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한글)
관자재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너느니라.
사리불이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또한 그러하니라.
사리불이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임과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아무 것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아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노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반야심경해설■
1. 반야심경이란?
『반야심경』과 『천수경』은
우리나라의 불교행사 때에 제일 많이 읽혀지는 경이다.
『천수경』이 관세음보살의 원력과 위신력,
그리고 중생이 어떻게 관세음보살을 신앙하며
중생의 입장에서 어떠한 발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했다면,
『반야심경』은 「반야, 중도, 해탈」의 세계를 중심으로 말씀하고 있다.
『반야심경』은 불과 260자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경문이지만,
대,소승 경전의 내용을 간결하고도 풍부하게 응축하고 있어서,
예불이나 각종 의식에는 물론 식사 때에도 지송하고 있는 경전이다.
불교에 입문하지 않더라도 불교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전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에 앞서
외워두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만큼 불교 입문서로서의 대표성도 가지고 있다.
◆ 반야심경의 구성
『반야심경』에는 일곱 가지 번역본이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제일 많이 봉독 되는 경은 현장(玄藏) 역본(譯本)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주로 현장 역본을 독송해 왔다.
『반야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준 이름이다.
더 줄여서 「심경」(心經)이라고도 한다.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
곧 무아인(無我印) 경전 6백 여권 중의 골수(骨髓)는
금강경(金剛經)이라 하고,
이 심경은 안목(眼目)이라 하는 것이며,
또는 8만대장경 중의 요체(要諦)라 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흔히 인도의 우수한 학승들이 반야계 경전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8만 4철 법문을 260자 안에 요약한,
전무후무한 경전이라고 일컫다.
그 만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불교사상의 정수를
오롯이 담아 내었다는 말인데,
음미할수록 한자한자가 놀라운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공사상의 핵심을 정교하게 변증하는 앞 단계가 있고
이어서 바라밀의 경지를 웅장한 톤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그 결론으로 진언의 내용이 풍부한 울림으로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 반야심경의 의미
『반야심경』은 경전 가운데 총 260자의 가장 짧고 가장 중요한 경이다.
반야는 범어(梵語)로 “쁘라즈냐” 즉 지혜라는 것으로
미혹한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
차별의 세계에서 무별의 세계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공(空) 즉 자유라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의미는
‘지혜의 완성’과 그것의 정수를 말하는 경전이라는 의미가 된다.
*반야(般若) : 프라즈냐(prajna)의 음사어, 지혜라는 뜻.
*바라밀다(波羅蜜多) : 파라미타(parammita)의 음사어, 완성이라는 의미.
*심(心) : 흐리다야(hrdaya)의 음사어, 심장.정수라는 의미.
*경(經) : 수트라(sutra), 성전이라는 의미.
2. 반야심경이란 어떤 경전이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반야심경의 정식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고 줄여서 ‘심경’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각종 법회나 의식 때 으레
이 경을 독송하므로 가장 친근한 경이다.
그러면서도 600권이나 되는 대품반야경의 반야사상을
260자로 압축 시켜놓은 만큼 그 해석이 용이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경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반야는 범어 프라즈냐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으로서,
대승불교사상을 대변하는 중요한 낱말이다.
그 뜻은 ‘큰 지혜’ 또는 ‘완전한 지혜’로서, 판단하고
추리 하는 이성적인 지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본래의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말한다.
본래 깨끗한 이러한 마음은 너와 나라는 분별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그래서 바라밀다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바라밀다는 저쪽 언덕에 도달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이쪽 언덕의 더럽혀진 마음을 본래의 깨끗한 상태인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냥 아는 것만으로는 안되며
실제로 건너가는 지혜로운 실천과 수행이 있어야 한다.<彼岸>
그러한 실천이 곧 반야바라밀다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밑다심경은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
지혜로운 가르침과 실천의 핵심을 밝혀놓은 경전으로,
세상 만물은 인연 따라 발생하는 연기(緣起)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사물 자체로는 홀로 서지도 못하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이치 즉,
공(空)의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번뇌가 많은 인생을 연기에 따라 규명해가면
그 근거가 무명에 이르게 되므로 연기의 공함을 자각하여
무명이 소멸될 때 깨달음을 얻어 반야가 실현 되며
열반에 도달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3. 반야심경 해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는 크다(대), 많다(다), 초월하다(승)의 뜻이고,
반야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며,
바라밀다는 저 언덕에 이르다(도피안)는 뜻이다.
심경은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이란 뜻이다.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는 가장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삼계. 사생. 육도의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오온(色-물질적 현상, 受-감각작용, 想-지각작용,
行-의지적 충동, 識-식별작용)이 모두 공함을 (실체가 없음을) 확연히 알고
이 모든 고통(4고, 8고)에서 벗어 났느니라.
*四苦 – 生·老·病·死
*八苦 – 生·老·病·死·愛別離苦·怨憎會苦·求不得苦·五陰盛苦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적 현상이 그 본질인 공과 다르지 않고,
공 또한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적 현상이 곧 본질인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니라.
감각작용, 지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도 다 공이느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 이 모든 존재들이 외관상으로는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더러운 것 같기도 하고 깨끗한 것 같기도 하고
증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모든 현상계의 본질적 차원(관세음보살의 차원)에서는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감소하는 일도 없고, 증가하는 일도 없느니라.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사리자여) 이 현상계의 본질의 차원인
공의 입장에서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각작용과 지각작용 그리고 의지적 충동과 식별작용도 없느니라.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 공의 세계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
(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도 없고 그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느니라.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이 공한 세계에서는)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고, 그 원인의 소멸도 없고
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방법도 없느니라.
(그럼므로 이 공의 세계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도 없느니라.
菩提薩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가碍 無가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럼므로 사리자여)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느니라.
(보살은)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렀느니라.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완전한 깨달음)를 얻었느니라.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다는 이 큰 신비한 주문이며,
큰 밝은 주문이며, 큰 최상의 주문이며,
이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주문인가를 알아야 하느니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능히 일체의 고액을 소멸시키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나니, 그러므로(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일러 가로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피안에 도달하였네. 아!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반야심경은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가리킴이다. 그런데 대중적 인기만큼이나 오해도 깊다.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오해를 넘어 반야심경이라는 글을 통해서 스승이 진정 무엇을 가리키고자 했는지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반야심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를 반야심경 해설서로 활용해서 반야심경을 해설한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를 읽고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관점에서 책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책이 없어도 반야심경 해설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반야심경을 좋아하는 모든 이들이 오해를 넘어 반야심경을 통해서 스승 석가모니가 진정 가리키려 하는 달을 직접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1장. 반야심경 한글 번역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긴 이름이 붙은 이 경전은 줄여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 하는 데, 한자 260자의 본문을 가진 짧은 경전이다. 당나라 승려 현장(玄裝)이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고대 인도의 불교 경전 반야바라밀다(प्रज्ञापारमिता, Prajñāpāramitāhṛdaya, 般若波羅蜜多, Heart Sutra)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수많은 불교 경전들의 핵심을 요약하면 반야심경이라고들 말하고 절에서는 아침 예불 때마다 반야심경을 낭송한다.
먼저 반야심경 전문을 보자. 다음은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 전문과 이 글에서 새롭게 번역한 한글 번역이다. 한글 번역은 “한글 반야심경 2020″이라 부르기로 한다.
** 첫 줄에 한자 원문, 다음 줄에 한글로 한자 음을 달고, 그다음 줄에 한글 번역을 달았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핵심이 되는 말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실체를 가리키는 깊은 진리의 표현이기에, 세상의 실체가 공함을 바로 보면 모든 어려움을 넘어 그 실체 닿느니라.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기에 물질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그러하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공하기에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느니라.
是故 空中無色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무수상행식
이렇게 공하기에 물질도 실체가 따로 없고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느니라.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으며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현상도 실체가 따로 없기에 본다는 것과 본 것을 의식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느니라.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런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심지어 늙고 죽는 것이 없기에 늙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느니라.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괴로움이 실체가 없기에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없고,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 또한 없느니라.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이렇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찾는 이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만을 바라야 하느니라.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러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으면 두려울 것이 없어서, 모든 거짓 믿음을 넘어 어떤 의문도 남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느니라.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부처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면서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을 온전히 끝내느니라.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니 명심하기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바로 보는 것만이 가장 신비하고 확실한 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방법이기에 능히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 진실에 닿기에 헛되지가 않느니라.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래서 일러주리니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거라.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한글 반야심경 2020, 반야심경 한글 번역, 관음 옮김
해설에 필요한 기존 한글 번역을 찾아 적으려다 하다 마땅한 번역을 찾을 수 없어, 어쩌다 한글 번역을 새로 쓰게 됐다. 듣고 믿어왔던 반야심경과 너무 달라 많이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혹, 놀라거나 충격이 있다면 참 좋은 일이다. 마음이 동했다는 증거다. 모든 이해는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앎이 일어난다.
나는 한자에 무지하기에 한자에 얽매이지 않고 기존의 번역은 참고만 했다. 학문적 가치는 전혀 없을 것이기에 오해 없기 바란다. 이 한글 번역과 해설의 목적은 스승 석가모니가 반야심경을 통해서 찾고 있는 당신에게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쉽고 바르게 전달해서 스승이 가리키는 곳을 직접 살펴보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도록 하는 데 있다.
