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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가 좋다 220회 소아시아 7대 교회 두아디라 – 이강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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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 – 세상과 타협한 교회 (계 2:18–29) – 수요예배 설교 | 동탄영락교회 –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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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 - 세상과 타협한 교회 (계 2:18–29) - 수요예배 설교 | 동탄영락교회 -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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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제8강 /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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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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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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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 목사 설교] 두아디라 교회에게 : 목회/신학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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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디 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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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디 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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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일곱교회 4] 두아디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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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 – 세상과 타협한 교회 (계 2:18–29) – 수요예배 설교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제가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 있을 때에, 말기 암으로 힘겨워하는 자매를 심방했었는데 그 자매는 처음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하고 믿음으로 이기겠다고 담대한 모습을 보여 많은 분들이 감동했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를 믿고 항암치료를 여덟 차례나 받았음에도 암세포는 더 많이 전이 되고 먹는 것 마다 다 토해내고 체중이 28kg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믿음도, 소망도… 지치고 상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자매에게 “소원이 뭐나”고 물었더니, “밥을 먹는 거”라고 했습니다.

병간호중인 어머니 권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를 치료하면서 순간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자신이 잘못 선택한 것이 많다고…

그래서 지금처럼 더 악화되었다고 가슴아파했습니다.

조금만 암에 대하여 더 알았다면…

누가 조금만 더 충고를 해 주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실수를 거듭합니다.

후회하고 절망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였지만 순간순간 다가오는 위기들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해 상하고 망가진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위로하시고 또 한편으로 충고하시고,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우신 말씀이 바로 지금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씀들을 잘 듣고 새긴다면 가슴치며 후회할 실수를 그만큼 더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두아디라는 환란과 핍박 가운데 있던 앞의 세 도시와는 달리 평화롭고 물적 재원이나 인적 재원이 풍족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직조와 염색, 그리고 금속세공술이 발달해 전문 직종별 조합인 길드가 형성되었으며, 상인들도 많았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이처럼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도시에 있었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는 사업도 그 규모가 굉장했습니다.

1. 먼저, 19절 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믿음과 섬김과 인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섬김과 인내를 만들어 내는 수준 높은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실한 신앙으로 선한 삶이라는 열매 맺는 교회 본연의 소명을 아주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신앙의 이면에는 겉과 속이 조금 다른, 치명적인 암과 같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암 덩어리는 너무 커져서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18절에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눈이 불꽃같다고 하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발이 빛난 주석 같다고 하는 것은 다스리고 심판하는 권세를 의미합니다.

두아디라교회에는 하나님을 섬긴다하면서도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대적하는 이단이 몰래 들어왔는데, 두아디라성도들은 그만 그들에게 완전히 걸려 들어서 스스로 자정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교회는 서서히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바로 잡으시기 위해 불꽃같은 눈과 빛난 주석 같은 발을 가지시고 등장하셨습니다.

2.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그 이단은 누구라고 말씀합니까?

20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그 이단은 바로 ‘자칭 선지자 이세벨’ 입니다.

여기서 ‘자칭 선지자’란 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거짓 선지자’를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거짓으로 자기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는 자입니다.

이런 거짓선지자들은 교회역사상 수없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진정한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때리기까지 합니다.

이 같은 거짓 선지자가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을 꾀어 음행을 하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는 분명히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 봉사하는 타교회의 모범이 되고 자랑이 될 만한 교회였지만, 그들은 영적 긴장감을 늦춤으로 교리적으로 잘못된 거짓 선지자까지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했하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교회는 진리의 말씀과 날카로운 영적 통찰력으로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거짓된 것을 드러냈지만 그 과정가운데 사랑을 잃어버렸고,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을 지켰지만 그러나 거짓 가르침까지 용납함으로써 그 속 깊은 곳은 타락의 늪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주의 말씀으로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 말씀하시지만, ‘사랑이냐 정의냐’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그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 교리만 붙들면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너무 사랑과 섬김에만 힘쓰면 진리를 잃어버리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의 이 일곱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 그러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세벨은 사도요한이 계시를 받을 당시 실존 했던 인물은 아닙니다.

