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楊姬銀, 1952년 8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방송인이다. 본관은 청주이다.
생애 [ 편집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3녀 중 장녀로 태어난 양희은은 서울재동초등학교와 경기여자중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나왔다. 그녀의 선친은 육사 및 보병학교 졸업 출신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공적이 있으며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민국 육군 대령 예편 이후 병으로 요절하였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71년에 가수 데뷔하였다. 데뷔곡은 1집 앨범에 수록된 ‘아침 이슬’이다. 대표곡 〈아침 이슬〉의 작사 및 작곡자 김민기는 당시 작사를 할 때 민주화에 대한 열망 같은 직접적인 내용은 담지 않았다고 했지만 당시의 민중들은 군부독재로 억압받는 시대상황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해 민주화에 어울린다고 해석해 이 곡을 많이 불렀고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곡이 되었다.
그의 곡들은 당시 방송이 금지된 곡들이 많았는데 이는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등의 독재정권을 거치며 민주화 운동에서 〈아침 이슬〉을 비롯한 양희은의 곡들이 많이 불리었기 때문이다. 양희은의 곡 중 약 30여곡 이상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그 중에서〈아침 이슬〉은 1973년 정부가 선정한 건전가요에 선정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74년에 가사 중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부분이 대한민국의 적화 (赤化)를 암시한다며 금지곡이 돼버린 웃지 못할 일도 있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단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냐라는 이유만으로 인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작은 연못〉은 금지곡으로 지정됐으나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사 내용인 ‘작은 연못에 살던 붕어 두 마리가 싸우다 한 마리가 죽어 물이 썩어 결국엔 모두가 죽었다’라는 가사가 남한과 북한, 당시의 대권 라이벌이었던 박정희와 김대중, 권력 암투의 주인공이었던 김종필과 이후락 등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양희은의 금지곡들은 1987년 6.29 선언 직후 대부분 해금 (解禁)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음반활동과 더불어 방송활동도 하고 있다. 직접 작사도 하였는데 그 대표곡들을 살펴보면 1976년 <따로 또같이>의 멤버 이주원이 작곡한 졸업식 축가로 많이 불렸던 <내꿈을 펼쳐라>, 1983년 난소암 투병때 레코드 사장님이 죽은줄 알고 양희은의 앨범을 싸게 팔다가 사과의 의미로 준 김희갑의 곡에 직접 작사한 <하얀 목련>, 1991년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집에서 4시간 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작사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2008년 40주년 기념 음반 타이틀 곡으로 알려진 강영국 작곡의 슬로우락 장르의 곡 <내나이 마흔살에는>, 2015년 김나영 책에서 발췌하여 작사한 김나영 공동작사의 <나영이네 냉장고>가 있다. 그 외에도 <슬픔 이젠 안녕>, 김아영 작곡의 <밤뱃놀이>, 채치성 작곡의 <님찾아 아리랑>, 정신소아과 전문의인 전직 그룹 동물원 출신의 김창기 작곡의 <엄마가 딸에게>, 본인이 직접 채보한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등이 있다.
학력 [ 편집 ]
서울재동초등학교 (졸업)
경기여자중학교 (졸업)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업)
사람 관계 [ 편집 ]
정규 음반 [ 편집 ]
2006년 <인생의 선물/ 당신만 있어준다면>
2002년 <일곱송이 수선화/ 사랑 당신을 위한 기도>
1998년 <저 하늘 구름따라/ 연인들>
1995년 <못다한 노래/ 내 나이 마흔 살에는>
1991년 <그 해, 겨울/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1987년 <이별 이후>
1985년 <한계령/ 찔레꽃 피면>
1983년 <하얀 목련/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1980년 <이름모를 소녀/ 빗속을 둘이서>
1978년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천릿길>
1976년 <들길을 따라서>
1975년 <한사람/ 세월이 가면>
1974년 <내 님의 사랑은/ 백구>
1972년 <아름다운 것들/ 서울로 가는 길>
1971년 <아침이슬/ 세노야 세노야>
1.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 아침이슬/펍/세노야 세노야 – 유니버샬, KLS 26 71년
2. 71 폭송힛트모음 제1집 – 유니버샬, KLS 27 71년 (이루어질수없는사랑, 나무잎이떨어져서.일곱송이수선화 3곡)
3. 양희은 고운노래모음 제2집 – 유니버샬, KLS 40 – 72년 (초반과 재반이 있음) – 그사이/백구/서울로 가는길/작은연못 등
재반에는 초반에 없는 ‘아름다운 것들(외국 곡)’과 ‘새벽길(김민기 곡)’ 2곡이 추가됨
4. 맷돌 밝은노래모음 (실황앨범 중) – 유니버샬, KLS 47 72년 – 서울로가는길 빈자리 아침이슬 3곡
5. 신중현 작•편곡집 – 양희은 – 당신의 꿈/ 나도몰래 – 유니버샬, KLS 56
6. 양희은 고운노래 제3집 –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 – 유니버샬, KLS 71
7. 양희은 – 내님의 사랑은 /오너라 비야 – 유니버샬, KLS 94
8. 양희은 GREATEST HITS – 아침이슬/사랑의기쁨 – 유니버샬. KLS 97
9. 양희은 보고싶은 마음/빗속을 둘이서 – 유니버샬, KLS 105 (초반과 재반이 있음) 재반에는 차돌이내몸 (김민기 곡)과 잃어버린 말(김민기 곡)이 빠지고, 지다남은 잎(김기웅곡)과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노래가 수록되어있음.