보통 반야심경을 한자로 낭송하는 데 한 번씩은 이 한글 번역본으로 낭송하면 어떨까 한다. 물론 한자본이 낭송하는 맛이 있지만 뜻을 알기는 쉽지 않기에 가끔씩 한글 번역본을 낭송하다 보면 반야심경의 뜻이 깊이 다가올 것이다. 낭송이 와닿지 않으면 한글 본은 글로 읽으며 그 뜻을 가슴에 새기는 것은 어떨까. 아무튼, 다들 마음 가는 데로 하길 바란다.
어떤 형태로 접하든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이해가 싹트고 자라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반야심경, 프랑스의 한 박물관에 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반야심경이 좋았다. 한때 김영동 선(禪) 음반에 담긴 반야심경을 많이도 들었다. 예불을 올리며 반야심경을 낭송할 때면 그 소리가 참 좋았다. “아제 아제 바라 아제” 하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은 손에 무엇을 향한 간절함인지는 모르겠으나 늘 간절함이 묻어났다. 이렇게 좋아하며 반야심경을 외우고 낭송을 그리했어도 그 뜻이 뭔지는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뜻은 잘 모르지만 가끔 몇몇 구절이 가슴에 꽂혀서 화두를 지닌듯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내게 반야심경은 하나의 화두 덩어리 같았다.
반야심경의 참뜻은 찾음이 온전히 끝나면서 확연히 드러났다. 그리고 어떤 오해들이 반야심경에 쌓여 있었는지도 같이 드러났다. 이 오해들을 바로잡고 반야심경의 참뜻을 바로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 고스란히 담겼다. 반야심경에 어떤 오해가 있고 그 오해를 넘어 스승이 반야심경을 통해 진정 무엇을 가리키려하는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와 함께 당신이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2장.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
가장 오해가 심한 반야심경의 핵심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실체를 가리키는 깊은 진리의 표현이기에, 세상의 실체가 공함을 바로 보면 모든 어려움을 넘어 그 실체 닿느니라.
반야심경의 핵심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절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아니면 마지막 부분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주문을 떠올린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핵심은 첫 구절이다. 여기서 핵심이란 반야심경이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요약한 글이라고 핵심이라고 말하듯 반야심경을 요약하는 구절을 말한다. 도덕경의 첫 구절이 도덕경 전체의 핵심이듯 반야심경도 처음 나오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가 핵심이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을 또 요약하면 첫 구절 “관자재보살”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핵심은 “관자재보살”이다.
관자재보살, 언어를 넘어서 가리키다.
도대체 “관자재보살”이 뭐길래 반야심경의 핵심일까?
“관자재보살” 다음으로 따라오는 반야심경의 모든 내용은 첫 구절 “관자재보살”을 설명하는 글이라고 보면된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부터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까지가 “관자재보살”을 설명하는 글이고 “무무명”부터 마지막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까지는 사리자로 대표되는 찾는 이가 “관자재보살”이라는 진리의 표현이 가리키는 진리에 직접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용이라고 보면된다. 물론 이런 구분은 설명을 쉽게하기 위함이지 원래 그런 구분이 있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첫 설명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이다. “관자재보살”의 뜻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라는 말이다. 그리고 첫 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의 내용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데, “관세음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가 핵심적인 가리킴이니 이 가리킴이 가리키는 진리에 눈을 뜨기 바라며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고 일러준다. 이렇게 반야심경의 가장 중요한 도입부가 끝난다. 그리고 다음 줄부터 “사리자 색불이공”하며 사리자에게 풀어서 설명을 이어간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반야심경을 오해하지 않는다. 대부분 반야심경 설명이나 해설을 보면 이런 반야심경의 구조를 몰라서 글 전체를 오해한다.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 첫 줄의 한글 번역들을 한번 살펴보면서 어떤 오해가 있는지 살펴본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五薀]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 불교기록문화유산 사이트 에서 가져온 이운허 번역이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반야바라밀다(부처님의 지혜)를 행할 때 오온이 공(불법번역 4대 원칙상 공을 풀어쓰지 않음)한 것을을 비추어 보시고 온갖(일체) 괴로움과 재앙을 건넜다.”
– 위키피디아 사이트에 나온 번역이다.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大)를 행할 때에 5음(陰)이 공함을 비추어 보시고 모든 괴로움과 액난을 건너셨다.”
– 한글대장경 사이트의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에서 가져온 번역이다. 이 부분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는지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이야기로 풀어 쓰인 경전의 다음 부분도 가져와봤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큰 비구 대중들과 보살들과 함께 계셨다. 이때 부처님 세존께서 넓고 크고 매우 깊은 삼매[廣大甚深三昧]에 드셨는데, 그 때 모인 대중 가운데 관자재(觀自在)라 이름하는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있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하여 5온(蘊)이 다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는 모든 괴로움과 재앙에서 벗어났었다. 그러자 즉시 사리불(舍利弗)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합장하고 공손하게 관자재 보살마하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만약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이와 같은 물음을 마치자, 이때 관자재 보살마하살이 구수(具壽) 사리불에게 말했다.
“사리자여,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5온의 자성(自性)이 공함을 관(觀)해야 합니다.”
– 한글대장경 사이트의 ‘반야바라밀다심경’ 경전에서 가져온 번역으로 계빈국(罽賓國) 반야(般若)ㆍ이언(利言) 공역이라 되어있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께서 심원한 반야의 완성을 실천하실 때에 오온[五蘊 : 色(물질),受(감각),想(생각),行(의지),識(인식)]이 다 공(空)이라는 것을 비추어 깨달으시고, 일체의 고액(고통과 재액)을 뛰어넘으셨다.”
– 책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에 나온 도올 김용옥의 번역이다.
“Avalokiteshvara
while practicing deeply with
the Insight that Brings Us to the Other Shore,
suddenly discovered that
all of the five Skandhas are equally empty,
and with this realisation
he overcame all Ill-being.”
– 플럼빌리지 사이트에서 가져온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스님의 영어 번역이다.
현장의 한문 번역을 포함해서 이런 여러 번역에서 잘 드러나는 한 가지 사실은 ‘관자재보살’을 한 사람 또는 한 사람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는 한 인물이 ‘반야바라밀다’라는 어떤 행위를 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세상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궁극의 행복을 얻었다는 말이다.
어떤 설명에서는 관자재보살을 석가모니 부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설명에서는 석가모니 부처 밑에서 깨달은 한 다른 스승이라고 말한다. 또 어디에서는 부처가 되기 전 단계의 깨달음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디에서는 열반에 들기를 잠시 멈추고 모든 중생을 사랑으로 구제하기 위해 힘쓰는 보살로 설명하면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결국 의인화된 한 대상이라는 말이다.
불교 스승들은 불교 가리킴의 핵심을 두 글자로 짧게 불이(不二)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도 이 불이(不二)의 또 다른 표현이다. 위에서 살펴본 반야심경의 첫 구절 해석들은 불이(不二) 가리킴을 오해하는 전형적인 형태다. 불이(不二)는 단순히 “둘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아드바이타(Advaita, अद्वैत वेदान्त)라고 한다. 이 말은 종교나 지역이나 문화를 벗어나서 모든 궁극의 영적 가리킴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아드바이타를 영어로 번역해 난두알리티(Non-Dualty)라고 부르고 이것을 한자로 다시 번역해 비이원성(非二元性)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이원성이란 이원성(둘)을 부정하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세상의 일반적인 생각을 이원성이라고 부른다. 세상 안 모든 것이 이원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것을 부정하며 그렇지 않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비이원성이다. 단순히 “세상의 실체가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불이(不二)의 또 다른 표현이고 반야심경은 대표적인 아드바이타 가리킴이다. 이 “둘이 아니다.”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는 글이 반야심경이다. “둘이 아니다.”라는 이 평범한 말을 바로 이해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오직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이 온전히 끝났을 때 그 뜻이 바르게 환히 드러난다.
그런데 찾음이 끝나지 않은 선생들이나 깊은 이해가 없는 학자들이 번역하고 해설하고 가르치다 보면 늘 내용이 왜곡되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독립된 개체들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이원성의 시각에서 비이원성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많이 이해한다고 생각해도 찾음이 온전히 끝날 때까지는 이렇게 저렇게 오해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이해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로 전달될 수 있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찾는 이가 모든 믿음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뜰 때 어떤 언어나 생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해가 일어난다. 이때 비로서 언어 넘어로 가리키고자 했던 스승의 의도를 알 수 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관자재보살’은 말 그 자체로 “둘이 아니다.”라는 삼세 부처들에게 드러난 지혜를 그대로 담고 있는 말이다. ‘관자재보살’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와 같은 무엇을 가리키지만, 담은 의미와 표현 방식은 조금 다르다. 또한 그 표현 방식이 참으로 예술적이다. 너무나 아름답다. 이 예술적인 아름다운 표현을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서 말해준다. 관자재보살이란 깊은 진리의 표현이란 말이다. “공에서 세상으로 나타나는” 언어로 표현하기 참 힘든 사실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발로키테스바라(अवलोकितेश्वर avalokiteśvara)다. 이것을 한자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로 번역했고 이것을 줄여서 관음보살(觀音菩薩) 또는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음을 관인(Guanyin, Guan Yin)으로 발음하기도 하고 티베트 불교에서는 첸레지(Chenrézik)라고 부른다. 또 그냥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고 많이들 부른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로 시작되는 첫 줄을 이해하려면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에 붙는 수식어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세음보살(관자재보살)을 표현할 때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다.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과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이다. 왜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라는 말이 붙었을까?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를 큰 자비심이라고 해석하며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는 신이라고 해석들 한다. 이 부분도 다시 들여다봐야겠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해석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다 천수천안일까? 천수천안은 천 가지 손과 천 가지 눈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이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수많은 중생들을 도와주어야 되니 천 가지 손과 천 가지 눈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는 신의 역할을 하는 존재일까? 스승이 가리키고자 하는 뜻이 이랬을까? 힘든 삶에서 벗어나고픈 대중의 바람은 일단 옆으로 밀어놓고 진정 스승이 무엇을 가리키고자 하는지 살펴보자.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즉 어떻게 반야바라밀다가 행해지는지를 보여주는 힌트다. 대중에게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설명해 주는 스승들의 해학이다. 사실 이것을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가리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설명할 “오온이 공함”을 당신이 바로 보면 그때 모든 어려움 “일체고액을 넘어” 관자재보살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를 하나의 화두 같은 가리킴으로 남겨두고 “오온이 공함”을 설명해나간다.