이세벨은 열왕기상에 나오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그녀는 북이스라엘 아합왕과 결혼 했는데, 그녀는 시집올 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 대신 섬기게 했었습니다(왕상16:31~).

이 이세벨을 거짓 선지자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아디라 교회에서 이 이세벨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역들의 동력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교회에서 선한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시끄럽고 분쟁이 일어나고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는 그 사역들에 이세벨이 끼어들어 그 사역들이 서서히 왜곡되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명예나 자존심이 드러나게 하고 그 사역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신앙과는 전혀 다른 음란과 불의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실예로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표를 의식해서 사찰에 가서 합장하고 예불을 올리는 것이 다 우상숭배입니다.

또, 사업 목적상 접대한다는 명목으로 룸살롱 같은 곳에 가서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도 음행입니다.

사실 이러한 은밀한 유혹과 자기 합리화를 통한 공격이 고난과 박해보다 더 위험한 사탄의 공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나 박해는 사탄의 공격인 것이 뚜렷이 인식되어 대처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은밀한 유혹이나 자기 합리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도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는 이 일에 실패하였기에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그로 인해 말씀이 왜곡되고, 변질되고, 타락하여 이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종말에 등장할 이세벨, 곧 적그리스도는 누구일까요?

이 적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은 한 때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가톨릭 교황이 적그리스도다.

세계 경제권을 쥐고 있는 자가 적그리스도다.

미국대통령 오바마가 적그리스도라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순복음교회의 000목사는 유럽연합 대통령이 적그리스도라 말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세벨의 거짓복음은 종말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거짓복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묘하게 성도들을 꾀어서 복음을 왜곡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게 하고, 물질과 쾌락의 축복을 주는 적그리스도를 마치 하나님인양 경배하게 함으로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계13:16,17).

이것을 오늘 본문은 24절에서 “사탄의 깊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대표적인 이단은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 영지주의는 초대교회 당시 엄청나게 유행했었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지식‘, 헬라어로 그노시스라고 하는데, 그들은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해서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성경을 버리고 신약성경 중에서도 몇몇 권만을 선택하여 자신들만의 성경을 만들어 독특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사탄의 깊은 것’이었습니다.

인성을 부인한다는 것은 고난 없는 십자가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 만연하던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 그리고 이세벨의 교훈 등은 모두 이 같은 영지주의의 잘못된 교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탄의 깊은 것에 빠져 있었던 것이며, 사도요한은 그러한 이단의 가르침의 정곡을 찌르며 그 거짓 가르침을 ‘사탄의 깊은 것’ 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란 이세벨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소수의 두아디라 성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을 ‘남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이 남은 자들을 핍박하지만 교회는 결국 이 남은 자들에 의해 유지되고 전승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오늘 종말에 있을 일곱 교회 중 이제 네 교회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리므로 책망을 들었고, 서머나교회는 환란과 가난 중에서도 영적 부요함으로 책망 없이 칭찬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버가모교회는 처음의 순교적인 신앙을 잃어버리고 발람의 교훈으로 살아가는 세속적 타락에 대하여 책망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두아디라교회는 힘써 복음을 전하는 것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지만,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음으로써 책망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교회가 되려면 어떤 교회,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는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말씀을 붙든 남은 자가 있었고,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철장을 가지고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그들을 심판하는 권세”로 이것은 예수님의 절대주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시면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사탄은 더 이상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두아디라교회에 등장한 자칭 선지자 이세벨은 앞으로 우리들의 교회에도 등장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활동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적그리스도와 더불어 음행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으므로 짐승의 표를 받아도 안 됩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 사랑을 찾은 에베소 교회가 되고 환난을 이기는 서머나 교회가 되어 종말에 예수님께 칭찬받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두아디라 교회의 교훈을 통해서 교회를 부패하게 하는 악한 궤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행위를 아셨고, 서머나 교회의 환난을 아셨고, 버가모 교회의 처한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신주님, 우리 교회의 모든 형편과 처지도 다 알고 계신 줄 믿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교훈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있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이세벨은 무엇입니까? 주님, 귀 있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게 하셔서 이기는 자가 되어 예수님이 구원하심과 영원한 천국소망을 소유하는 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가 악한 이단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주의 구원의 역사위에 인도하는 아름다운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도록 주의 권능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요한계시록 일곱교회] 4. 두아디라교회(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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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일곱교회] 4. 두아디라교회(2:18-29)