10. 정명규 – 자기 / 영원한 사랑 – 유니버샬, KLS 108 – ‘지다남은 잎(김기웅 곡)’ 한곡이 수록되었음
11. 양희은 – 한사랑/ 세월이가면 – 유니버샬, KLS 122[2]
방송 프로그램 [ 편집 ]
드라마 [ 편집 ]
영화 [ 편집 ]
《7급 공무원》 – 재준 모 역 (목소리, 특별출연)
TV 광고 [ 편집 ]
수상 [ 편집 ]
각주 [ 편집 ]
↑ 뜻밖의 만남…두 번째 ↑ 초반은 유니버샬/ 재반은 같은재킷에 수록곡을 좀 달리하여 서라벌 레코드에서 찍어냈다.
외부 링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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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양희은이 11월 29일 가요무대에 출연합니다. 이에 양희은 나이 결혼 근황 등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그래서 오늘은 가수 양희은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모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양희은(가수)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종교 학력 소속사
가수 양희은은 1952년 8월 13일생으로 올해 나이 70세입니다. 양희은 고향은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이며, 3녀 중 장녀로, 가족으로는 남편 조중문이 있습니다. 참고로 여동생 양희경은 유명 가수, 이질 조카인 배우 한승현과 양동근은 유명 배우입니다.
양희은의 종교는 개신교이며, 양희은 학력은 서울재동초등학교, 경기여자중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희은의 현재 소속사는 옹달샘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라고 합니다.
양희은(가수) 집안 과거
양희은이 어릴 적 집안은 유복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서북청년사건때 진남포에서 단신남하한 양정길이었는데 육사 4기 보병장교를 거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공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윤순모는 서울예대 성악과 출신의 디자이너였다고 합니다.
3녀 중 장녀였던 양희은은 이후 아버지가 외도를 하고 새엄마가 들어오게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가슴속에 품었다고 하는데요, 그 후 양희은이 13살 무렵 그의 아버지는 육군 대령 예편 이후 39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고 어머니가 보증을 잘못 선 데다가 어머니의 양장점이 홀라당 타버리는 바람에 집안이 기울어 대학시절 끼니는 물론이고 교통비조차 없어서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양희은 역시 맏이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19살 때부터 직업 가수의 일을 해야만했고 무대에 올려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바로 송창식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송창식은 명동의 맥주집에서 자신의 공연시간 중 일부를 떼어주어 어린 양희은이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 추천 안 하기로 유명한 송창식이 추천한 사람은 양희은이 최초라고 합니다.
양희은(가수) 가수 데뷔 앨범 활동
양희은은 그렇게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 이후 대학교 1학년 때인 1971년 양희은의 첫 정규앨범 양희은 고운 노래 모음을 내며 데뷔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수록된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세노야는 양희은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이 됩니다.
사람들은 당시의 군부독재로 억압받는 시대상황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해 민주화에 어울린다고 해석해 이 곡을 많이 불렀고, 그 결과 이 곡은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침 이슬이 금지곡이 되면서 그녀의 노래들도 덩달아서 금지곡이 되는 슬픔을 겪어야 했는데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1975년에 정부에서 수여하는 대한민국 가수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후 양희은은 1981년 한국을 떠나서 1년여간 미국과 유럽 등을 여행하고 돌아왔지만 이듬해인 1982년 난소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는 등 인생의 굴곡을 겪기도 했는데요, 그런 와중에도 1985년 발표한 하덕규 작곡의 한계령은 뛰어난 곡으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양희경의 금지곡들은 1987년 6.29 선언 직후 대부분 해금되면서 뛰어난 뮤지션으로 재평가를 받기 시작, 1집과 20주년 기념앨범은 각각 67위와 91위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양희은은 가수 경력 뿐만 아니라 라디오 DJ로서도 전설적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CBS, TBC 등에서 팝 음악방송 DJ를 했을 만큼 방송 경험도 풍부한 편으로, 1999년부터 지금까지 MBC 표준 FM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진행과 SBS 생활의 달인에서 해설을 맡고 있습니다.