간단히 말해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모든 존재의 실체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은 사랑의 참뜻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가리키는데 이 또한 “둘이 아니다.”라는 불이(不二)의 또 다른 표현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 이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다른 모든 설명을 마친 뒤에 마지막 9장 ‘아드바이타’의 ‘찾음이 끝나다’ 글에서 비로소 관세음보살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이렇게 뒷부분에 배치한 까닭은 수많은 편견과 믿음을 먼저 내려놓지 않으면 관세음보살의 의미 바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글에서는 “천수천안”이 어떻게 아드바이타 가리킴을 표현하는지, 또 ‘대자대비’가 어떻게 아드바이타 가리킴이 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절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대웅전에 왜 관세음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 옆에 보현보살과 같이 모셔져 있는지 설명해나간다. 이 설명으로 7장 ‘세상을 살펴보다’에서 살펴본 세상의 실체와 8장 ‘나를 살펴보다’에서 살펴본 ‘나’의 실체를 5장 ‘길’에서 살펴 본 수행의 실체와 엮어낸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에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로, 그리고 대웅전의 삼존불을 거쳐 선(禪) 불교에서 엔소(Ensō)로 표현되는 가리킴을 엮어 ‘둘이 아니다’라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 ‘반야’를 가리킨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을 설명하는 글이다. 사리자로 대표되는 찾는 이가 직접 반야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글이다. 그리고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는 이런 관세음보살을 설명하는 책이다. 책은 관세음보살로 시작해 관세음보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책을 쓰면서 책의 임시 제목을 “나는 관세음보살이다.”로 정했었다. 왜냐하면 나의 찾음이 “나는 관세음보살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끝이 났기 때문이다. 이 선언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깊은 이해로 당신을 안내한다. 책의 앞부분 ‘들어가는 말’부터 시작해서 1장 ‘끝의 시작’ 내내 이 선언을 조금씩 깊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따라오는 책 전체 내용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 이 선언이 궁극적 깨달음이고 찾음의 끝인지 설명하며, 책을 읽으며 찾고 있을 당신도 자신이 관세음보살이라는 변함없는 사실에 직접 눈을 뜨도록 안내한다. 이렇게 ‘일체고액’, 수많은 오해와 편견과 믿음을 넘어서 불이원성(아드바이타)의 앎인 ‘반야’에 눈을 뜨게 한다.
브라흐만도 비슈누도 시바도 둘이 아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의미를 알면 반야심경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쉬운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왜 뜬금없이 관세음보살이 반야심경 앞에 등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반야심경은 도덕경의 구성과 비슷하다. 가장 어려운 핵심을 가장 앞부분에 두고 조금씩 단계를 낮추어 가며 설명해나간다. 비이원성의 핵심을 처음에 놓고 조금씩 이원성으로 내려오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모든 설명은 첫 문장을 찾는 이가 바로 이해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핵심 가리킴이 되는 관세음보살이라는 개념은 어디서 왔을까? 어떻게 해서 이 개념을 시작으로 반야심경의 내용이 이어질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한 번 추측해보면 어떨까.
책에 보면 사진이 딱 한 장 들어가 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이다. 책에는 흑백사진이 들어가 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474쪽.
사진을 보면 관세음보살은 하나의 몸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은 행반야바라밀다의 예술적 표현이다. 그럼 이것이 불교에서 처음 나오는 개념일까? 석가모니가 처음 관세음보살을 언급했을까? 반야심경은 어찌 보면 관세음보살을 설명하는 글이다. 이미 관세음보살이라는 개념이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한 몸에서 여러 손과 눈이 나오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을 보면 이미 고대 인도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힌두교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보인다. 힌두교에서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 Sanskrit: ब्रह्मा)와 세상을 수호하는 신 비슈누(Vishnu, Sanskrit: विष्णु)와 파괴의 신 시바(Shiva, Sanskrit: शिव)를 최고의 3신으로 모신다.
이 신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아래에 위키피디아 사이트에 나와있는 각 신들의 그림과 사진을 모아봤다.
브라흐마 신 (Brahma on his hamsa) 출처: 위키피디아
비슈누 신 (Vishnu surrounded by his Avatars), 출처: 위키피디아
시바 신, Shiva meditating in the Padmasana, 출처: 위키피디아
느껴지는 게 없는가? 힌두교의 3신과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닮아있지 않은가? 종교적 관점을 걷어내고 오직 아드바이타 가리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힌두교의 3신과 관세음보살은 전혀 다르지 않다. 힌두교 문화권에서는 아마 아드바이타를 설명하는 스승들의 가리킴이 이런 3신의 형태로 변해서 전해졌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이라는 가리킴도 불교에서는 신의 형태로 전해진다. 이뿐만 아니라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찾음이 끝나다 (470쪽)’ 글에서 동정녀 마리아와 ‘삼위일체’설을 설명하면서 언급하듯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티베트의 관세음보살 그림. Khanacademy.org에서 가져옴
아마 당시 인도 지역에 찾는 이들은 석가모니라는 스승이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니 찾아와서 궁금한 점들을 물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이미 널리 퍼져있던 브라흐마와 비슈누와 시바에 관한 여러 질문을 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스승에게 와서 질문하는 찾는 이들은 그때 널리 퍼져있는 가르침들과 사상들을 공부하고 와서 물었을 것이고, 늘 그렇듯 스승은 찾는 이가 집착하고 있는 편견과 거짓 믿음을 가리키며 설명했을 것이다.
석가모니는 3명의 신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찾는 이들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석가모니는 이 3신들을 하나로 묶어 아발로키테스바라(अवलोकितेश्वर, Avalokiteshvara)라는 개념으로 찾는 이의 편견을 깨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반야의 가리킴으로 안내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석가모니는 이 개념을 자주 사용하면서 찾는 이들을 안내하다 보니 아발로키테스바라에 관한 다양한 가리킴이 전해졌을 것이고 나중에 자연히 제자들이 스승의 가리킴을 정리해서 경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전이 정제되어 반야심경이 되지 않았나 싶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이 첫 두 구절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이 부분이 핵심이기 때문이고 또 여기 너무 많은 오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여전히 남아있는 중요한 오해를 풀기 위해 이야기를 조금 더 끌고가야 겠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4장은 ‘가리킴’이다. 책을 읽지 않고 이 글을 처음 읽는 분은 “가르침”이라고 보통 하는 데 여기서는 왜 자꾸 ‘가리킴’이라고 하는지 의아할지 모르겠다. 책에서는 ‘가르침’ 대신 ‘가리킴’이라고 쓴다. 가르침은 배워서 알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친다면 가리킴은 당신이 직접 가서 보라고 알려주는 방향 표지판 같은 의미다. 그리고 모든 영적 스승의 말은 가르침이 아니라 가리킴이다. 물론 이 사실을 잘 알면 ‘가르침’이라 하든 ‘가리킴’이라 하든 전혀 문제없다. 늘 그렇듯 말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으랴.
4장 ‘가리킴’에서는 이 가리킴의 본질을 깊이 살펴본다. 이 부분을 바로 알아야 오해가 없다. 스승의 가리킴에 대한 대부분의 오해는 가리킴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온다. 그리고 가리킴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반야심경의 핵심을 놓친다. 세상이 반야심경 첫 두 구절을 해석하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이 너무나 잘 드러난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진리의 표현이지만 이것도 하나의 가리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글과 책에서 “관세음보살”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듯 보이나 사실 관세음보살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이 아니다.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관세음보살이 가리키는 무엇은 말로 설명해서 알아듣고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책의 설명도, 반야심경도 그저 사리자가 직접 보고 일체고액을 넘어가도록 안내하는 하나의 가리킴일 뿐이다
가리킴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경전에 대한 오해가 없다. 반야심경에 대한 오해가 없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에 대한 오해가 없다. 관세음보살의 정확한 의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하반야바라밀다”다.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우리의 논리로, 생각으로 담아낼 수 없다. 세상의 어떤 무엇도 이것을 담아낼 수 없다. 세상 전체가 나오는 그 근원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은 깊은 진리를 가리키는 가리킴이다. 하나의 큰 화두다. 섣불리 그 뜻을 이해했다고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해했다고 하는 순간 화두는 사라진다. 좋은 스승의 가리킴을 잃는다. 모름은 모름에 두어야 한다.
가슴에 화두라는 씨앗을 품고
간절함이라는 물을 주면
언젠가 앎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책 4장 ‘가리킴’에서 말하듯 어쩔 수 없이 스승은 말로 가리켜야 한다. 대부분의 찾는 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이 이어진다.
