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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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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빈센트 반 고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빈센트 빌럼 반 고흐(네덜란드어: Vincent Willem van Gogh 네덜란드어 발음: [ˈvɪnsənt ˈʋɪləm vɑŋ ˈɣɔx] ( 듣기),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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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편집]
관련서적[편집]
가십[편집]
대표 작품과 화보[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천재 화가 고흐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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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 파리 ‘빛의 아틀리에 Ateliers des Lumières’
2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 레 보 드 프로방스 ‘빛의 채석장 Carrières de Lumières’
3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서울 우정아트센터
티켓 예약 – Van Gogh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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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미술관의 체험 전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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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을 향기로 표현하다 – 인천in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인터넷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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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을 향기로 표현하다 – 인천in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인터넷신문 Updating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차가운 숲의 향이 난다”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의 레플리카 작품 전시회가 3월 4일부터 4월 3일까지 서구문화회관 아트갤러리에서 개최된다.이번 전시는 보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작품이 더욱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프루스트 효과’를 이용한 체험형 전시로 기획됐다.프루스트 효과란 후각(향기)을 통한 자극으로 기억을 재생해내는 현상이다. 후각을 이용하면 더욱 강렬하고 인상 깊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작품은 고흐의 생애와 연관 지어 진열했다. 우중충한 색감의 초창기 작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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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빌럼 반 고흐(네덜란드어: Vincent Willem van Gogh 네덜란드어 발음: [ˈvɪnsənt ˈʋɪləm vɑŋ ˈɣɔx] ( 듣기) ,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의 화가로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자신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어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반 고흐는 흔히 탈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분야에 영감을 주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국돈으로 약 580억원)에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1]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천 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다.
인생 [ 편집 ]
어린 시절 (1853~1869) [ 편집 ]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쥔더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종교적 활동과 미술을 추구했다. 반 고흐는 진지하고 내성적이었으며,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고흐가 태어나기 정확히 1년 전인 1852년 3월 30일 고흐의 형이 태어났으나, 얼마 못 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흐가 집안의 장남이었다. 1860년에 그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쥔더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1861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32km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그는 가족을 집에 놔두고 떨어져 있는 것을 싫어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회상하곤 했다. 1866년 9월 15일부터 1868년 3월까지 그는 틸뷔르흐에 위치한 제2 빌렘 칼리지에 다녔다. 고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우울하고 차가웠던 불모스러운”시간이라고 했다.[2]
청년 시절 (1869~1878) [ 편집 ]
16살에 빈센트는 삼촌 빈센트의 권유로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네 살 아래 동생이자 빈센트가 평생의 우애로 아꼈던 그의 동생 테오도 나중에 그 회사에 들어왔다. 이 우애는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엄청난 편지 모음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들은 보존되어 오다가 1914년에 출판되었다. 그 편지들은 그 화가의 삶에 많은 통찰을 주었고, 그가 예민한 마음의 재능 있는 작가라는 것도 보여 주었으며, 무명화가로서의 고단한 삶에 대한 슬픔이 묘사되어 있다. 테오는 빈센트의 삶을 통틀어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1873년에 그의 회사는 그를 런던으로, 다음에는 파리로 발령했다. 그는 점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76년에 구필은 동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는데, 이는 고흐가 가게에서 영업활동을 할 때, 손님들과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언쟁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었다.
보리나주 [ 편집 ]
1878년에 신학교를 그만둔 그는 보리나주로 알려진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 광산에서 설교활동을 하던 고흐는 고용주들의 착취를 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매우 걱정했다. 결국 그는 6개월 후에 해고되었고 보수 없이 일을 계속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80년에, 빈센트는 동생 테오의 제안을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Anton Mauve)[3]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비록 빈센트와 안톤은 곧 예술적인 관점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헤이그 미술 학교의 영향은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그의 붓 자국의 산만함에서 빈센트의 작품에 눈에 띄게 남아 있다. 그러나 어두운 색조를 선호하는 그의 색채 사용에서는 그의 스승과 차이를 두었다.