또한 양희은은 직접 작사도 하였는데 그 대표곡들을 살펴보면 1976년 내꿈을 펼쳐라, 1983년 하얀 목련, 1991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2008년 나영이네 냉장고 등이 있고, 그 외에도 슬픔 이젠 안녕, 김아영 작곡의 밤뱃놀이, 채치성 작곡의 님찾아 아리랑, 정신 소아과 전문의의 전직 그룹 동물원 출신의 김창기 작곡의 엄마가 딸에게, 본인이 직접 채보한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등이 있습니다.
<양희은 수상 경력>
1995년 카톨릭가요대상 공로상, 방송 프로듀서연합회 최고의 라디오 진행자상
1996년 제 23회 한국방송대상 가수상
2001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 부문 최우수상 (여성시대)
2003년 제 18회 골든디스크 시상식 공로상,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대통령상
2004년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
2008년 MBC 방송연예대상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세상을 바꾸는 퀴즈)
2010년 제 47회 저축의 날 국무총리 표창
2011년 MBC 방송연예대상 라디오 부문 최우수상 (여성시대 양희은, 강석우입니다)
2012년 제 24회 한국 PD대상 라디오 진행자 부문 출연자상
2019년 제 10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제16회 한국 대중음악상 공로상, MBC 방송연예대상 라디오 부문 최우수상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양희은(가수) 실제 성격
양희은의 성격은 어릴 적부터 강직했다고 합니다. 선배 가수 조영남이 “양희은은 무경우의 천적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무경우가 발견되면 그녀는 즉시 독립투사 훈육주임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싸워서라도 시시비비를 가린다. 그러나 후배들을 다독거릴 때는 천하에 싹싹 상냥무쌍한 큰언니가 된다.”라고..
이런 양희은의 성격때문인지 송은이나 박미선 등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로 양희은을 꼽을 정도라고 합니다.
양희은(가수) 난소암 투병
그런데 이십대의 양희은은 공부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대학 졸업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양희은은 그렇게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이십대를 다 바쳤는데, 삼십 대가 되자 난소암이라는 큰 병에 걸리게 됩니다.
양희은 : “20대에 집안 빚 갚고, 두 동생을 대학 보내고 시집가는 것까지 보느라 내 손으로 월급을 만져본 기억이 없다. 힘들어서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는데 병이 찾아왔었다.”
양희은 : “1982년 여름에 첫번째 수술을 했어요. 당시 자궁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 긴 시간을 들였어요. 여성호르몬과 목소리는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수술을 하면서 한쪽 난소만이라도 남겨놓으려고 애를 쓰셨던 거죠.”
시한부 3개월이라는 판정을 받았던 양희은이지만 동생과 식구들의 정성어린 간호로 병을 치료하는 데 성공하고 다시 가수로 복귀하게 됩니다.
양희은(가수) 결혼 남편 조중문 나이차 직업
양희은은 남편 조중문과 1987년 결혼식을 올렸는데요, 양희은과 남편 조중문 두 사람의 나이차는 양희은은 1952년생인 70세이고, 남편 조중문은 1949년생인 73세로 3살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참고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당시 양희은은 36살, 조중문은 39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양희은 남편 조중문의 직업은 사업가로, 미국 맨해튼에서 직원 18명이 일하는 대형 슈퍼마켓 사장이었다고 합니다.
양희은(가수) 남편 조중문 결혼스토리
양희은은 난소암 치료에 성공한 이후 다시 가수로 복귀, 이후 우연히 1987년 뉴욕의 한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조중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중문은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업가로, 두 사람은 만난 지 무려 3주 만에 결혼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양희은 : “남편을 만나고 3주 만에 결혼했는데, 둘 다 초등학교 때 짝꿍 좋아하듯이 동시에 좋아했다. 오랜 시간 겪었으면 아마 결혼을 안 했을 것 같다.”
실제로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는데, 특히 조중문은 양희은의 솔직 당당한 매력에 반하게 되었고, 양희은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남편에 대한 환상이 컸다고 합니다.
양희은(가수) 남편 조중문 결혼생활
결국 두 사람은 1987년 만난 지 3주 만에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고, 이후 양희은은 미국에서 평범한 주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 이후 조중문은 자신이 운영하는 슈퍼에서도 양희은이 절대 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희은은 개와 함께 산책을 하며 남편의 가게에 들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고 합니다.
조중문 : “결혼하기 전까지 집사람이 쉬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저는 결혼과 동시에 집사람이 일에서 좀 풀려났으면 싶었어요. 일을 잊고 집에서 살림만 하기를 바랐던 것인데 오히려 집사람에겐 그게 불만이더라고요.”
