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서초구의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오전 10시가 되자 한 블록에서 마주 보고 늘어선 가게 20여곳 중에 장사를 시작한 곳은 3곳뿐이었다. 오전 영업이 한창일 시간이지만, 지하상가를 찾은 손님은 10여명. 오전 9시면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열었던 풍경은 사라졌다. 손님이 줄면서 영업 시작 시각도 늦춰졌다.
영업을 시작한 가게도 네 곳 중 한 곳에 ‘정리 세일’ ‘폐업정리’ 문구가 붙어 있었다. 찾는 손님도, 매장 입구 앞에서 손님을 맞던 호객도 없었다. 25년 동안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60대 정모씨는 먼지 쌓인 옷걸이를 정리하면서 “월세를 내기도 버거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일명 ‘고터상가’라고 불리는 이곳도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다. 고속버스터미널과 연결 지하철역 등으로 유동인구가 많다는 장점을 가진 이 상가는 중고생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에 고터상가는 2021년 기준으로 상점 총 212곳 중에 41곳이 폐업한 상황이다.
가게 곳곳엔 폭탄세일…“방학에 고터 찾는 학생들만 기다린다”
지하상가의 옷가게엔 철 지난 봄옷들이 ‘폭탄세일’이라는 문구로 팔리고 있었다. 폐업한 가게 사이에 ‘원가 이하 마지막 판매. D-1’이라는 표지판을 붙여둔 한 옷가게는 겨울옷부터 여름옷까지 사계절 옷이 모두 꺼내져 있었다. 10년 차 옷가게 주인 A씨는 “더는 임대료를 버텨낼 여력이 없다”며 “이렇게 여기저기 세일한다고 붙여놔도 어제 하루 매출이 겨우 3만원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1년에 강남역 지하상가가 리모델링 됐을 때 대출금을 쏟아부어서 온 자리인데 더는 버틸 수 없어서 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30년 동안 지하상가에서 구둣가게를 운영한 B씨(59)씨도 마찬가지다. B씨는 “이 가게의 월세가 1000만원이고 여기에 인건비까지 줘야 하니 죽고 싶다”며 “7월부터 학교방학인데 재작년이었다면 학생들이 나들이와서 옷도 사고 구두도 사고 그랬을 텐데 지나가는 사람만 있을 뿐 아무도 없다”고 털어놨다.
고터상가를 도는 몇 안 되는 손님들도 ‘아이쇼핑’만 했다. 지하상가에서 쇼핑하고 있던 고등학생 김모(17)양은 “토플학원이 끝나고 잠시 들렀다”며 “코로나 때문에 물건을 만지긴 그렇고, 아이쇼핑용으로 본 뒤에 옷은 인터넷으로 구매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직장인 정모(26)씨는 “강남역 지하상가가 옷이 싸니까 대학생 때 예쁜 옷들 여기서 많이 샀었던 기억이 있다”며 “오늘은 친구 만난 겸 구경만 하는 중”이라고 했다.
떠나는 손님 붙잡으려…낚시용 정리 세일, 슬픈 거짓말
코로나19에 버티지 못한 가게들은 ‘낚시용’ 광고로 점포정리 간판을 걸어두기도 했다. 가게 입구의 쇼윈도에 ‘업종변경 정리세일’ 문구를 붙인 옷가게 직원 C씨는 “업종을 변경할 계획도 없지만, 코로나로 장사가 너무 안되자 생각해낸 궁여지책이다. 여전히 팔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억 단위로 빚진 상황이고 근처 가게들도 장사가 안되니 저녁 7시쯤 일찍 퇴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가 있기 전, 이 상가들은 퇴근시간대가 지난 뒤 오후 10시쯤에 문을 닫았다.
퇴근 때 몰리는 유동인구를 잡기 위한 고군분투도 역부족이었다. 11번 출구 인근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신모(45)씨는 “폭탄세일을 한다고 간판을 붙여놔도 들여다보질 않으니 크게 소리를 질러야 몇 명이 돌아본다”며 “퇴근할 때쯤이면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라리 “유동인구가 아예 없었으면 한다”는 상인도 있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초창기엔 상가를 지나치는 유동인구가 사라지자 점포 주인들이 자영업자의 경영난을 위해 월세를 내려주는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고터 지하상가는 지난해 5월 오프라인 상가와 연계된 온라인 쇼핑몰을 열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 중이다. 상가 관계자는 “지하상가 자체 몰로는 고객 유입에 한계가 있어 쿠팡이나 다른 오픈 마켓을 경유해 온라인 쇼핑몰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잠실·강남역 지하상가보다 크다는 사실 모르는 사람들 많아
입점 업체들 ‘서울시 관광특구’ 지정에 기대 커
① ‘국내 최대 지하상가’인데도 왜 ‘뜨지’ 못할까
② ‘관광특구’ 지정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③ 입점 상인들 “서초구가 적극 나서라”
서울 서초구 신반포로 지하상가 ‘고투몰’은 전철노선 3,7,9호선 환승역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역’ 으로 통하는 ‘지하상가’, 우리나라 최장 지하상가다. 호남선, 경부선 등 지방을 잇는 고속터미널과 연결되어 있으며 신세계 백화점과 센트럴시티 등이 인근에 포진돼 있다. 사진은 ‘고투몰’ 영업시간을 알려주는 지하 기둥 안내판 (사진=김은경 기자)
[서울=뉴스프리존]김은경 기자=우리나라 최대 지하상가인 ‘고속터미널 지하 쇼핑몰'(고투몰)은 왜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고투몰은 우리나라 지하 최대 쇼핑몰이다. 잠실역 지하상가의 6배, 강남역 지하상가의 3배 규모다. 잠실역은 지하에 점포가 142점, 강남역은 224점, 고투몰은 626점이 입점해 있다. 고투몰은 고속터미널을 줄여서 통상 ‘고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고터 갈까?” 이러면 “고속터미널역 지하에 있는 쇼핑몰 가자”라는 말이다.