[본문]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설교]

-서론: 두아디라는 어떤 곳인가?

두아디라는 지금의 터키 아히사르 북쪽에 위치한 버가모와 사데 사이 65km 정도 내륙에 위치합니다. 두아디라는 태양신 두림누스(Thyrimnus)의 성지로 설립되어 펠로피아(Pelopia)로 명명되었습니다. 기원전 301-281년, 셀류쿠스 니카토로(Seleucus Nucator)에 의해 국경 요새로 재건되기에 이릅니다. 이후 기원전 190년 버가모에 종속되고, 주전 133년에는 로마에 의해 지배 당하게 됩니다. 기원후 2세기 초반까지 버가모의 한 구역에 속해있다 카라칼라 시대부터 독립적인 지역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아마도 도시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아 주변에 큰 도시였던 버가모에 종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잦은 전쟁으로 인해 두아디라는 정치적인 불안정과 군사적 분주함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두아디라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유럽에서 최초로 기독교인이 된 루디아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두아디라는 고대로부터 염색이 발달되어 있었고, 염색공 동업 조합이 만들어질 정도로 염색에 관련된 상업과 직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옷감 상인과 제빵공, 제혁공, 도공, 양털 상인, 노예 상인, 제화공, 염색공, 구리 세공인들은 조합을 만들어 자신들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조합들은 이방종교와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조합에 의해 적지 않은 압박을 받았습니다. ‘길드(조합)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축제는 우상숭배를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신용과 사업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에서 주로 숭배한 신은 태양신이며 제우스의 레토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아폴로(Απόλλων)입니다. 레토는 아폴론 외에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더 출생합니다. 아르테미스는 성경에서 에베소 도시가 주로 섬겼던 아데미 여신을 말합니다. 아폴론은 태양과 예언, 광명, 의술, 궁술, 음악, 시 등을 주관하는 신입니다. 헬라신화에서는 아폴론으로 로마시대에서 아폴로로 불립니다. 아폴론은 올림푸스 12신의 두 번째 신이며, 월계수와 리라, 활과 화살, 백조, 돌고래 등이 상징물입니다. 아폴론을 신탁(예언)과 음악, 그리고 활을 쏘는 능력을 가진 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젊고 미남형의 모습은 뭇 여성들의 사랑을 온 몸에 받았습니다.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은 로마의 황제들은 종종 아폴론과 동등한 인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두아디라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주님은 두아디라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계실까요?

두아디라교회에 소개되는 예수님

예수님은 두아디라교회에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니의 아들’(18절)로 소개합니다.