1881년 이후 [ 편집 ]
1881년에 그는 과부인 사촌 케이 보스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녀는 그를 거부했다. 나중에 그는 매춘부 신 호르닉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이사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생각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관계에 엄격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그의 동생 테오도 그것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다. 무엇보다도 신 호르닉과 고흐는 성격차이가 있었고 결국 그들은 나중에 헤어졌다.
1885년과 1886년 사이의 겨울에 반 고흐는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펀의 미술 학교에 등록했다. 이 일은 실망만 안겨주었는데, 그가 몇 달 후에 외젠 시베르트 교수에 의해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 고흐는 그 기간 동안 일본화를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화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어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몇몇의 초상화도 일본화를 보여주는 배경을 설정해 놓고 그렸다.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소용돌이와 원색의 노란색으로 표현하여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 등의 걸작들을 그렸다.[4]즉, 고흐의 그림 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1888년 12월 23일에 그는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그의 집에 도착한 경찰에 의해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사망 [ 편집 ]
1890년 7월 29일, 고흐는 자살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고흐가 정말 자살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마지막 그림 [ 편집 ]
나무 뿌리, 1890
고흐의 마지막 작품은 〈나무뿌리〉이다. 미완성의 작품으로, 현재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홀랜드 시기 [ 편집 ]
반 고흐는 언급할만한 가치를 지닌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경탄해마지 않았던 옛 화가들의 그림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그 중의 몇 개의 작품들을 모사함으로써 미술에 대한 지식과 재주를 독학으로 익혔다. 그가 홀랜드에서 보낸 1880년-1885년 사이에 17세기에 활동했던 두 명의 네덜란드 화가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주었다.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로부터 그는 다양한 갈색조, 회색조, 흑색조의 색채를, 음영이 뚜렷한 회화 기법을, 눈에 그대로 보이는 거친 붓자국이 있는 진하게 칠한 채색 기법을, 그만큼 더 강렬한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부적인 묘사를 포기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옛 거장들이 그림들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주 경탄해마지 않았고, 반 고흐 자신도 평생 동안 이 원칙을 고수했다.
“ 옛 홀란드 그림들을 다시 볼 때 나를 당혹시키는 것은 그들이 대개의 경우 아주 빠르게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한스, 렘브란트, 루이스달이나 다른 많은 화가들처럼 위대한 거장들이 가능한 한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린 다음에 더 이상 그 그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 반 고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내용적으로 고흐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주제, 즉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를 다루었다. 반 고흐는 ‘홀랜드 시기’에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 그들의 가난한 오두막, 수공업자들을 그렸다. 정물화에서는 특이하게도 감자가 자주 발견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그림에 진실될 것과 분위기, 감정 혹은 생각을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런 요구가 자신이 모범으로 생각하는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충족된 것으로 생각했다.
감자먹는 사람들
이 시기에 제작된 가장 야심차고 유명한 그림은 1885년에 그려진 〈감자먹는 사람들〉이다. 그 그림에서는 소박한 식사를 하는 농부 가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 고흐는 그 그림으로 시골 사람들이 땅과 맺고 있는 상태와 가혹한 삶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는 이 그림에 상당한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빠듯한 생활비에도 불구하고 모델들을 고용했고, 여러 장의 습작을 그렸다. 〈감자먹는 사람들〉이후로 반 고흐는 더 이상 여러 인물들이 배치된 작품을 그리지 않았고, 단 하나의 그림에 그처럼 많은 노력을 쏟아붓지도 않았다.
발전의 시기: 안트베르펜과 파리 시장 [ 편집 ]
안트베르펜에서의 3개월간의 체류 동안, 무엇보다도 1886-1888년에 걸친 파리 체류 기간 동안 반 고흐는 새롭고 다양한 인상들에 노출되었다. 그 자신의 작업에서 실험의 시기가 시작되었으며, 그 실험은 궁극적으로 그의 화법에 중대한 변화로 귀결되었다.