照見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
오온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 모든 존재가 공하다고 말한다. 이 사실에 눈을 뜨면 일체고액으로 표현되는 찾는 이의 모든 믿음을 넘어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가리킴이 가리키는 궁극의 진리에 닿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둘째줄부터는 이 “오온이 공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찾는 이에게 설명한다.
度一切苦厄
도일체고액
“일체고액”의 뜻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책 3장 ‘찾음’의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3장 ‘찾음’에서는 찾음의 본질을 살펴본다.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찾는지 계속해서 물어본다. 찾음에 깃든 자신의 편견과 믿음을 바로 보게 안내한다.
반야심경은 종교적 내용이 아니다. 사리자로 대표되는 진리를 찾는 이에게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가리킴이다. 석가모니는 종교를 만들지 않았다. 반대로 기존 종교와 사상에 물들어 있는 편견과 잘못된 믿음을 가리키며 종교적 믿음을 극복하도록 도왔다. 그런데 불교는 종교다. 종교는 대중의 바람의 표현을 담는다. 그러하기에 또 대중의 바람에 부흥해야 한다. “도일체고액”의 번역에서 이런 종교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반야심경을 번역한 스님 현장은 종교인이다. 또 위에서 언급한 번역들은 다 대중적인 번역이다. 대중의 바람을 담는다. 대중의 가장 큰 바람이 뭘까? 여기서 나타나는 바로는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안 그럴까. 그래서 현장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번역이 “괴로움과 재앙”을 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만, 틱낫한의 번역 만은 이런 대중의 믿음을 넘어서 있다.
“도일체고액”을 바로 이해하려면 찾음과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혼란을 극복해야 한다. 여기에 도움이 되게 5장 ‘길’ 마지막 부분에 ‘종교는 달을 가리키지 않는다’라는 글을 넣었다. 나도 그랬고 스승 로버트 울프와 나탈리 그레이도 그랬듯이 많은 찾는 이가 익숙한 종교에서 찾음을 시작한다. 그리고 종교의 편견을 극복한다. 대중의 바람과 ‘내’가 원하는 바람을 넘어서야 스승이 가리키는 달을 볼 수 있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로 표현되는 진리를 가리킨다. 핵심은 “둘이 아니다.”라는 비이원성이다. 아드바이타다. 세상을 넘어 세상의 근원을 가리킨다. 그런데 “괴로움과 재앙을 건너는 일”은 이원성의 해석이다. 극복해야 할 대상과 극복하는 ‘나’로 구분하는 이원성이다. 세상 안의 일이다. 이것은 석가모니와 같은 아드바이타 스승이 가리키는 바가 아니라, 반대로 정확히 극복해야 할 믿음이다. 이 믿음을 극복하지 않으면 ‘반야심경’이라는 배는 표류한다.
당신이 경배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스승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씌운 자신의 믿음인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3장 ‘찾음’, ‘마음의 평화를 찾는가’에서
3장. 아드바이타
공하다는 뜻을 설명한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기에 물질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동과 의식도 그러하니라.
이제부터 사리자에게 ‘오온개공’의 뜻을 설명해 나간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 말하고 이 말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조금 다르게 반복했다.
먼저 ‘오온(五蘊)’가운데 ‘색(色)’으로 표현되는 사물부터 이야기한다. 색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일컫는다. 컴퓨터, 책상, 집, 유리, 나무, 산과 바다, 공기와 하늘, 동물, 사람들, 모든 생명들, 해와 달, 별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단단한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공하다’는 뜻이 뭘까? 보통 ‘텅 비어있다.’라고 해석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공하다는 뜻을 담기에는 부족하다. 그냥 “아무것도 없다.(영어로 Nothing)”라거나 진공(Vaccume)이라는 뜻이 아니다. 공하다는 말은 우리가 가진 사물에 대한 편견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사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개체다. 우리의 경험상 분명히 맞는 말이다. 이렇게 경험이 안 되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으로 기능할 수 없다. 반야심경은 이 경험의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 독립된 개체로 경험되는 ‘색’의 실체가 뭐냐는 거다. 독립된 개체로 경험되지만 그 실체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이러한 까닭에 한글 번역에서 “텅 비어있다”가나 “아무것도 없다”와 같은 말을 쓰는 대신 한자어에서 비롯된 “공하다”는 말을 그래로 쓴다. “공하다”는 한글 사전에 있는 말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를 쓸 때나 이런 글을 쓸 때 가급적이면 쉬운 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가급적이면 대부분의 사람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쓰려 노력한다. 가급적이면 쉬운 말, 뜻이 모호한 한자어가 아닌 한글을 쓰려 노력한다. 그런데 외래어나 한자어를 써야 할 때가 있는데, ‘아드바이타’나 ‘비이원성’처럼 찾는 이들이 전통적으로 쓰는 말을 써야 할 때가 그렇다. 이렇게 낯설어 보이는 말은 “둘이 아니다.”처럼 꼭 먼저 쉬운 말로 풀이해서 그 뜻을 먼저 알리려 노력한다. 쉬운 말이라도 그 뜻을 좀 더 정확히 하기 위해서 용어를 정의하기도 한다. 그래서 책에서는 ‘용어 정리’ 글에서 책에서 쓰는 몇 가지 용어들의 뜻을 명확히 정의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부분은 책의 7장 ‘세상을 살펴보다’에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색으로 나타나는 물질의 실체가 뭔지, 왜 “물질의 실체가 공하다.”라고 말하는지를 여러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먼저 첫 글 ‘실재와 개념’에서 ‘실재’, 즉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또 “실재가 아니라 개념이다.”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깊이 살펴본다. 왜냐하면 “공하다”는 말은 곧 “실재가 아니라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재와 개념’은 ‘공하다’의 뜻을 설명하는 글이다. 이렇게 먼저 ‘공하다’는 말의 뜻을 살피고, 왜 색이 공이고 왜 공이 곧 색인지를 설명해 나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하는 데 양자역학만 한 것이 없다싶어 글 ‘양자역학에서 얻는 화두’에서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을 통해서 색즉시공을 설명했다. 어쩌다 이 글이 너무 길어졌다. 양자역학의 내용 자체가 세상이 공함을 설명하는 데 중요하기에 첫 부분에 양자역학을 요약하는 부분이 길게 들어가서 그렇다. 물론 과학적으로 체계적인 글은 전혀 아니다. 왜 색이 공인지, 왜 공이 지금 이 순간 색인지를 아는 데 필요한 내용만 찾음의 관점에서 정리했다. 그리고 양자현상의 과학적 해석이 아닌 아드바이타의 관점에서 해석해서 글을 이어 갔다. 양자역학의 아드바이타적 해석이다.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을 지나서 ‘에너지와 움직임’ 글에서는 조금 다르게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한다. 양자역학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과학에서 물질의 가장 기본을 설명할 때 언급하는 에너지의 실체가 뭔지 살피며 왜 ‘색불이공 공불이색’, 물질과 공이 다르지 않는지 깊이 들여다본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색의 실체가 공인 것처럼 세상을 이루는 다섯 가지(오온) 가운데 나머지 ‘수상행식’도 실체가 공하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수상행식’이 가리키는 바는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이다. 오온이 공하다며 세상의 실체가 공하다 했더니 찾는 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세상에서 ‘나’만 쏙 빼고 공함을 받아들인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스승은 곧바로 “너도 마찬가지로 공하니라.”라고 가리킨다.
‘색’을 먼저 말하고 ‘수상행식’을 말하는 구성이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 세상을 먼저 살펴보고 ‘나’를 살펴보는 구성과 다르지 않다. 7장 ‘세상을 살펴보다’에서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면 8장 ‘나를 살펴보다’에서는 ‘수상행식’인 ‘나’의 실체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스승 발라의 이야기다. 한 번은 귀에 이어폰을 꼽고 스승 웨인의 삿상을 들으면서 바닥 페인팅을 하고 있었다 한다. 집중해서 페인팅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자신이 구석에 몰려 있었다. 바닥의 모든 부분을 다 칠했는데 자기가 서 있는 곳만 칠이 안 되어있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칠을 마무리할 수 없다. 그때 문득 이 상황이 진리를 찾고 있는 자기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한다.
세상 모두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도 한 가지가 남는다. 세상을 보는 ‘나’다. 그럼 이 ‘나’는 무엇일까? 반야심경은 “수상행식 역부역시”라며 분명히 답한다. 이 글을 보는 당신의 실체는 공하다고.
스승은 이미 답했다.
문제는 이 답을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느냐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공하기에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느니라.
색도 공하고 수상행식도 공하다. 그리고 또 색과 수상행식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도 공하다고 말한다.
是諸法空相
시제법공상
‘색’과 ‘수상행식’도 공하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오온이 공하다는 말의 뜻에서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색’과 ‘수상행식’의 상호작용인 법이다.
‘시제법’은 세상의 모든 법을 말한다. 그런데 이 법이 뭘까? 이 법은 오온인 ‘색수상행식’들 간의 작용이다. 이 작용 또한 공함을 말해야 오온이 공하다는 뜻을 온전히 설명한다.
물건을 떨어뜨리면 땅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여기에 만유인력인 중력이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중력 방정식으로 그 양을 정확히 측정할 수도 있다. 이 대단한 정확도 때문에 GPS 기능으로 오늘도 우리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분명히 이런 법칙에 뭔가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으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반대하면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우리는 이런 법칙에 실체가 있다는 믿음으로 신을 상상한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정말 매정하게도 어떤 믿음의 여지도 주지 않는다. 이런 법칙 또한 공하다 선언한다.
