다(14:6).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진리이며, 그의 보내

신 성령의 하시는 모든 기적적인 역사도 진리이다. 참된 기적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진리 없는 기적이나 역사(役事)는 성령의 것이 아니다.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여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란 말은, 어떻게 해석될 말씀인가? 이것이 영적 의미일 것인가, 육적 의미일

것인가? 고데이(F.Godet)는, 이것을 육적 의미로 생각하고 유대인의 국민 자유를 가리

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학설은 부당하다. 유대 나라는 그 당시에도 로마의 속방(屬

邦)으로서 이미 종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전에도 저희 조상들이 여러번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종으로 끌려 간 일이 있었다(Grosheide).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것으로 택하실 때에 아브라

함을 그 계약 대상의 머리로 정하셨으니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

다고 한 것이다. 곧, 언제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겨 왔고, 어떤 다른 나라

의 신(神)을 섬긴 적이 없다고 한다(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汚點은 잊어

버렸음).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행한 것은 틀렸지만 계약 신관만은 가지노라고 하였다. 하나

님은 체계 없이 변동하시는 이가 아니시고, 옛 사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며, 이

루어 가시며, 그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도 않으신다. 신자는 이런 역사적 신관을 가

지고, 또 저런 든든한 구원사관(救援史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는, 저렇

게 계약 사상에 기준하여 교회를 생각해야 된다. 교회는, 계약 사상을 배경하고 이 세

상 기관으로서의 한 방면을 가짐에 있어서 낙관한다. 교회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있어

서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고, 그 기관 성격 때문에 세상과 접촉을 가진

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

는 회원들에게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결성이 불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과 접촉하여 세상을 이긴다. 이렇게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성립된

다. 그러나 땅위에는 계약 성격을 무시하고 취미 본위로 사람끼리의 연락만을 치중하

여 나타나는 단체들이 있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기보다는 종파(sect)라고 함이 적합하

다. 이런 종파들이 있어서는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 경향이 많고, 객관적인 계

약(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필요하게 여기지 않는다(H. Dooyewee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III, p. 529).

그러면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계약 신관(契約神觀)을 주장하였더라면 진리에

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주장함에 있어서 기계적이고 모방적인 점이

잘못된 것이다.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죄의 종”이란 말은, (1) 범죄하는 자마다 결국 그 죄의 지배를 받게 되어진

다는 뜻과, (2) 그가 거기서 놓이는 길은 오직 속량함이 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을 가

진다. 과연 죄는 무섭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힘있게 주관하여 망하게

만든다. 전에 아일랜드 해역(海域)에서 배가 파선된 일이 있었다. 그 배를 운전하는

선장도 퍽 능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침반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고 지남침을

점검하는데, 칼 끝이 조금 떨어져 상자에 떨어졌다. 그것 때문에 지남침의 작용이 잘

못되어 결국 딴 방향으로 가다가 파선 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죄는 작은 것

이라도 사람을 주장하여 망하게 한다. 롬 7:23에 말하기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

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다. 죄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가장 악독한 원수이다. 사람

이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사람을 주장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만든다. 롬 7:15-20 참조. 이렇게 죄는 사람을 사로잡아 망하게 한다. 사람을 잡는 무

서운 뱀을 하나 잡아 훈련시켰는데, 그의 팔에 챙챙 감겨 머리를 들고 있으면서 그 사

람이 먹을 것을 주면 받아 먹곤 하였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그 구경을 시켰다.

한 번은, 그 뱀이 그렇게 그 사람의 팔을 챙챙감은 다음 그의 팔을 물었으므로 당장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 죄를 심상히 여기며 죄로 더불어 즐기는 자는 결국 이

렇게 된다. 어떤 써커스(Circus)단에서, 사람이 호랑이의 입에 머리를 넣고 구경을 시

키는 순서가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머리를 호랑이 입에 넣었을 때에 그 호랑이

가 그의 머리를 깨물었다고 한다. 죄를 즐기는 자도 이와 같이 위험한 짓을 하다가 망

하는 자와 같다.

종이 속량되어 놓이는 것처럼, 죄인도 속량되어 놓이는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

들의 해석에서 참조하여라.

=====8:35,36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 종은, 아브라함의 집의 축복 언약을 누릴자

가 못되고 일시 그 집에 거하는 것처럼, 구속을 받지 못한 사람, 곧, 죄의 종 된자는

하나님의 나라 기업을 누리지 못한다. 그는 마침내 택한 백성과 나누일 때가 있다.