파리에서 그는 그 당시에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인상주의와 대면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그는 인상주의를 이름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양식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반 고흐는 인상주의의 여러 요소를 자신의 회화에 받아들였다. 그는 좀 더 밝고 순수한 색채를 사용했고, 가는 선으로 그은 듯한, 점 모양의 특징을 지닌 붓 놀림으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화면을 보색 관계를 이루는 색채로 구성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만남으로써 좀 더 대담해진 색채 사용으로의 방향 전환이 강화되었다. 주제상으로 보자면 그는 파리적 소재에 관심을 기울였다. 파리 주변의 시골에서도 그는 자주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봄날의 낚시〉,〈클리시 다리〉,〈아스니에르의 다리 모습〉,〈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소밭〉등이다.
몽마르트 언덕의 채소밭, 1887년
하지만 그의 예술적 발전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일본 판화와의 만남이었다. 1853년 일본은 국경을 개방했으며,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점점 더 판화를 찍은 종이가 유럽으로 전해졌다. 많은 미술가들이 전혀 새로운 미술에 열광을 했고, 반 고흐도 매혹되었다. 그는 일본 채색 판화를 모으기 시작했고, 몇 개의 소재를 유화 작품으로 옮겨 제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본의 미술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들의 형상 원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실제적으로 그 이후부터 제작된 그의 그림에는 이런 저런 ‘일본적’ 형상 원칙이 나타났다. 몸 때문에 생긴 그림자의 부재, 가는 선으로 테두리가 둘러쳐진 ‘얕게’ 채색된 화면, 이례적인 원근법, 풍경 속에서 아주 작게 묘사된 인물들이 그런 원칙들이었다.
예술가의 방
〈예술가의 방〉이라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반 고흐는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 그림자가 제거되었고, 색채는 일본 목판화에서처럼 얕고 단순하게 칠해졌어. ”
1888년에 제작된 꽃이 만개한 과일나무 연작의 경우처럼 소재의 선택에서도 부분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아를에서 반 고흐는 파리 시절에 이론적으로 발전시켰지만 지금까지는 일관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본질적으로 유지했던 이 화법은 우리가 오늘날 반 고흐에게서 ‘전형적’ 이라고 느끼는 화법이다.
고흐는 남부 프랑스의 눈부신 색채에 대한 희망을 품고서 아를로 이주를 했다. 그는 편지에서 이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사람들은 그곳에서 붉은색과 초록색, 푸른색과 오렌지색, 짙은 노랑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야. ”
실제로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전체적인 효과에서 상호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보색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나란히 사용했던 순수하고, 강력한 색채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그는 ‘지방색’, 다시 말하자면 대상의 자연적인 색을 넘어섰다. 종종 그는 색채를 과장하거나 그가 각각의 그림을 위해서 발전시킨 색채 체계에 적합하도록 사용했다. 반 고흐의 그림에서는 초록색 하늘, 분홍색 구름, 짙은 청색의 길이 있다.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 적고 있다.
“ 나는 색채의 위치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자연으로부터 일련의 순서와 정확성을 받아들였어. 나는 무의미한 짓을 하지 않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하지. 내가 사용한 색이 내 그림에서 훌륭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이 사물의 색과 동일한 색인지하는 문제는 더 이상 내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
눈부신 색과 강렬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그림은 결코 야하거나 벽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머지 색을 약화시키거나 결합시키는 중간 색조를 사용함으로써 조화로운 전체 효과를 만들어낸다.
밤의 카페 풍경
그 이외에도 색채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상징적 기능도 지니고 있다. 〈밤의 카페 풍경〉(1888년)처럼 색채는 분위기를 표현해야만 한다고 한다.