계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헬라어 어순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로 시작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곳은 굉장히 드뭅니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미 불렀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지만 신학적 특징을 잘 드러내는 몇 곳만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마태복음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8: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태복음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태복음 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마태복음 27: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태복음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행전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하나님께 낳은 입은 아들

사도행전 13: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히브리서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베드로후서 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고린도후서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요한계시록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의 뜻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이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확장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왜 두아디라 교회에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할까요? 그것은 두아디라교회가 자리한 두아디라 지역이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며, 아폴론과 같은 신의 아들임을 자처한 황제 숭배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황제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로마 황제들은 특징적으로 공적 서신과 칙령들의 서문의 직함에서 신성시된 그들의 선임자들의 아들이나 양자라는 특별한 의미에서 자신들이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에베소에 보내는 한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신 줄리어스의 아들, 황제 카에사르”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이 눈은 불꽃같고, 발은 빛난 주석과 같습니다. 불꽃같은 눈은 1:14에서 주석과 같은 발은 1:15에서 표현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태양신 아폴론에게 주목해 봅시다. 이 세상에 빛을 주는 신이 아폴론이라고 믿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자신의 눈이 ‘불꽃’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9:6에 의하면 불꽃 같은 눈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표현한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주석 같은 발은 다니엘 10:6에서 가져왔습니다. 다니엘이 힛데겔 강가에서 보았던 환상 속의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의 일부입니다.

[단]10:6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이곳에도 햇불 같은 눈과 놋과 같은 팔과 발이 등장합니다. 발이 놋과 주석으로 되어 있다는 말은 강력한 힘을 가진 파괴적 존재를 말합니다. 그 어떤 존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심판자를 뜻합니다. 시편 2편에서 소개되는 하나님의 아들과 연관 시킬 때 그 뜻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모든 열방을 통치하고 심판하시는 심판주를 뜻합니다.

찌르는 눈과 짓밟는 발을 가진 그리스도는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처럼 교회에 다가오신다.(1:16) 이것은 두아디라에 유명한 신전을 둔 이방의 태양신 아폴로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하다. 그분의 영광은 교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며,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23절, 시 19:6). 그분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고난과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소개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죄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입니다.

[칭찬]

심판주로 나타났다고 해서 두아디라교회가 모든 부분에서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 주님은 그들을 칭찬하십니다.

[계]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다섯 가지를 언급합니다.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입니다. 이것들이 처음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업’은 복수형으로 ‘행위’를 뜻하며, 이후에 소개된 네 가지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책망]

주님은 두아디라교회에 칭찬을 하지만 매우 짧게 한 다음 곧바로 책망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성경 속에서 이세벨은 바알을 섬기는 아합의 아내였습니다 그 여 사제의 실제 이름인지 은유적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정황상 이세벨은 구약의 이세벨과 닮아 있습니다. 먼저 그 여인은 자칭 선지자였고, 주님의 종들을 꾀어 행음하게 했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20절의 이야기는 발락에게 가르친 발람의 속임수와 닮아 있습니다.(버가모교회, 2;14) 20절에서 사용된 ‘꾀어’라는 동사는 요한계시록 안에서 사탄의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12:9, 20:3, 8, 10) 또한 거짓 선지자들과 바벨론으로 형상화된 인물이 온 세상을 미혹하고 우상을 숭배하게하고 음행하도록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세벨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종인 이세벨이 ‘예수님의 종들’을 미혹해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음행하게 한 것에 대해 화가 나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세벨이 기묘하게 조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마도 두아디라가 섬기는 아폴론의 신탁과 연관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신탁은 신들에게 제사함으로 우상숭배로 이끌었고, 우상숭배는 곧 음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가 어떻게 우상을 숭배하고, 음행에 빠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시 ‘꾀어’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세벨의 유혹이 교묘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그렇게 쉽게 넘어가겠습니다. 아마도 이세벨은 우상숭배를 문화의 한 부분, 또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경제적인 생존의 문제로 유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것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주님은 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이세벨의 가르침이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로인해 주님께서 주신 회개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할 기회’(21절)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왜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그들이 회개를 미룬 이유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것에 대한 생각과 행위에 관성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악한 생각과 악한 행위가 몸에 배이면 그것을 떨쳐 내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것이 나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지만 고치지 못합니다. 24절에 의하면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깊은 곳을 통달한다’고 표현합니다.(고전 2:10) 이것은 성령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과 작정, 그리고 생각을 말합니다. 그런데 두아디라교회는 사단이 의도하고 획책(劃策)하는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징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엄히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침상에 던질 것이고, 큰 환난 가운데 던질 것입니다.(22절), 또한 그의 자녀를 죽이겠다고 경고합니다.(23절) 은밀하게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약속]

만약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이들에게 약속하십니다.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은 시편 2편 9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원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적용하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권능과 통치를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교회의 신자들에게 허락하고 계십니다.