조건도 좋다. 강남고속터미널역 주변으로 신세계백화점, 신세계 센트럴시티, JW메리어트호텔, 예술의전당 등의 문화 숙박 시설이 두루 들어서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인지도는 아쉽다. 고투몰이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실제 규모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입점 상인들도 이같은 사실을 알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중이지만, 갈 길은 멀어보인다.
대부분 알고는 있지만, 규모는 잘 모르는 ‘고투몰’
고투몰의 역사는 짧지 않다. 서울 시민들 중 특히 나이 많은 이들 사이에서 ‘꽃도매상가’로 알려져 있다.
1978년에 착공해 1981년 완공과 동시에 오픈된 강남 고속터미널의 공중 승차장 자리였던 지상 3층이 꽃시장으로 변모하면서 차츰 2층과 4층은 혼수전문상가로, 5층은 ‘강남웨딩컨벤션’이 들어서면서 호황을 맞았다.
고속터미널역에서 경부선 영동선 방향 연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지상 2층 혼수 홈패션, 3층 꽃 도매상가 (생화,조화), 4층 혼수 홈패션 상가가 있다. 사진은 반포대로에 있는 고속터미널 전경 (사진=김은경 기자)
현재는 고속터미널역 전철역(3·7·9호선)에 내리면 8-1출구에서 시작하는 ‘고투몰’ 쇼핑 타운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실제로 기자가 방문해 보니 의류패션 관련 매장이 강남역이나 잠실역의 지하상가보다 몇 배 많이 늘어서 있었다. 무려 626개 점포들이 끝도 없이 양옆과 사방으로 이어져 있다. 블럭마다 특색 있는 상점들로 구분 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 기자가 방문했던,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기에는 옷 뿐 아니라 갖가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 찬 매장들이 눈길을 끌었다. 유명 연예인들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고터에서 장만했다고 하는 기사도 검색된다. 검색창에 ‘고투몰’이나 ‘고속터미널’을 검색하면 ‘크리스마스 트리장식 구경왔어요’, ‘고투몰 가는법’이라는 제목의 글이 줄줄이 뜬다. 중국인들도 코로나 이전에 신세계 면세점이 있어 많이 들렸다고 한다.
서초 반포로에 있는 ‘고투몰’은 (서울 중구) 동대문에 나가야 볼 수 있는 ‘포장재료’ 가게부터 장식품, 엔틱 소가구, 전통 소가구 소품, 패션 의류용품, 신발, 가방, 악세서리 등을 비롯한 626개 가게들로 이루어졌다. (사진=김은경 기자)
하지만 시민들은 규모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본지에서 서울 시민 30명을 대상으로 약식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설문은 ▲고투몰을 아는지 ▲가봤는지 ▲잠실·강남역 지하상가보다 몇 배로 크다는 것을 아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들 중 절반이 고투몰을 한 번쯤은 가 봤지만, 그렇게 크다는 건 잘 몰랐다고 답했다.
결국 규모에 비해 매출은 기대만큼 나오지 않는, 아쉬운 상권으로 현재 고투몰은 자리잡고 있었다.
‘서울 관광특구’ 지정되면 살아날 수 있을까
입점 상인들도 고투몰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난 2020년 5월 강남터미널지하쇼핑몰(대표 정귀연)은 코로나19로 정체된 상권의 회복을 위해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온라인몰 ‘고투몰’까지 설립, 새로운 판로 개척을 꾀하기도 했다. 고투몰에는 입점 상인들 626명 전원이 참여했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30여 년을 오프라인 매장만 운영하던 상인들에게 온라인 판매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경험·기술적인 측면 모두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투몰 관리측에서는 입점 상인들에게 최저 수수료 혜택과 온라인에 업로드 할 상품을 촬영할 수 있는 촬영 시설을 지원하면서 ‘상생’의 길도 찾고 수익은 고속터미널 관광사업 발전에 투자한다는 공동의 목표도 세웠지만 쉽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이에 고투몰 측은 홍보를 위한 ‘서울 관광특구’ 지정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강북에는 홍대, 이태원, 명동, 동대문 패션쇼핑타운이 있다면 송파(잠실), 강남, 서초에는 롯데월드, 무역센터, 고투몰(고속터미널 지하 쇼핑몰)이 있다. 이 중 홍대, 명동, 종로, 동대문, 송파(잠실), 이태원, 강남 7곳이 ‘서울 관광특구’로 지정돼 있지만, ‘고투몰’은 빠져있다.
강남고속터미널역 안 신세계백화점 통로. (사진=김은경 기자)
몇 해 전에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고투몰 관리사무실에서 외부 용역을 통해 ‘관광특구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다. 코로나19 확산 전에는 ‘관광특구’ 지정 요인 중에 가장 큰 ‘1년간 유동인구 50만 명’ 여건도 충족했다.
2012년 6월 공사비 472억 원(점포당 8000여 만원)을 들여 공사기간 13개월 걸려 리모델링 완성한 ‘고투몰 개보수 보고서 일부. (자료=고투몰 주식회사)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는 마당에 ‘관광특구’ 지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도 생기지만 관광특구로 지정되면 ‘서울의 관광특구’ 리스트에 올라간다는 점에서 ‘고투몰’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하쇼핑센터라는 것이 자연스레 홍보 될 것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기대다.
특히 쇼핑에 있어 ‘큰 손’으로 분류되는 중국인들은 ‘크다’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관광특구’로 지정된 뒤 한국 최대 지하상가몰이라는 점을 어필할 수 있다면, 코로나19 이후 중국인들의 필수 관광코스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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