이런 법칙을 바로 번역하면 현상이다. 법칙은 어떤 정해진 무엇이 있다는 믿음이 깔린 말이기에 법칙이 아니라 ‘현상’이라는 말을 쓴다. 현상은 겉으로 경험되어 인지되는 정보다. 이 말은 수상행식이 공함과 통하는 내용이다. 또 이 말은 현상을 일으키는 색이 공하기에 당연히 그 현상도 실체가 없기에 공하다. 그래서 색이 공하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래서 모두가 공하다. 이에 대한 설명은 반야심경의 다음 줄부터 좀 더 자세하게 나온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7장 ‘세상을 살펴보다’ 가운데 ‘양자역학에서 얻는 화두 (327쪽)’ 와 ‘에너지와 움직임 (356쪽)’에서 모든 현상이 공함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에너지와 움직임’에서 말하는 움직임이 곧 현상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바로 보는 시점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상행식이라는 ‘나’의 시점이 공하면 움직임 또한 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공간은 개념이다 (365쪽)’ 글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공함을 살펴본다. 공간이 실체가 없으면 색이든 색들 간의 상호작용이든 다 실체가 없어진다. 공간의 공함을 살펴서 오온의 공함을 살펴본다.
그런데 양자역학이나 움직임이나 공간의 공함을 통한 설명 보다 현상의 공함을 설명하는 데는 꿈의 비유만 한 것이 없다. 이 꿈의 비유를 ‘꿈과 현실 (372쪽)’ 글에서 깊이 살핀다. 꿈을 통해 현상의 공함을 살피는 것은 과학이 없던 오래전부터 아드바이타 스승들이 즐겨 쓰던 가리킴이다.
다음 내용은 ‘꿈과 현실’에서 가져왔다.
영적 스승은 꿈으로 힘의 실체를 설명한다. 꿈에서 내가 돌을 던져 창문을 깼다. 물리학자들은 창문이 깨진 원인을 돌과 돌의 운동량으로 설명할 것이다. 꿈에서 창문이 깨지는 원인은 돌과 전혀 상관없다. 창문이 깨지는 현상에 영향을 주는 힘의 본질은 꿈 그 자체다. 돌을 던지는 나도 꿈이요, 돌도 꿈이요, 창문도 꿈이요, 돌이 날아가는 현상도, 창문이 깨지는 현상도 다 꿈이다. ‘무엇’에 영향을 주는 ‘무엇’은 없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영향을 준다는 설명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돌이 창문을 깼다”라는 말은 꿈이 나타내는 이야기지 원인과 결과의 실체가 아니다. 모든 영향의 본질은 꿈 그 자체다.
돌을 던져 창문이 깨지는 꿈의 비유는 안내자 마띠아스가 안내하면서 나에게 들려준 가리킴이다. 색과 수상행식과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 보이는 현상이 모두 다 공함을 너무도 잘 나타낸다. 문제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그 세상을 바로 보는 자신이 꿈과 같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냐는 거다. 결국 다시 내 믿음의 문제다. 가만히 살펴보라. 참으로 많은 믿음이 보일 것이다. ‘일체고액’이 보일 것이다.
꿈의 내용이 아니라 꿈의 실체를 알려 한다.
지금 여기 실재하는 실체를 찾는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꿈과 현실’에서 가져옴
不生不滅
불생불멸
공하다는 의미를 바로 알면 너무나 당연히 새로 나타나는 것도 없고 새로 나타나는 것이 없기에 사라질 것도 없다. 꿈속의 내용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 그런데 꿈속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그러니 태어나고 죽는 모든 꿈속의 현상은 당연히 실체가 없다.
不垢不淨
불구부정
꿈 안에서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있지만 꿈속 모든 것이 공하기에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다 실체가 없다. 모든 현상이 공하면 이렇게 깨끗하고 더럽게 보이는 하나의 가치도 다 공한 것은 당연하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도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시점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가치다. 우리는 정해진 깨끗함과 더러움이 있다고 믿는다. 선과 악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정의와 부정에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지금도 이런 실체를 찾아 수많은 논문이 쏟아진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것 없다고 선언한다. 정해진 가치는 없다. 이것이 가치의 본질이다. 상대적 세상의 본질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는 가치의 본질을 살펴보면서 본격적인 가리킴을 시작한다. 2장 ‘찾음의 시작’의 첫 글 ‘누가 좋다, 나쁘다 하는가?’는 이 가치의 본질을 살펴보는 글이다. 가치의 본질은 6장 ‘단서’ 가운데 ‘행복, 있으라하니 있다’에서 다시 살펴본다.
不增不減
부증불감
현상이 공하니 늘어나는 현상도 줄어드는 현상도 다 공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에너지 보존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이 공하기에 에너지 보존법칙이라는 현상도 공하다. 다 꿈속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찾는 이 가운데 깊은 이해가 있는 이들은 이것으로 설명이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몇몇은 여전히 의문을 품는다. 여전히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런데..”라고 돌아와 스승에게 묻는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좀 더 쉽고 자세히 예를 들어 설명해야 한다.
반야심경의 다음부터 오는 “시고 공중무색”부터 “무의식계”까지의 내용은 “색과 수상행식과 법이 공하다.”라는 앞 두 줄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다.
是故 空中無色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무수상행식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렇게 공하기에 물질도 실체가 따로 없고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느니라.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으며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현상도 실체가 따로 없기에 본다는 것과 본 것을 의식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느니라.
‘시고(是故)’, “그러하기에”라며 앞의 두 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데, 색과 수상행식의 관계를 말한다. 우리는 색과 수상행식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 즉, 세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나로 나눈다.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경험상 이 말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나와 너, 나아가 모든 사물에 어떤 경계도 없고 어떤 구분도 없으며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생활하는 데 나와 물건의 경계가 사라지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기능을 잃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석가모니를 비롯해서 삼세 부처들이 이런 기능을 잃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면 도대체 반야심경에서 하는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 말을 바로 이해하려면 ‘무(無)’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無
무
여기서 ‘무’는 그냥 없다가 아니라 실체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체가 따로 없다는 말은 이것들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둘이 아니다’라고 표현한다. 사실 이 말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하나를 바로 이해하면 모두가 다 풀린다. ‘공’의 의미도 나아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의 의미도 다 드러난다. 모든 의미가 확연히 다 드러나지 않으면 여전히 모름의 자세에 있어야 한다. 섣불리 답을 내면 진정한 답이 드러날 기회가 사라진다. 사실 찾음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뭔가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얻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미 있는 믿음들을 내려놓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때문에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말이 나온다. 이 때문에 선심초심(禪心初心), “초심자의 마음으로 찾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는 ‘내려놓기 게임과 받아들임의 예술’ (161 쪽) 글과 ‘의문 아래 믿음을 가리키다’ (206쪽), ‘믿음을 거슬러 (313쪽)’ 글에서 이 부분을 깊이 살핀다.
잊지 말라.
깨달음의 과정은 얻는 과정이 아니라
내려놓는 과정이다.
실체가 따로 없다는 가리킴을 이해하려면, ‘실재와 개념’ (323 쪽)의 차이와 ‘존재의 뜻’ (380 쪽)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면 책 전반을 통해서 말하는 “실체가 따로 없다.”라는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쓰는 ‘무’의 뜻을 바로 알 수 있다.
空中無色無受想行識
공중무색무수상행식
이 말은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와 같은 말이다. ‘공하다’는 말을 설명한다. 공하다는 말은 색도 따로 없고 수상행식도 따로 없다는 말이다. 분명히 여기 뭔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며 믿고 있듯 색과 수상행식이 따로 있지 않다는 말이다. 사물과 사물을 감각으로 받아들여 해석하며 인식하는 이 과정 자체가 공하다는 말이다. ‘과정’이라고 부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독립된 사물(색, 色)이 따로 있고 사물에서 나오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수, 受)’이 따로 있고 감각 기관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해석하는 인식(상, 想)이 따로 있고, 이 인식의 움직임인 생각(행, 行)이 따로 있고, 이 생각을 하는 의식(식, 識)이 따로 있어야만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이렇게 따로 독립적으로 있지 않다는 말을 한다. 수상행식(受想行識)을 감각(수, 受), 인식(상, 想), 생각(행, 行), 의식(식, 識)으로 번역하며 설명했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수상행식을 하나로 보는 게 좀 더 낫다. 과학에서 나누어 설명하지만 실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과학에서도 깊이깊이 들여다보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감각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인식이고, 생각이고 의식인지 구분이 없다. 그저 과학이라는 학문을 하기 위해서 구분할 뿐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실체에는 어떤 구분도 없다. 이런 구분이 없다고 반야심경은 계속해서 무(無)를 외친다.
그리고 “수상행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말 따로 떨어져 있다고 굳게 믿으며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사물(색, 色) 또한 “수상행식”과 구분이 없다고 반야심경은 선언한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도대체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 말을 무시하지 못한다. 물질과 물질이 눈에 보이는 과정을 연구하다 보면 큰 벽에 부딪친다. 물질과 빛이나 소리의 파장과 이것이 인식되는 과정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도대체 물질이 뭔지 빛이 뭔지 소리가 뭔지 또 물질을 인식한다는 것이 뭔지 계속해서 물음표만 받아든다.