양희은 : “그렇다고 여행을 자주 갈 수 있었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어요. 미국 생활 7년 동안 남편과 여행한 곳은 벚꽃을 보고 싶다고 타령해 워싱턴에 한번 가본 것 하고, 필라델피아 여행이 전부였어요. 세상에 영화관에 가자는 소릴 한번 하나, 엉엉 운 적도 있어요. 입이 튀어나오고, 투쟁을 해야 이 사람이 겨우 몸을 움직이니까요.”
양희은 : “막상 영화관에 가도 이 남자는 손 코넬리 포스터 앞에 서 있고, 저는 월트 디즈니 포스터 앞에 서 있어요, 취향이 다르면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나중에 만나면 될 텐데 이 남자는 제가 어떤 걸 보고 싶다고 하면 마지못해 그러자 하고 따라와요. 전 그런 태도가 못마땅해 또 한마디 하죠.”
양희은(가수) 난소암 재발로
그렇게 신혼생활을 보내던 양희은은 1989년 다시 난소암이 재발하게 됩니다. 1982년 처음 수술했을 당시 한쪽을 남겨두었던 자궁 쪽에도 문제가 생긴 것이었는데요, 이에 양희은은 두 번째 수술을 받으며 자궁을 드러내야 했고, 결국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고 맙니다.
양희은 : “남편은 (아이를 못 낳는 것에 대해) 쿨하게 그냥 살면 되지 이렇게 말해줬다. 참 고마웠다.”
양희은 : “남편에겐 강아지와 아이를 쳐다보는 눈이 따로 있다. 저에겐 보여준 적이 없는 얼굴이다. 그럴 땐 저렇게 좋아하는데… 하며 좀 쓸쓸해진다. 하지만 특별히 미안한 마음은 없다. 마누라가 병에 걸려 아이를 못 낳는 것은 이 사람의 팔자이기도 하다.”
양희은(가수) 부부 귀국 이후 남편에게 병마 찾아와
하지만 자녀도 없는 미국 생활은 많이 권태로웠고, 순탄치 않은 이민 생활이었지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양희은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실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잘하는 뭔가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조중문은 아내를 위해 1993년 미국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던 중, 이번에는 조중문에게 병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병이 찾아오기 6개월 전부터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양 발바닥이 바늘로 쑤시듯 아픈 전조증상이 있었지만 운동이 과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갑자기 손목 통증이 심해져 티스푼 하나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가 됐다고 합니다. 진단 결과 급성 다발성 류마티스성 관절염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양희은 : “어느 날 남편이 차 시동이 안 걸린다더라. 손목도 못 움직이는 상태가 시작이었고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왔다. 남편의 류머티즘은 갈수록 심해졌지만 약도 맞지 않아 부작용에 시달리며 통증이 지독해 잠을 못 잤다.”
양희은 : “남편이 통증으로 잠을 설치는 것은 다반사고 아주 짧은 거리를 걸어가는데도 어기적거리고 너무 힘들어했어요. 밥숟가락을 들어 올리면서도 진땀을 흘렸고, 승용차에 겨우 앉아 키를 꽂은 다음에도 손목이 아파서 키를 비틀지 못해 시동을 걸 수 없었어요. 혼자서 치약을 짜지 못해서 아침마다 칫솔에 치약을 짜 놓아야 할 정도였어요.”
진통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어 통증 완화를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데일 정도의 뜨거운 물에 통증 부위를 담그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이 뜨거워 살이 벌겋게 익을 정도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밤새도록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뺐다 반복하며 지옥 같은 밤을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지켜보며 양희은은 모든 일을 접고 남편 간호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려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양희은 : 당시 CBS 라디오 양희은의 정보시대와 SBS 라디오 2시의 친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방송을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와 운전대를 잡고서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양희은(가수) 남편 조중문 치료에 성공 이후 근황
다행히 이 부부는 은인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관절염의 권위자 재미교포 의사 김문호 박사가 나타난 것이었는데요, 김문호 박사는 벌의 독에서 추출한 생약으로 류머티즘나 퇴행성관절염 등을 치료해 이미 교포사회에는 이름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고국에 잠시 다니러 온 김박사와 인연이 닿아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았고, 김박사가 출국한 뒤에는 그가 추천한 후배에게 치료를 받아 차츰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곧 혼자서 변기에 앉을 수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차도를 보이다 1998년 여름 마침내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아무튼 양희은은 난소암 진단 이후 두 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남편과 강아지들을 자신 삼아 키우며 긍정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여러 예능 등에서도 얼굴을 자주 보이고 있는 양희은인데요, 또한 정규앨범은 2014년 이후로 뜸하지만 싱글은 지난 2018년까지 꾸준히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상 가수 양희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 추천 글 -> 이도진 <나이 집안 의혹 해명>
* 추천 글 -> 풍금(가수) <나이 학력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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