“ 나는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무시무시한 인간의 정열을 표현하려고 했어. 공간은 푸르고 붉으며 생기없는 노란색이지. 가운데에 초록색 당구대가 놓여 있고, 오렌지색과 초록색의 둥근 불빛을 만들어내는 레몬처럼 노란 4개의 램프가 있지. ”
고흐는 재빠르게, 즉흥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커다랗게 수정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렸다. 신속하게 그리는 그의 화법은 한 편으로는 그의 창작욕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그것을 표현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더 많은 생기와, 강렬함과 직접성을 부여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좀 더 커다란 전체 효과를 위해서 소재를 단순화했다. 비록 그가 재빠르게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그리거나 도취해서 그리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머릿속으로 그려보거나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서 준비를 했다.
거의 언제나 그는 소재를 눈 앞에 두고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기억이나 생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눈으로 본 것을 종종 심하게 변행을 시키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였고,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고흐는 물감을 희석하지 않은 채 걸죽하게 칠했으며, 가끔씩 물감을 튜브에서 짜서 직접 화폭에 바르기도 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인해서 그의 붓자국이 입체적으로 보였고, 고흐 특유의 붓놀림을 통요시키는 것에 아주 적합했다. 매끄럽고, 윤곽선이 둘러쳐진 일본풍의 채색면 이외에도 반 고흐는 이미 파리 시절에 색을 짧은 선 모양으로 나란히 칠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형상화하기 위해서 그는 생 레미 시절에는 이런 선을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물결 모양, 원 모양, 나선형 모양으로 배열하기 시작했다. 1889년에 제작된 자화상이나 1889년에 그려진 〈별이 빛나는 밤〉이 그것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반 고흐는 각각의 화법을 소재와 연관지어서 선택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고흐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재가 지닌 본질과 특성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외젠느 보쉬(Eugène Boch)의 초상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나는 이 그림에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는 경탄을, 사랑을 담고 싶었어. 머릿속으로 나는 무한한 것을 그렸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성취했던 것 중에서 가장 진한과 인상적인 파랑색으로 간단하게 배경을 그렸어. 그리고 이 간단한 구성을 통해서 빛나는 짙은 파란색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금발의 머리는 짙푸른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수수께끼와 같은 것을 지니게 되었어. ”
후기에 제작된 오베르의 풍경화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흐린 하늘 아래 한 없이 넓은 밭이 있고, 나는 슬픔과 극단적인 고독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지. ”
화가는 형식과 색채를 변화시킴으로써 바라던 표현의 강렬함을 달성할 수 있었다. 형식의 경우에 고흐는 단순화를 향해 움직여 간 반면에 색채는 점점 강화시켰다.
그 밖에도 고흐는 다양한 상징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했다. 많은 그림에서 그는 언어를 통해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전래된 상징 이외에 그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상징 언어를 사용했다. 그 상징 언어의 의미는 그의 생애, 사고와 감정 세계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스케치 판, 파이프, 양파, 봉랍이 있는 정물화에서 그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물건들을 배열했다. 건강 지침서와 그 책에서 불면증에 대해서 좋다고 권해준 양파, 그가 좋아하던 파이프와 담배통, 테오가 보낸 편지 한 통과 친구와의 밀접한 결합을 상징하는 봉랍, 삶의 불꽃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불타고 있는 촛대, 금주의 상징인 빈 포도주 병등이 그와 같은 대상들이었다.
〈달이 빛나는 밤의 산책〉(1890년)에서는 달이 솟아오를 때 올리브 정원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풍경을 산책하는 한 쌍의 사람이 보인다. 남자 인물은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화가 자신의 모습과 같은 특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그림은 여인과 함께 하는 ‘진실한’ 삶과 그것의 대용인 자연과 자연을 표현하는 예술에 대한 반 고흐의 소원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다.