여기에 속 시원히 반야심경은 어디에도 “색수상행식” 각각 사이에 어떤 구분도 없다고 단언한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에 구분이 있고 하루하루 생활하는 우리에게는 당연히 구분을 해야 살아가지만, 깊이깊이 존재의 바닥을 들여다보면, 마하반야바라밀다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살펴보면, 어디에도 구분이 없고 우리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심지어 ‘나’를 포함해서 실체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분명히 여기 존재가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존재가 있다. 실체가 있다. 실체는 이뿐이라고 반야심경은 가리키는데, 이 모두의 실체는 오직 관자재보살이며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관자재보살의 작용(행심반야바라밀다) 일뿐이라는 거다.
이해가 깊은 찾는 이는 이미 “아하!”하고 무릎을 탁 쳤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에게는 경천동지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무슨 세상의 종말 같은 소리냐고 따질지 모른다. 그렇다. 당신이 아는 세상과 ‘나’의 종말이다. 이 종말로 반야심경은 이끈다. 그래서 진정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앞의 내용 “공중무색무수상행식”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한다.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따로 있다고 믿는 감각 기관들과 두뇌인 “안이비설신의”가 사실은 실체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사물을 인식하게끔 정보를 전달해 주는 매개체인 “색성향미촉법”도 실체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물이 인식될 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하나하나의 과정에 어떤 경계도 없다고 말한다. 과정을 구분하는 “안의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도 따로 실체가 없으니 과정 자체에도 경계가 있을 수 없다. 결국 “오온개공”부터 모두가 공함을 점차적으로 상세히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물체를 경험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또 맛보고 만져보며 물체를 인식하고 그 물체가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로 존재한다고 믿고 이렇게 인식하는 ‘나’도 하나의 개체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물체와 관련된 정해진 색깔이 있고 소리가 있고 향기가 있고 맛이 있고 감촉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나’라는 독립된 개체가 저 물건이라는 독립된 개체를 본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으로 색깔을 포함한 시각 정보를 물체에 반사되는 빛을 통해서 얻고 이 정보를 시신경이 두뇌로 전달해서 두뇌가 그 정보를 경험에 비추어 해석해서 형상을 그려내고 우리 안에 있는 의식이 이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그 물체를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들은 과학자들이 알려준 대로 본다는 현상을 이해하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 우리가 사회생활하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사실일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다. 정말 정말 깊이깊이 진실로 ‘마하반야바라밀다’라는 진실의 바닥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것이 사실일까?”라고 묻는다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분명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답한다.
반야심경은 물체가 공하다고 말한다. 실체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나아가 이 물체를 경험하는 감각들의 실체도 따로 없다고 말한다. 감각도 따로 없고 우리 감각으로 경험하며 실체가 있다고 믿는 물체의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이 모두 실체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본다는 현상들도 실체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반야심경이 어려운지는 알았지만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일까?” 싶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정말 헛소리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찾는 이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사실이다. 이해가 깊어 갈수록 내가 알던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 관세음보살은 시바 신으로 나타나서 당신의 세상을 철저히 부수어버린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당신이 알아오던 상식과 그 내용이 너무나 달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7장 ‘세상을 살펴보다’와 8장 ‘나를 살펴보다’에서 이 부분을 공을 들여 설명한다.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해야 아드바이타를 가리키는 반야심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책 7장 ‘세상을 살펴보다’의 마지막 글에 ‘존재의 뜻’이 있다. 이렇게 자꾸 실체가 따로 없다고 하니 ‘존재’의 의미 자체가 흔들린다. 앞에 있는 사과를 보고 인식하며 사과가 당연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과는 분명히 실체가 있어보인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사과(색, 色)도 사과를 인식하는 ‘나'(수상행식, 受想行識)도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사과의 실체가 따로 없다니. 그럼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도대체 존재가 뭐란 말인가?” 의문이 든다. 이 의문을 ‘존재의 뜻’에서 살펴본다. 정말 “안이비설빈의”가 존재하는지 “색성향미촉법’이 존재하는지 ‘안’과 ‘의식’사이에 경계가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의미를 살펴본다.
진정으로 마하반야바라밀다의 수준에서 “존재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서 어떻게 ‘색’도 따로 없고 “안의비설신의”도 따로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따로 없고 이들이 따로 없기에 이들 사이에 어떤 경계도 없는지 당신이 직접 살펴보도록 안내한다.
책 8장 ‘나를 살펴보다’에서 어떻게 사물이 공한지를 ‘수상행식’의 측면에서 ‘인식’이라는 이름으로 깊이 살펴본다. 세상을 보는 ‘나(수상행식)’가 정말 실체가 따로 있는지 깊이 살펴본다. 도대체 우리가 “‘나’는 무엇무엇이다.”라고 생각하는 어떤 믿음이 있길래 반야심경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힘든지 ‘숨어있는 가정 ‘나”와 ‘나에 대한 믿음’, 두 글에서 당신이 직접 살펴보도록 안내한다.
‘수상행식’ 또는 ‘의식’과 같은 뜻으로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마음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마음이 결국 육체를 지나 독립된 ‘나’가 있다고 믿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우리가 실체가 있다고 믿는 이 마음이 정말 실체가 있는지 살펴보는 글이 8장 가운데 ‘마음’ 글이다.
그리고 따라오는 ‘인식’ (424쪽) 글에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와 가장 관련이 깊은 내용을 살펴보는데, 감각과 생각과 인식에 구분이 있는지 깊이 살핀다.
이런 내용이 받아들여지기는 참 쉽지 않다. 아무리 받아들이고 이해해도 결국 하나는 남겨둔다. ‘나’다. “안이비설신의”든, “색성향미촉법”이든, “안계”든, “무의식계”든, “색”이든, “수상행식”이든 이들이 다 공하다는 것을 받아들여도, 세상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갈아엎어도, 엄청난 수준의 깨우침이 일어나도 여전히 ‘공’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지막 장벽이 ‘나’다.
“안이비설신의”가 실체가 따로 없음을 알고 “색성향미촉법”의 실체가 따로 없음을 알고 어디에도 경계가 없음을 알고 오직 ‘참인식’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도, 여전히 “‘내’가 인식한다.”라는 믿음은 다시 돌아온다. “내가 관세음보살이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고 반야심경을 다 이해해도 결국 “‘내’가 관세음보살이다.”로 돌아온다. 이때는 ‘나’라는 실체는 따로 없어 공하고 오직 관세음보살만 있다는 “나는 관세음보살이다.”의 뜻이 아니다. “‘나’라는 독립된 이 실체가 세상 대단한 저 관세음보살이다.”라는 뜻으로 바뀌어 있다. 스승의 가리킴을 정반대로 뒤집어버렸다. 이 부분이 ‘고액(苦厄)’의 핵심이다. 가장 큰 어려움이다. 찾는 이가 이 어려움을 건너가도록 책 8장에 ‘인식하는가, 인식되는가?’라는 글을 넣어 깊이 살피고 9장 ‘아드바이타’에서 ‘깨우침, 끝나지 않는 여정’, ‘알았다, 놓였다’ 글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어려움의 바다를 건너갈 도구를 제공한다.
관세음보살을 만나려면 오온이 공함을 알아야 한다. 모두가 공함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일체고액을 넘어 관세음보살을 만난다. 모두는 말 그대로 모두 다. 어떤 예외도 없다. 정말로 말 그대로 어떤 예외도 없다.
결국 모두가 따로 실체가 없다는 말을 스승들은 간단히 “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아드바이타’다. 그래서 책 마지막 장이 ‘아드바이타’다.
진실로 진실로 진실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존재하는 것이 뭘까?
7장 세상을 살펴보다 가운데 ‘존재의 뜻’에서
여기까지가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이다. 이렇게 설명했다고 몇이나 알아들을까. 몇이나 이해를 할까. 몇이나 이해를 넘어 진리에 눈을 뜰까. 스승은 이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찾는 이가 찾음의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글을이어간다. 반야심경의 다음 글부터 끝까지는 이렇게 찾는 이가 이해하며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내용이다.
4장. 찾음의 본질
‘누가 무엇을 찾는다’가 아니다. 그저 찾음이다.
두 번째 줄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으로 시작해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첫째 줄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둘이 아니라는 반야바라밀다의 핵심을 설명한다. 즉 ‘공’하다는 말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번째 줄부터는, 그런 반야를 찾고 있는 찾는 이에게 드리운 여러 믿음을 지적하며 찾는 이를 바른 찾음으로 안내한다.
이 부분을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는 찾음의 본질과 길의 본질로 설명하는 데, 3장 ‘찾음’과 5장 ‘길’의 내용이 반야심경의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런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심지어 늙고 죽는 것이 없기에 늙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느니라.
공을 설명하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할까? 좀 뜬금없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이 말을 하는 까닭은 찾는 이에게 찾음의 본질을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찾음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이전 줄까지 설명한 아드바이타 가리킴인 반야바라밀다를 바로 이해해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에 직접 눈을 뜰 수가 있기 때문이다.
책 3장 ‘찾음’에서는 찾음의 본질을 깊이 이야기한다. 찾음의 본질을 바로 알려주기 위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찾음에 대한 거짓 믿음을 가리킨다.