또한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새벽별은 로마 시대에 통치자와 권세자를 뜻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 22:16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새벽별이라고 소개합니다.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만약 두아디아교회에 주신 약속이 계시록 22:16에 등장하는 새벽별이라면 신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같은 권세와 통치를 허락하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대속사역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일곱교회]

두아디라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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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 목사 설교] 두아디라 교회에게

날짜: 2011년 11월 13일

본문: 요한계시록 2: 18~29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두아디라 교회에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계시록 2: 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

18. . .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약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만 한다면 사람들은 못할 짓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이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크리스천이 많아져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까요?

종종 사람들이 ‘믿음’의 문제와 ‘행위’의 문제를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좋은데 영 윤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크기만큼 우리들의 삶의 태도가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쉽게 말을 바꾸고, 그런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좋은 게 좋다!” “상황이 달라졌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태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의 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꽃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7개의 교회 중에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이 가장 따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질책이 무섭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지켰던 행위들이 그럴 듯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 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꽃같은”이라는 표현은 23절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 . .every church will know that appearance don’t impress me. I x-ray every motive and make sure you get what’s coming to you.”

무서운 심판의 말씀인데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겉모습으로 예수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x-ray를 통해 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은 우리의 은밀한 죄, 부끄러운 죄, 부지중에 지은 죄, 의도적인 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무서운 말씀이 주님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furnace-fired bronze or burnished bronze”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발로 여기저기를 밟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버가모 교회에서 칼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불같은 발로 진멸하시는 무서운 심판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와 동일한 칭찬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편지에도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 말씀인데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무엇을 알 수 있나요?

이곳 두아디라 교회에 상당히 실천적 사랑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굳건한 믿음과 소망과 인내를 가졌다는 것이지요.

첫째는, “내가 네 사업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교회에는 하나님의 사업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전도하고 봉사하고 교육하고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사랑’도 있었습니다. 성도들끼리, 어쩌면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도 관용하고 사랑하는 그런 교회였을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상황이 결코 평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와 미신이 성행하는 이런 도시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겠지요.

넷째, ‘섬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섯째, ‘인내’를 칭찬하셨습니다.

두아디라에 대한 칭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섯째,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바로 에베소 교회가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무섭게 질책하셨던 것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점점 더 나아졌다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칭찬의 정도가 거의 완벽하지 않습니까? 두아디라 교회는 첫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와 분명히 달랐습니다. 또 두아디라 교회는 순교의 위기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켰지만, 나중에는 유혹을 당하여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 버가모 교회와 분명히 달랐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끝이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가면 갈수록 처음보다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가면 갈수록 처음보다 더 잘한 교회였습니다.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몰아치는 형편에서도, 우상숭배와 미신이 성행하는 도시에 살면서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님을 더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사역에 열심을 다 하느라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우리 신앙의 문제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 희생과 인내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지요.

2011년 3월 5일 조선일보에 재미있는 “인지 심리학 실험”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책에 보면 실험을 하나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실험 동영상 있음)

‘보이지 않는 고릴라’ 책에 쓰인 내용은 과연 한국에서도 그대로 통할까.

조선일보에서는 2일 오후7시 인천 삼산 월드체육관에서 1997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진행된 심리 실험을 그대로 재현해봤다.

이날 경기는 프로농구 인천 전자랜드와 서울 SK 전. 하프타임 때 이벤트 사회자 한세이씨가 관중들에게 문제를 냈다.