반 고흐와 스케치 [ 편집 ]
반 고흐의 유화에 쏠린 주의력 때문에 그가 훌륭하고 아주 생산적인 소묘 화가라는 사실이 쉽게 잊혀졌다. 소묘 작품은 미술가의 이력의 초기에서부터 존재했고,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제작되었다. 1888년 여름 몇 주 동안 고흐는 값비싼 유화 물감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전적으로 소묘만을 그렸다.
고흐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소묘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만 한다고 확신을 했다. 1880년, 선생이 없었기 때문에 교본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형상 묘사의 법칙을 소묘를 통해서 습득하기 시작했다. 홀란드 시대에 그는 무엇보다 평범한 농부와 풍경, 그 중에서도 그가 잠시 머물렀던 장소인 헤이그의 풍경을 표현했다. 그는 연필, 펜, 부분적으로는 백묵이나 흑연을 사용해서 대규모로 소묘 작품을 그렸다. 안톤 마우베가 1881년 말 고흐에게 수채화 기법을 알려준 이후로 그는 불투명한 그림 물감으로 채색한 그림을 완성했다. 파리 시절에는 유화에 비해서 소묘가 뒷전으로 물러났다. 1887년 이후부터 반 고흐는 다시 소묘를 점점 많이 그리게 되었다. 그 중에서 파리의 풍경을 채색한 소묘화도 있다.
그는 아를에서 자란 갈대를 재료로 삼아서 직접 만든 펜을 도구로서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표현 기술을 개발했다. 연필로 미리 그린 밑그림 위에 갈대펜을 사용해서 아주 다양한 선, 점, 곡선, 나선으로 소재가 표현되었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소묘 중에서 많은 작품이 유화와 연관되어 있다. 소묘는 유화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거나, 아니면 고흐가 나중에 그려진 그림의 소재를 소묘로 다시 완성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소묘 작품은 삼자에게 그림에 대한 인상을 주거나 회화로 그려진 작품에서 그가 본 특정한 실수를 교정하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관련서적 [ 편집 ]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이택광, 2014년 1월 아트북스)
《빈센트의 구두》(박정자, 2005년 6월 기파랑)
《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민길호 지음, 학고재)
가십 [ 편집 ]
그는 자신의 작품성에 대해 스스로 불만을 표현하여 스스로의 귀를 잘라버렸다. 먼 훗날 1996년에 스페인에서는 이 사건의 명칭을 딴 가수 라 오레하데 반 고흐가 결성되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대표 작품과 화보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천재 화가 고흐를 색다르게 만나볼 수 있는 전시 TOP 3
2020년 1월 5일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히는 레 보 드 프로방스(Les Baux de Provence)의 아트센터 카리에르 드 뤼미에르(Carrières de Lumières)에서 구름과 태양이 담긴 풍경화, 자화상 등 위대한 화가 반 고흐가 남긴 걸작들을 만나볼 수 있는 반 고흐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아를의 침실> 등, 프로방스의 따뜻하고도 다채로운 색깔에 매료되었던 반 고흐가 남긴 걸작들을 보며 그의 삶을 되짚어 볼 수 있다.
레 보 드 프로방스, ‘빛의 채석장’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展 자세히 알아보기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빛의 채석장 (카리에르 드 뤼미에르Carrières de Lumières)는 2012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옛 채석장을 개조한 멀티미디어 문화공간이다. 파리의 빛의 아틀리에(Atelier des Lumières)는 빛의 채석장을 본 따 만들어졌으며, 2018년에는 대한민국 제주도에도 이 컨셉과 기술을 도입한 “빛의 벙커”가 개장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을 향기로 표현하다
[전시 리뷰]‘고흐, 향기를 만나다’ 전시회 4월 3일까지 서구문화회관에서 열려
대표작 8점 작품 별로 향기 조향… 향으로 느끼는 고흐의 삶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차가운 숲의 향이 난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의 레플리카 작품 전시회가 3월 4일부터 4월 3일까지 서구문화회관 아트갤러리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보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작품이 더욱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프루스트 효과’를 이용한 체험형 전시로 기획됐다.
