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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전래의 시대적 배경4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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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4 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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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4 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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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NEWS 자료실 – [순교]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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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4대박해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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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4대 박해 | 천주교 산호세 한국 순교자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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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4대 박해

조선시대 4대 박해 | 천주교 산호세 한국 순교자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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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4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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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4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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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4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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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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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박해(한국천주교 4대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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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박해(한국천주교 4대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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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순교자성월 특집]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 박해시대에 수난받는 신자들을 표현한 서소문 순교자기념탑 부조.

다가오는 2009년 한국 천주교회는 103위 순교자 시성 25주년을 맞는다.

그보다 한 해 앞선 2008년 순교자성월을 맞아 한국 천주교 4대 박해를 종합하고 당시 박해의 특징과 주요 순교자 등을 소개한다.

신유박해

1801년 1월 10일. 신유박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돼 12월 22일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박해는 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 4월 순교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됐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황사영은 체포돼 10월 참수됐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됐다. 황사영이 전한 바에 따르면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300여 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1839년 3월~10월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時)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僻)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월,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병오박해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병인박해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돼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다. 일반적으로 1866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됐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이 시기에 순교한 신자 수는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대략 1만명 내외로 추산된다.

[가톨릭신문, 2008년 9월 7일, 오혜민 기자]

천주교 4대박해

1. 신유박해(1801년)

사실상 정조 사후에 정조 개혁 추진 세력을 조정에서 모두 몰아내고, 대왕대비이던 정순왕후 세력으로 재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터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 박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는 서막이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 없이 유학자들이 실학으로서 서양학문을 연구하던 중 , “천주학”을 연구하게 되고, 이 “천주학”이 참 진리라고 생각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2. 기해박해(1839년)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金?根)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으로부터 그 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이어 사헌부집의 정기화(鄭琦和)도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南明赫)·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정하상(丁夏祥)·유진길·조신철(趙信喆) 등 중요인물이 붙잡혔으며, 당시 주교 앵베르는 교인이 고초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방과 샤스탕에게도 자현(自現)할 것을 권고한 쪽지를 보내고 자현함으로써, 조선 교회 재건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대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하였다. 조정에서는 6월에는 이광열(李光烈)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형에 처하였다. 이때 피해를 입은 교도수는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하여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한 자 1명, 사형된 자가 118명 등이었다.

그러나 현석문(玄錫文)이 쓴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자가 54명이고,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3. 병오박해(1846년)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에 모두 시성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대체로 평온하였으나 기해 ‘척사윤음(斥邪綸音)’이라는 박해의 근거는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주교의 지시로 외국의 선교사가 입국하기 쉬운 새로운 해로를 개척에 나서야만 했다. 그는 이 지시에 따라 서해안 등을 항해하다가 6월 5일에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에서 선주 임성룡, 사공 엄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김대건 신부와 관계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형벌을 받고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Cecille)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충청도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기해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 3명의 학살에 대한 항의문을 조정에 전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세실의 조선 원정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어 효수 경중(梟首警衆)의 판결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고 그로부터 3일 후에는 현석문도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한편 포도청에 남아 있던 임치백과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은 매를 맞고 죽어 순교하였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해온 신자들의 대응이 재빨랐고 조정에서도 새로운 척사령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레올 신부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후 다시 교우촌을 순방할 수 있었다. 순교자들의 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어 1846년 11월자의 서한 〈병오일기〉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4. 병인박해(1866년)

천주교 산호세 한국 순교자 성당

글쓴이: daniel.choi, 최초작성일: September 28th, 2008, 최종수정일: September 28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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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4대 박해 – 가톨릭대사전에서

성모자와 한국 성인들 –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요셉)

1. 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윤지충 사건

1791년(辛亥, 正祖 15년)에 있었던 박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12월 8일(음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박해는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또 이미 들여온 홍문관(홍문과)의 서학서도 불 태워지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2. 신유박해.莘酉迫害.1801년

1801년(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 1800년(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順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왕대비는 원래가 노론벽파(老論僻派)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권하게 되자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천주교회 는 그 후에도 전국적인 규모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3. 기해박해. 1839년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39년(헌종 5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1839년이 기해년이었기에,이 때의 박해를 흔히 기해박해라 한다.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에 들어와 활약하던 앵배르(Imbert)주교와 모방(Maubant)신부 샤스탕(Chastan) 신부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와 더불어 모두 114명 이상의 신자가 순교를 하였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앵배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도 곧 체포될 것을 예감하고 그는 정하상과 현석문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을 부탁받았던 정하상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현석문은 숨어 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기해일기’란 책을 완성하였다.

이 ‘기해일기’는 한동안 실전되었다가, 1904년경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뮤텔(Mutel)주교에 의해 한글본이 발견되어 이듬해인 1905년에 그대로 출판되었다.

이 ‘기해일기’에 의하면 당시에 순교한 사람이 모두 114명이 넘었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해일기’는 그 사료적인 정확성이 입증되어 여기에 기록된 78명 가운데 69명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올랐으며, 이들은 1984년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4. 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1873년

조선조 말기인 1866년(高宗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박해를 말한다. 피로 얼룩진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도 병인박해는 그 규모와 가혹함과 희생자의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였다.

이 박해의 주요 원인은 유교사상에 젖은 보수지배충의 서학(西學)에 대한 사갈시(蛇蝎視),

즉 천주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증오심에서 발작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척사(斥邪)를 요구한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아비와 임금도 안중에 없으며 죽음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는 족속으로,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유인한다”고 하여, 동양윤리의 이단자요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았다.

위정자들은 또 신유년(辛酉年, 1801년)의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飼永帛書) 사건을, 한 교인의 생각이 아니고 프랑스의 군사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천주교의 신조인 것처럼 몰아세워 보수적인 배외사상(排外思想)을 부추기는데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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