“지능 측정 이벤트입니다! 전광판 동영상을 보세요. 흰 옷 입은 사람 3명과 검은 옷 입은 사람 3명이 뒤섞여 각자 자기네끼리 패스를 주고받습니다. 흰 옷 입은 사람들끼리 몇 번 패스하는지 세어보세요.”

교정기 낀 초등학생부터 백발 할아버지까지 관중 2280명이 열심히 패스를 셌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패스 횟수가 아니었다.

“방금 본 동영상에 사람 말고 다른 것도 나왔나, 사람만 나왔나”가 문제였다.

동영상 길이는 36초로, 하버드 실험을 설계한 대니얼 사이먼스와 대학원생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직접 만든 것이다.

학생 6명이 패스를 주고받는 동안, 온몸에 검은 털이 숭숭 난 고릴라가 9초에 걸쳐 어슬렁어슬렁 지나간다. 학생들 복판에서 두 차례 가슴도 두들긴다.

이날 삼산 체육관 관중 가운데 주최 측에 문자를 보낸 사람은 총 580명이다. ‘고릴라를 못 봤다’는 사람이 315명 (54.3%)에 달했다. ‘사람 말고 뭔가를 봤다’는 사람들 (265명 45.7%) 중에서 고릴라라고 정확히 맞춘 사람은 205명, 개와 곰을 봤노라 주장한 사람은 60명이었다. 패스 세는 데 주의가 쏠려 코앞에 있는 고릴라를 놓친 것이다.

하버드 실험에서도 “고릴라를 봤다”는 사람은 50%에 불과 했다. 97년 미국과 2011년 한국에서의 실험 결과가 거의 유사한 것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이 책의 주장이 그대로 확인됐다.

고릴라 실험의 주역 차브리스 교수에게 “한국에서 똑같은 실험을 해보겠다”고 하니 “결과가 궁금하니 꼭 알려달라”고 했다.

아마도 여자분들은 잘 모르실텐데 고속도로 휴게실이나 공공 화장실에 보면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요?

아마도 오늘 말씀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무엇을 했다!” 중요한 것은 그 일 이후의 흔적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 가운데 선한 영향력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책망이 있었습니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앞에서 하셨던 칭찬이 무색하게 긴 책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상실한 그 어떤 덕목도 하나님 앞에서 책망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그 도시에서 영향을 받은 두아디라 교회를 하나님께서 무섭게 질책하십니다.

제가 요즘 한국교회 언론에 가서 설교한 것이 바로 “거룩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어도 거룩함을 상실하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것이죠.