無明
무명
찾는 이는 깨달음을 얻어서 괴로움이 넘치는 이 세상을 벗어나 윤회를 멈추고 마음의 평화가 가득한 극락에서 영원히 사는 열반을 꿈꾼다. 이런 세상 최고의 목표인 열반을 내가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믿음으로 명상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면서 깊이 공부해서 반야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무명을 없애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온갖 안 좋은 것들을 무명의 뜻에 갖다 붙인다. 그리고 이 무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대단한 불교의 가르침으로 말이다. 부처가 아니면 다 무명에 빠져 있는 중생이다. 중생은 무명에 빠져있기에 수준이 낮다.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윤회를 계속하며 온갖 고통을 받아야 한다. 사람으로 계속 산다는 보장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온갖 무서운 지옥에 빠져 말도 안 되게 오랜 세월을 상상도 못할 고통을 받아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렇게 중생은 벗어나야 할 상태이고 구제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부처나 보살 같은 신과 같은 존재가 이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해야 한다. 또한 중생들은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처와 보살과 그들의 가르침을 전하거나 매개하는 승려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이 사실일까?
반야심경은 여기에 명확히 답한다. “무무명 역무무명진”이라고. 심지어 “무노사 역무노사진”이라고 선언한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석가모니가 살아서 법을 설하고 있을 당시에도 찾아오는 수많은 찾는 이들이 “뭔가 얻을 것이 없을까”하는 믿음을 가지고 와서 물었을 것이다. 요즘도 스승의 삿상에 앉아 있으면 찾아와 묻는 사람들 대부분이 ‘뭔가를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를 스승에게 묻는다. 석가모니는 너무도 명확하고 칼같이 이 믿음에 답했을 것이다. “이런 거 알아서 네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이 답이 반야심경에 잘 정리되어 있다.
반야심경은 말한다. 반야라는 지혜를 모르는 세상 모든 중생들과 동물들과 식물들과 광물들과 다른 모든 물질까지도 이 지혜를 모른다고 해서 다를 것 하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무무명’의 뜻이다.
반대로 반야의 지혜에 눈을 환희 떠 부처가 되어도 다를 것 하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역무무명진”의 뜻이다.
이미 있는 그대로인데 뭐 바뀔 게 있겠는가? 이미 있는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뿐이다. 뭔가를 깨달아 뭔가를 얻고자 하는 찾는 이들에게 석가모니는 지혜를 모른다고 문제 될 것도,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고 말하며 찾는 이에게 자신의 환상을 바로 보라고 가리킨다.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스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음으로 열반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말한다. “늙어 죽는다는 게 없기에 늙어 죽는 것을 벗어나는 열반 같은 것도 없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여기 어디 “환생”과 “열반”의 믿음을 갖다 붙일 수가 있겠는가. 여기 어디 “중생”과 ‘지옥’의 믿음을 갖다 붙일 수 있겠는가.
모두 다 없다고 말하는 데 무엇이 있어 환생하고 무엇이 무엇에서 벗어나서 열반을 얻겠는가. 없다 없다 없다, 공하다 공하다 공하다 하는 데 어디서 이런 믿음들을 스승의 가리킴에 갖다 붙일 수 있겠는가.
반야심경을 매일 독송하면서 이런 믿음을 두 손에 모아 바라고 있는 이들은 부디 자신의 믿음을 바로보기 바란다. 반야심경의 깊은 뜻을 어려운 말 뒤에 감춰 자신의 믿음을 키우지 말고 스승의 뜻을 바로보기 바란다. 반야심경에 나타나는 스승의 가리킴은 너무나 간결하다.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다. 전혀 어렵지 않다. 그저 그 가리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믿음이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있는 그대로 당연하고 괜찮다. “무무명 역무무명진”이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부분과 정확히 같은 뜻이 책에 있다. 1장 ‘끝의 시작’ 가운데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글에서 가져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이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성령이며 부처이며 참인식이며 관세음보살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바닷속의 물방울은 다 바다다. 바닷속, 독립된 물방울은 없다. 그래서 모두가 절대 평등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실체는 둘로 구분되지 않기에 평등하고 말고도 없다. 그래서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의 차이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해서 원래부터 깨닫지 못한 이는 없다. 깨달은 이도 없다. 깨달음도 없다. 겉으로 보이는 유일한 차이는 이 사실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만 있을 뿐이다. 몰라도 신경 쓰지 않는 이와 알고 싶어 하는 이만 있을 뿐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42쪽
“무노사 역무노사진” 부분을 이해하는 데 책 6장 ‘단서’ 가운데 ‘업과 환생하는 영혼’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찾는 이에게서 드러나는 업과 환생과 영혼에 관한 믿음을 바로 보도록 돕는다.
無苦集滅道
무고집멸도
괴로움은 실체가 없기에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실체가 없느니라.
찾는 이의 환상을 가리키는 스승의 노력은 계속된다.
영적 수행을 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마음의 평화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공부를 한다.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행복이다. 마음의 평화나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괴로움이 없기를 바라고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 사라지게 하고 싶어서 사람들은 스승에게 와서 그 방법을 묻는다. 스승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니르바나(Nirvana, Sanskrit: निर्वाण, 열반, 해탈)라고 불리는 거창한 절대 평온의 상태에 있다고 믿고 묻는다. 이것은 괴로운 것이 싫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하지만 스승은 위로는 할 수 있을지언정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믿음을 붙들고 있으면 결코 있는 그대로의 반야를 볼 수 없기에 스승은 매정하게 믿음의 심장을 가리킨다. 이런 믿음을 도려내는 일은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이 따른다. 어찌 영원한 마음의 평화라는 달콤한 목표를 내려놓을까.
그래도 몇몇은 영원한 행복을 내려놓고서라도,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내려놓고서라도 나아가길 바란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너무 궁금해서 미치는 이들이 간혹 있다. 스승은 이들이 이 믿음의 장애를 극복하고 나아가도록 돕는다. 이런 “일체고액”을 넘어서 “오온개공”을 바로 보게 돕는다.
스승은 말한다. 어떤 괴로움도 실체가 없다고. 그러니 어찌 괴로움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있을까. 실체가 없는데 어찌 사라질 것이 있을까. 사라질 실체가 없는데 어찌 사라지게 할 방법이 있을까.
이 사실을 바로 알려면 찾는 이는 자신의 믿음을 바로 봐야 한다. 믿음이 거짓이라 증명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믿음이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믿음을 내려놓는다고 말한다. 믿음에 관해서 책 3장 ‘찾음’, ‘내려놓기 게임과 받아들임의 예술’ 글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방법을 찾는 이들의 믿음을 가리키기 위해 책 3장 ‘찾음’에서는 계속 묻는다. 정말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리를 찾는다고 가르침을 구하는 찾는 이에게 진리 뒤에 숨겨놓은 자신의 진짜 목표를 살펴보게 안내한다. 진리가 목적인지 수단인지 묻는다. ‘무엇을 찾는가? (136쪽)’, ‘안전의 보장을 찾는가? (138쪽)’ , ‘능력을 찾는가? (142쪽)’, ‘영생을 찾는가? (149쪽)’라고 계속해서 물어댄다. 마침내 ‘마음의 평화를 찾는가? (151쪽)’라며 마지막 보루를 건드린다. 당신이 믿고 바라는 ‘마음의 평화’의 실체가 있기나 한 것인지 참 아픈 부위를 가리킨다.
無智 亦無得
무지 역무득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없느니라.
스승은 다시 한번 말한다. 지혜가 따로 없기에 ‘당신’이 얻을 지혜란 없다고.
지혜는 있다. 반야는 있다. 진리는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있다. 다만,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따로 없다. “얻어서 당신 가슴속에 숨겨둔 목표에 써먹을 지혜는 없다.”라고 스승은 분명히 말한다.
반야심경은 반야라는 지혜를 가리킨다. 궁극의 지혜인 마하반야바라밀다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떻게 지혜가 따로 없다고 하지?”라고 의아할 수 있다. 물론 지혜는 있다. 하지만 궁극의 지혜 반야는 당신이 이해하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라고 말한다. 뭔가를 배우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말이 이해가 안 된다. 진리는 오직 가리킬 수만 있다. 그리고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상이 아니다. 당신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존재 모두의 근원이지 모두이다. 존재 자체다. 이 때문에 책 3장 ‘찾음’은 ‘찾는 이가 찾아진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래서 찾음의 길은 선이 아니라 점이라고 말한다.
하여튼 핵심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무무명”인데 어디 얻을 지혜가 따로 있을까. 석가모니는 당신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반야를 가리킬 뿐이다. 당신이 직접 눈을 뜨고 보도록.
‘무엇’을 찾는 한, 찾음은 끝나지 않는다. 찾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으면 찾아져도 그 대상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찾아졌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대상이 한정되고 그 무엇이 어떠할 거라는 고정된 생각이 있으면 찾아지는 것은 그 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날 수 없다. 찾고자 하는 무엇은 사실, 이미 여기 지금 있다. 찾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찾음은 허상이다. 이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찾음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그저 찾음이다’ 167쪽에서 가져옴.
위에 글은 책 3장 ‘찾음’ 가운데 마지막 글 ‘그저 찾음이다’ (165쪽)에서 가져온 글이다. 찾음의 본질이 뭔지 다시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내려놓기 게임과 받아들임의 예술’ (161쪽) 글에서 언급하듯이 찾음의 본질은 오직 나의 믿음을 내려놓을 때 드러난다. 믿음을 내려놓으면 스승의 가리킴이 들어올 공간이 드러난다. 그 공간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가득 찬다. 이미 가득차 있는 진리가 눈에 들어온다.
5장. 길의 본질
길은 선이 아니라 점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이렇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찾는 이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만을 바라야 하느니라.