그러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기업을 영원히 누리실 자니, 그가 구속자

(救贖者)의 자격을 가지셨다. 눅 4:18; 갈 4:1-7, 4:28, 31, 5:1 참조. 롬 8:1에 말하

기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

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실 뿐아니라, 모든 죄악을 도말하여 없애 주시는 구주님 이시

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인을 놓아 주시는 자격을 지닌 이유는, 위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까닭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만큼, 하나님의 집

을 지으신 자시며 또는 그 집을 맡으신 이로서(히 3:3-6), 영원히 살아 계시다. 그러

므로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 집에 속하여 영원히 죄의 노예된 자리에서 벗어 나

서 참된 자유를 누릴수 있다. 세상 나라에 충성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의 희생에 의하

여 민족을 위한 육적인 생활에 유익을 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죄악에서 해방시

켜 영원히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할 수는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이 되도

록 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

시며 우리가 자유를 얻는다. 만일 사람들이 물질로서 죄중에서 건짐이 된다면, 하나님

께서 지구보다 큰 금덩이라도 그들을 위하여 내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로는

죄에서 건짐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보다 귀하신 아

들을 희생시키셨다. 사람이 죄의 조이 된 것을 그의 힘으로는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 된 불행을 없애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

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찾아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며, 그의 고침 받을 소원

있는 여부를 알아 보셨다(요 5:6).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해방하신 혜택 아래서는

우리가 확실한 소망을 가진다. 그러므로 히 3:6 하반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애국자의 담

대함과 자랑을 잘 안다. 그들은 국가의 소망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다. 그렇

다면,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영적 소망으로(믿음으로) 담대해야 될까?

딤전 4:8에 말하기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귀한 축복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비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축복이 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구속을 믿지 않는 자는, 곡식이 가득한 창고에서 굶어 죽는 자와 같

다. 미국 남북 전쟁때에,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데 한 군인이 찾아 와서 말하기

를, “나를 살리시오, 나를 살리시오!”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묻기를, “왜 그

러는가?”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도망치는 병정인데 먹을 양식이 없어 그럽니

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말 하기를, “저 동네에 들어 가시오”라고 하

니, 그 병정은 말하기를, “내가 거기 가면 군인들이 총살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탄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은 정전이 되었소”라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병정은 기뻐하

며 마을로 들어 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는 이 귀한 소

식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일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

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예수님은, 그 때의 유대인들이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그의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을 곳이 없음은, 그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

다. 크로솨이데(Grosheide)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납 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영적으로 한 계통이 아닌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브라함이 바라보며 기뻐하던 메시야(56절)를 죽이려고 하였다.

=====8:38

나는 내 아버징게서 본 것을 마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것을 행하느니라

– 이 말씀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

은, 역시 그들과 예수님과의 영적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

손이었더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셨던 예수님과 일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

님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재에도 하나님 아버지 곁에 계셔서

그의 보시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하여(말씀하여) 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곧,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하였다. 예수님의 역사는, 모두 다 계시를

목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언행이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언행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이 다 죄악이다.

=====8:39,40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

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수님

은 여기서도 그 때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실상 아브라함과

같은 의(義)를 행하지 않는 모순을 지적하신다.

=====8:41,42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저희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다시 지적하신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였더라면 그리스도

를 사랑하였을 뻔하였다(요일 5:1-2).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도리

어 죽이려고 하였다.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 이것

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이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없

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무서운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해야 되며, 자신을 걱정해야 될 처지였다.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 이 말씀은, 그 때 유대인

들의 마귀적인 성격을 지적하심이다. 그는, 이렇게 날카롭게 말씀하셔서 그들의 심령

상태의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

니하느냐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는 도언(挑言)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

는 말씀이다. 이것은 큰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신 일이 없는(죄가 없으시니 만

큼) 사실도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이지만, 여기 이 말씀도 그러하다. 무죄자가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듣는 자들은 그것을 믿을 것 밖에 없다. 아무리 진리를 말하여도 그 말

하는 자 자신에게 허물이 있으면, 듣는 자들이 잘 믿어주지 않는다.

=====8:47,48

하나님께 속한 자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 유대인들은, 타락한 자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켜 “사마리아 사

람”이라고 욕한다. 이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부패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못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의 부패를 지적하신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

는 “귀신이 들렸다”하며 욕하였다.

=====8:49-51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자아주장의 말씀이 중대한 것임을 지적한다. (1) 그 말씀

은,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가 아니고 도리어 그와 정반대로 극치(極致)의 진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심에서 나타난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공경하시는 것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것

은, 경건을 모욕하는 극단이요,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그런 미친 일로 여기는 것도 그

러하다(49절). (2) 예수님의 주장은, 저렇게 자기 자신 공경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

의 영광을 찾아 드리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주장이 무시를

당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세워 주시는 것이다(50절). (3) 예수님의

주장을 믿는 자는 영생하게 된다(51절). 위의 세 가지로 나타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중대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의 주장이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라는 뜻으로 모욕하였으니, 그들이 극도로 강퍅해진 것이 드러났다.