프루스트 효과란 후각(향기)을 통한 자극으로 기억을 재생해내는 현상이다. 후각을 이용하면 더욱 강렬하고 인상 깊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작품은 고흐의 생애와 연관 지어 진열했다. 우중충한 색감의 초창기 작품부터 자살하기 전 마지막 작품까지 순서대로 감상 할 수 있다.
고흐의 삶과 작품에 대한 설명은 감상의 깊이를 더해준다. 설명 아래에는 동생 테오와 고갱 등 주변 인물과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어 관람객의 흥미를 돋운다.
고흐가 그림을 그릴 떄 사용한 색을 향으로 표현했다.
전시장 입구부터 향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고흐가 실제 그림 그릴 때 사용했던 색과 매치된향이 진열됐다. 마스크를 낀 상태로 직접 향을 맡을 수 있다.
로즈, 자몽, 바닐라, 화이트 머스크, 피오니, 라일락, 마린, 카시스, 샌들우드 향이다.
옆에는 고흐가 27세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사진, 작품과 함께 설명돼 있다.
고흐는 1886년 파리로 떠나 코르몽의 스튜디오에 합류해 젊은 예술가들과 교류한다. 인상주의를 접하며 빠른 속도로 화풍과 색채를 흡수해 우중충했던 고흐의 색채가 1년 만에 화려하게 피어난다.
시향지와 ‘해바라기’
고흐의 단짝이었던 고갱과의 일화와 이와 관련된 대표작 ‘해바라기’도 전시됐다. 고갱이 아를로 와서 고흐와 함께 지내기로 결정하자 고흐는 환영과 우정의 의미로 ‘해바라기’ 연작을 완성한다.
‘해바라기’는 고흐의 설렘을 닮은 향으로 마치 갓 꺾어온 해바라기처럼 푸릇하고 달콤했다.
고갱과 고흐의 인연은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둘은 예술에 대한 시각과 성격이 매우 달랐고 많은 싸움이 발생했다. 결국 고갱은 1889년 12월 말다툼 끝에 고흐를 떠났다. 절망에 빠진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를 절단한다.
‘별이 빛나는 밤’
고흐는 이후 정신 요양원에 스스로 입원해 1년 동안 약 150점의 작품을 완성했으며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도 이때 탄생했다.
‘별이 빛나는 밤’은 단순히 실제 창문 밖 풍경을 옮겨낸 것이 아니라 상상과 결합한 풍경화다. 당시 고흐의 심리 상태처럼 그림 속 밤하늘은 소용돌이치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의 향을 맡자 홀로 우두커니 숲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차가운 밤을 연상시키는 향이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별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를 꿈꾸게 한다”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듯이,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고 고흐는 표현했다. 그만큼 밤하늘은 고흐에게 무한함과 애정의 대상이었다.
3D 프린팅으로 재현한 ‘아이리스’
만져보는 작품도 준비돼 있다. 캐나다 국립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작품을 대여해 3D 프린팅으로 재현한 것이다. 마련된 손소독제를 손에 바른 후 작품 ‘아이리스’를 직접 만져보며 고흐의 붓터치를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조향사들이 고흐의 작품과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조향한 향수가 사용됐다. 고흐의 대표작 ‘밤의 카페테라스’, ‘반 고흐의 침실’, ‘해바라기’, ‘아이리스’, ‘별이 빛나는 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도비니의 정원’, ‘까마귀가 있는 밀밭’ 등 8점의 전시작품 옆 선반에는 시향지가 놓여있다.
톱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 등 향에 대한 설명이 함께 있어 이해를 돕는다. 관람객은 각 작품의 특색을 살린 향을 맡으며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네이버 예약, 엔티켓을 통해 무료로 예약 가능하다. 1일 8회 회차당 50명씩 입장할 수 있다.
주말에는 ‘나만의 고흐 섬유향수 만들기’ 체험도 진행되지만, 현재 전 회차 매진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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