아마도 환경의 영향 때문에 이들이 어떻게 거룩함을 상실하고 있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칭찬을 받은 두아디라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섭게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거룩함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우리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팀 라헤이가 쓴 글이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달라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였습니다. 어느 부인 곁에 턱수염을 기른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기내 식사가 나왔는데 이 청년은 음식 먹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옆자리의 부인은 청년에게 몸이 불편하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몸이 불편한 것이 아니고 금식 기도하는 날이기에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부인은 그가 기독교인인 줄 알고 자신도 예수를 믿노라고 밝히면서 청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대답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오, 나는 사탄 숭배자입니다. 미국 전역에 있는 목회자들과 크리스쳔의 가정과 결혼생활을 파괴하기 위해 사탄 교회 지도자들이 매주 화요일을 금식기도의 날로 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면서, 덧붙여 “우리 가운데 몇 명은 지금 달라스에 살고 있는 목회자와 크리스쳔들을 위하여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두아디라 지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에서 동남쪽으로 55km 떨어진 소아시아의 내륙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었던 셀루커스 니카토 1세에 의해서 건설되었고, 그의 딸의 이름을 따서 두아디라라고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로마군인들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어서, 두아디라시는 군사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시는 비록 소도시였지만 양모, 세마포, 의류, 염료, 피혁제품, 청동제품, 등을 취급하는 상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나오는 빌립보교회의 첫 번째 성도였던 루디아가 바로 두아디라 출신 비단 장사였습니다. 두아디라시의 가장 큰 특징은 산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길드’라는 동업조합이 아주 성행해서 조합원이 되어야 취직도 되고, 은행거래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업조합은 이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더 나아가 종교에 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 힘이 막강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동조합은 자체적으로 섬기는 수호신이 있었는데, 조합원들은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들이 섬기는 수호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진탕 놀았는데, 이때 여인들을 불러 들여 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등장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실명인지 아니면 구약에 등장하는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을 비유하여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책망의 핵심은 ‘이세벨’을 용납하므로 일어난 교회의 일, 즉 “거룩함의 훼손”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등장하는 동사 “용납함이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사랑의 수고와 인내와 믿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이 이세벨의 행위를 용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무감각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도시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대로 두아디라에는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길드’ 즉 조합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거기에 소속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소속이 된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부도덕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러한 사회적 환경가운데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 때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아니면 은유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고 “용납하라고” 제안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음을 편하게 하므로 양심을 무디게 하는 거짓 선지자의 무리 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것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 두아디라에는 걸출한 믿음의 여인이 있었지요. 자주장사 루디아로 알려진 여인, 그래서 사도바울을 돕고 자신의 집을 내주어 교회가 설수 있도록 했던 한 여인입니다.

당시 사회적은 상황을 생각한다면 여인이 그런 사업을 하고,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집을 내어놓는 단순한 희생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능력이 대단합니다. 어쩌면 단순한 자주장사가 아니라 당시 패션을 주도하는 사업가 였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한 걸출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하게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음속에 생각되는 것은,

우리 교회와 민족가운데 루디아와 같은 여인이 많이 나오기를, 그리고 이세벨과 같은 유혹가운데서 이기는 자들, 그런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당시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이세벨’을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거룩함이 훼손된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한국 교회를 바라보게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한국교회에 사랑이 없어서, 봉사와 섬김이 없어서, 믿음이 없어서,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거룩함이 상실되어 가면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기 시작합니다. 거룩함이 훼손된 어떤 수고와 활동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거룩함”이란 진정한 교회와 교인들이 가져야할 또 하나의 표지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는,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사도바울이 보낸 편지 곳곳에서 거룩함이 교회의 본질임을 역설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좀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기에,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거룩함을 막으려고 방해합니다. 거룩함이 훼손되는 곳에는 틀림없이 사단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를 용납하는 것과 죄인을 용납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입니다. 죄인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죄를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한 그들의 나약함, 죄에 대한 그들의 관대함이 역사 속에서 두아디라 교회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권면하십니다.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오늘 본문 18절의 “불꽃같다”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의 눈이 불꽃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계실 때,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 ‘눈빛’이 아니었을까요?

마가복음 3장 5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의 완악함으로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불꽃같은 주님의 눈빛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불꽃같다”라는 말 보다 “섬광 같다”라는 말이 어떨까요?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불빛이 번쩍합니다. 그 순간 우리의 모든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나고 명확하게 찍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은 22장 60-61절을 보면 베드로를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길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닭이 울기 전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빛은 질책이 아닌 사랑과 연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눈빛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에게 그 예수님의 눈빛은 평생 가슴속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 뿐 아니라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보고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은 우리의 겉모양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것입니다. 그 분 앞에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 .”

그 주님 앞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악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절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들키지 않으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지 않으면 심판하지 않는다!”

죄를 짓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늘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4장 13절에 아주 무서운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면, “그 눈이 불꽃같고 또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경고가 무섭고 중합니다. 오늘 본문 21-23절을 보세요.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중요한 것은 이 여선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은데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음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사실 우리들의 문제는 죄를 짓는 것 보다 죄 지은 다음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완전합니까?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수가 아니라 범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꾸짖는 이유가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인 것처럼, 오늘 무서운 심판의 말씀역시 협박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벧후 3:9)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바로 그 분이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21절), 그들이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징계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가 열려 있음입니다.