=====8:52,53

이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한다. 유대인

들의 변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곧,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자들을 죽지 않게 하여 주

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영생하고야 비로소 남들도 영생케

할 터인데,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선지자들과 아브라함도 다

죽지 않았는가?”한다.

=====8:54-57

예수님은, 그들의 난제들을 다음과 같이 해결하여 주셨다. 곧, (1) 그의 말씀은 절

대로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 그의 주장은,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그대로 순

종하여 전하시는 것 뿐이니 만큼, 그것은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의 변론이다. 그의 주

장, 곧, 그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

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이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그

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 만큼, 절대적 진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이 불신앙한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그들의 지식이 형식 뿐이고 참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이런 불신앙의 원인을 지적하시는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

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라고 하셨다(54-55상

반). (2) 그가 유대인들의 그릇된 사상(예수님을 선지자들이나 아브라함보다 낮게 보

는 사상((52-53)을 시정시키심,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보다도 높다고 생각된

아브라함의 지위에 대하여, 그는 말씀하셨다(56-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6절)

– 랍비들의 사상에도,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메시야 시대가 계시되었다는 신념이 있었

다(C.K.Barrett,P.291). 그러나 그보다도 이 귀절 상반절의 내용, 아브라함이 그의 아

들 이삭의 출생에 대한 약속을 받고 기뻐한 사실이다(창 17:17). 이삭의 출생 약속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란 약속 내용을 가진 것이

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메시야께서 그의 후손으로 나시게 될 것을

내다보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내다보고 즐거워하였다.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과연 약속되었던대로 1년 후에 이삭이 출생하

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 성취를 보고 기뻐했다는 뜻인 듯하다(Hendriksen,

PP. 64-65).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여기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

은 아브라함이 땅에 있을 동안에 기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늘에 가서 체험한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 P.60).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관설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으니 만큼, 그가 아브라함보다

자기의 위대하심을 증거하시려는데 있다. 58절 참조.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여기 “오십도 못 되었

는데”란 말 때문에, 학자들은 예수님의 그 때 연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곧, 그 때

에 그의 연세가 30대라면,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라고 한 유대인들의 말이 자연스

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여기 “오십”이란 말 대신에

“사십(* )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에 불과한 것이

다. 그리고 이레네오(Irenaeus)는 말하기를, 그 때에 예수님의 연세가 50세에 가까왔

을 것이라고 하나(Adv. Haer. 2, 22:6),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추측에 불과

한 말이다. 여기 “오십”이란 것은,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시간 거리(2000년동안)

에 대조하여 생각된 짧은 연수이다.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씀에 대한 사본상 독구(獨句)들이 서로 다른것이 있

다.(1) 우리의 한역이 채택한 헬라 원문(* )은,

* ,A,C,D,N의 것이고, (2) “아브라함이 너를 보았는가”

(* )란 독구도 있는데, 그것은, 수리아역(Syr.

sin)과 애굽역의 지지를 받는 시내산 사본(* )의 독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58절) –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57절) 라고 한 유대인들의 힐문에 대하

여 그는 대답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이 세상 연령에 의하여 위대해지신 분이 아니다.

그의 생애는 33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의 하신 일의 위대는 그의 초자연

적 인격에 달렸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초역사적(超歷史的)인 인격이시

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

셨다. 여기 이른바,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헬라 원어(* )는

현재사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의 존재는 늘 현재란 뜻이다. 비켄하우젤(Alfred Wikenhauser)은, 여기 “내가 있느

니라”고 한 말씀에서 그의 존재가 어느 역사적 시간에든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Durch bin ich “bringt er zum Ausdruck, dass seine

Existenz unabhangig ist von jeder Zeit.-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5).

다시 말하면, 그는,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과 마

찬가지이다. 이것은, 히 13:8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토록 동일하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초시간적 인격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시

간 세계에서 33년 동안 행하신 그의 행적도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이렇게 위

대하신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어떤 파선 당한 선객이 바다 가운데서 수면에솟아 오른 바위 때문에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 그 바위의 꼭대기 면적은 비록 좁았으나 그 바위 밑은 매우 크며, 또 깊이 뿌

리 박고 있었으므로 안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역사의 생애는

짧게 가지셨지만, 그 인격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게 된다. 우리의 이 세상 생애가 짧아도 걱정될 것은 없다. 우

리의 중요성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데 있다.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10:31-33,

11:53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 그 생명을 원수들

에게 내어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위험을 피하여 숨기도 하셨다. 희생이 귀하지만, 하

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낭비된 희생으로서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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