그들을 침상에 던지고.. .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이 무섭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누구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되고, 누구에게는 심판의 무서움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큰 환란 가운데 던지고. . .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고. .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소름끼치게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범하는 음란죄를 저지르고 그의 남편 우리아까지 살해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나중에 침상이 젖도록 눈물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죄를 짓고 회개한 사람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 없고, 회개하여 사함 받지 못한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부르셨을 때, 즉각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숨어버렸습니다.

마지막 성만찬을 할 때,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향하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했을 때, 즉각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요13:30).

사도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라고 물었을 때,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예, 이 뿐입니다.“(행5:8)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이 거짓 여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잘못을 지적하시고 회개하라고 기회까지 주셨는데도 이 거짓 여선지자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무엇일까요? 심판입니다. 22절과 23절을 보면 심판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침상에 던지겠다’고 하는데, 여기 ‘침상에 던진다’는 말은 병에 걸려 자리에 눕는 것을 의미하는데, 범죄한 자들의 건강을 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환난 가운데 던지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회개치 않으면 환난이 기다린다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의 자녀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의 자녀라는 말은 이세벨주의를 따르는 영적 자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병을 주고, 환난을 주고, 자녀들을 치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축복의 말씀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중요한 것은 심판의 경고가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오늘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권세를 주리라” 그리고 “새벽 별을 주리라”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거룩함을 지키는 자를 위한 약속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끝까지 거룩함을 지킨 성도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먼저 26절을 보면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권세란 헬라어로 “엑수시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지배권, 통치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악에게 승리하는 사람은 만국을 다스릴 통치권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28절을 보면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여기 ‘새벽별’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새벽별이란 바로 우리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사람에게는 주님 자신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악에게 승리하는 사람에게, 음란에 빠지지 아니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사람에게, 비록 음란한 행동을 했다할지라도 그것을 회개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회복하는 사람에게는 만국을 다스릴 통치권과, 주님과 같이 동행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데 전술을 배우거나 무술을 연마하게 하거나 체력을 단련시키지 않고, 성결의식을 치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가나안은 극히 세속적이고 타락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문화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결’의 옷으로 갈아입히셨습니다.

사실 이 시대의 문화는 가나안 문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속적이고 반(反)기독교적 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특별한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Rick Warren)목사님은 세 가지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떳떳하게 자신을 밝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에 파묻혀 사는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상당수의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정체(identity)를 숨기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임을 떳떳하게 밝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No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No!”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용기입니다. 실력을 갖춘 사람만이 “No!”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노우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과 성결을 위해 단호하게 “No!”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서로의 삶에 책임을 지는 소그룹(Accountability Group)을 형성하라’고 합니다. 개인이 혼자 거룩해지려는 노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서로 체크해주고 서로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서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하며, 거룩한 삶의 방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나의 믿음을 떨어뜨리고 나의 성결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오늘 당장 절교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주님의 신부로서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성결의 동역자, 구별됨의 동역자를 여러분들의 옆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거룩함이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함 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결함을 통해 주님과 동행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과 권세를 주십니다.

오늘 두아디라교회에 주시는 경고가 심판이 아니라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와 한국교회를 향해 바라보시는 불꽃같은 주님의 눈앞에서 심판이 아닌 권세를 누리는 거룩함이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너진 그 교회의 터, 아니,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 왕국을 통해 세상을 지배했던 민족이 지금은 가난하고 황폐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나오면서 구걸하는 어린이와 젊은 여인을 바라보며, 1달라 씩을 주면서,

그 땅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땅의 부흥이 오기를,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기를. . .

버려진 땅이 회복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이 버려진 교회의 터가 우리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지금 우리 교회에, 그리고 한국 땅에 진리의 강물이 흐르기를 바랍니다.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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