以無所得故
이무소득고
다시 한번 반야심경은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쐐기를 박아버린다.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늘 ‘아무것도’에서 예외를 만들어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뭔가 얻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아닌 특별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따라오는 ‘보리살타’의 번역에서도 잘 드러난다.
菩提薩埵
보리살타
보리살타의 해석이 앞으로 나오는 반야심경 해석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보리살타’를 다양하게 번역하는 데 대부분 보리살타를 관세음보살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해석하면 반야심경의 전체 흐름이 일그러진다. 관세음보살, 즉 관자재보살은 첫 줄에 나오고 그 설명이 이어지다 “무무명”부터는 찾는 이에게 초점을 두고 이어가는 말이다. 이 부분은 찾는 이에게 초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관세음보살이나 다른 보살이 낄 곳이 아니다.
보리(菩提, bodhi, Sanskrit: बोधि)는 지혜나 깨달음을 일컫는 말이다. 살타(薩埵, Sattva, Sanskrit: सत्त्व)는 보통 사람을 일컫는다. 이를 합쳐놓은 산스크리트어 보리살타(菩提薩埵, Bodhisattva, Sanskrit: बोधिसत्त्व)는 지혜를 얻은 ‘깨달은 사람’ 또는 지혜를 깨닫고 싶어 하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부분은 깨달은 사람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다른 문헌을 살펴볼 필요 없이 바로 앞까지 계속해서 말하는 반야심경의 내용을 보면 오해라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무명도 없고 무명을 벗어나는 것도 없고, “무지역무득”, 얻을 지혜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또 한번 “이무소득고”, 즉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쐐기를 박았는데 어디 깨달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번역은 여전히 뭔가를 얻어서 깨달은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오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는 보리살타,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찾는 이’라고 부른다. 중생이나, 수행자나, 구도자와 같은 말을 쓰지 않고 책에서는 ‘찾음’이라 하고 ‘찾는 이’라고 쓴다. 반야심경에서 반복해서 이야기하듯 찾는 대상을 정해놓고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오해를 조금이라도 피해 보기 위해서다. “무엇을 찾는다”가 아니라 그냥 찾는 것이다. 또 한 번 이것이 찾음의 본질이다. 진정 반야로 가는 길이다.
사람들은 각자 큰 의문을 품고 진리를 찾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진리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依般若波羅蜜多
의반야바라밀다
그래서 찾는 이는 오직 ‘반야바라밀다’에만 의지해야 한다. 진리를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다. 자신이 원하는 진리의 틀에 가두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정해놓은 진리가 아닌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만을 바라야 한다. 기억하라. 몰라서 찾는 것이다. 그러니 모름은 모름에 두어야 한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숨어있는 가정, ‘나” 394쪽에서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러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으면 두려울 것이 없어서, 모든 거짓 믿음을 넘어 어떤 의문도 남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느니라.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를 바라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진다. 걸릴 것이 없는데 두려울 것이 있을까. 이때 비로소 오랫동안 세상에서 듣고 배우고 스스로 쌓아온 믿음들을 바로 보게 된다. 그렇게 믿음을 하나둘씩 내려놓을 수 있다. 믿음이라는 먼지들이 다 닦여 나가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진리는 늘, 한순간도 빠짐없이, 어떤 가림막도 없이, 너무도 단순히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어떤 의문도 없다. 의문이 기댈 수 있는 믿음이라는 기반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遠離顚倒夢想
원리전도몽상
진리를 수단 삼아 내가 원하는 다른 뭔가를 얻으려 하면 마음에 숨기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따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에 걸리는 집착이 일어난다. 뭔가에 집착하면 두려움이 일어난다. 얻을 것이 있으면 얻지 못할까 두렵다. 이 두려움에 여기저기 휘둘린다. 이런 전도몽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 전도몽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알고 모든 기대를 접는 것이다.
진리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뭔가를 얻겠다는 집착이 없으면 잃을 것이 없다. 그러면 두려움이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진리만을 바랄 뿐이다. 나의 편견과 믿음이 정해놓은 진리가 아니라 그저 진리가 그 무엇이든 간에 있는 그대로 찾고자 하는 간절함이 타오르면, 이때 비로소 ‘전도몽상’, 즉 모든 거짓 믿음이 멀어지며 자연히 내려놓아진다. 모든 믿음이 허상이었음을 바로 보게 된다. 그저 믿음이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것이다.
전도몽상은 독립된 ‘나’와 독립된 사물들이 있다는 믿음이다. 반야심경은 이미 세상이 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도 공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로 알고 있다. 독립된 내가 있고, 독립된 사물이 있어서 내가 사물을 바라본다고 믿는다. 석가모니가 말하는 사실과 정 반대로 찾는 이는 믿고 있다. 그래서 전도(정반대로 뒤집힌) 몽상(환상, 즉 거짓 믿음)이라고 일컫는다.
이 부분과 따라오는 글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길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한다. 책 5장 ‘길’에서는 길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길의 본질은 찾음의 본질과 통한다. 찾음의 본질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고 길의 본질은 얻을 것이 없으니 얻을 방법도 없다는 말이다. 원래부터 얻을 것이 없기에 뭘 얻고 말고도 없다는 말이다.
究竟涅槃
구경열반
아무리 이렇게 이야기해도 결국 또다시 뭔가를 얻으려 하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갈려고 한다. 이런 믿음은 ‘구경열반’의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구경(究竟)은 최고 또는 궁극이란 뜻이고 열반(涅槃)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निर्वाण)의 음을 번역한 말이다. 열반을 부처가 모든 괴로움을 벗고 도달한 어떤 상태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렇게 도달한 세계를 열반의 세계라고 피안(彼岸 :저 언덕)이라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을 상상한다. 지금 여기가 아니기에 거기로 가야 하고 가야 하면 갈 방법이 있어야 한다.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최고의 방법을 찾고 최고의 주문을 찾아 이를 꾸준히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 만연한 수행자의 믿음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히 반야심경에서 그런 건 없다고 반복해서 지적하는 바다.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얻을 ‘나’도 ‘얻을 대상’도 공한데 뭐가 무엇을 얻는다는 말인가? 얻을 것이 없는데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전도몽상’이다. 그리고 이 ‘전도몽상’의 믿음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구경열반’이다. 모든 전도몽상이 사라지면 자연히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난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그저 오랫동안 쌓인 거짓 믿음으로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는 반야심경을 통해 이 사실을 사리자로 대표되는 찾는 이에게 일러주고 싶은 것이다.
뭔가 얻고자 하는 찾는 이를 위해 책 5장 ‘길’에서는 먼저 ‘깨달음의 전제조건 (220쪽)’이라는 것이 있는지부터 살펴본다. 그리고 전제조건을 충족 시키려 수행하는 이들을 위해 스승이 가리키는 ‘수행 (227쪽)’의 참뜻을 살펴본다. ‘구경열반’을 얻을 조건을 충족시키려 수행하는 이들이 무엇을 오해하는지 하나 둘 살펴본다. 그리고 수행으로 하는 여러 방법을 하나씩 살펴보며 어떤 믿음이 눈을 가리는지 찾는 이가 직접 보도록 안내한다. 그렇게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는 “의반야바라밀다”를 가리킨다.
길은 내가 가는 이 자리다.
다른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있다.
내가 지나온 흔적은 있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한다고 정해진 길은 없다.
길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길은 내가 가는 이 행위다.
길은 선이 아니라 점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부처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면서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을 온전히 끝내느니라.
스승은 다시 한번 강조한다. 따로 얻을 것이 없으니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게 하라고.
오랜 찾음이 끝났다. 찾아지는 것은 처음부터 너무도 선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찾음을 끝낸 모든 이에게 찾아지는 것은 다 똑같다. 다를 수가 없다. 수천 년 전의 석가모니나 예수든, 근대의 라마나 마하리쉬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든, 동양의 노자든 서양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든, 지구상의 스승이든 은하수 저 너머 외계의 스승이든,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들어가는 말’ 글 6쪽에서
찾음이 끝났을 때 너무도 명확이 이것 외에 어떤 다른 진리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찾음이 끝난 자연인에게 찾아지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연인, 즉 모든 부처는 앎이 다 똑같다. 이 때문에 수천 년 뒤에도 이렇게 반야심경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가 있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도 반야심경과 다 같은 내용이다. 다를 것 하나 없다. 다른 스승의 책도 다 마찬가지다. 가리키고자 하는 달이 어찌 다를 수 있을까. 다 똑같은 내용이다.
이 때문에 삼세의 모든 부처가 본 반야도 반야에 이르는 길도 다 같다. 결국 다 제자리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기에 삼세제불은 오직 이 사실을 깊이 알고 어떤 바람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 만을 간절히 바라서, 모든 거짓 믿음이 멀어지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을 온전히 끝내는 것이다.
다시 한번, 여전히 뭔가를 얻고자 하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은 많은 이들이 오해하겠지만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는 무엇이 아니다. 도달할 어떤 수준이 아니다. 그저 찾음이 끝나는 일을 일컫는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아는 일이다. 모두가 공하다는 사실에 눈을 뜨는 일이다. 그리고 관세음보살과 하나 되는 일이다. 아니, 관세음보살과 처음부터 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는 일이다.
이 일을 가리켜 책에서는 ‘궁극적 깨달음’이라고 일컫고 찾음이 끝나는 일이라고 ‘용어 정리(128쪽)’에서 정의한다. 그리고 ‘자연인으로 살아간다 (487쪽)’ 글에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니 명심하기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바로 보는 것만이 가장 신비하고 확실한 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방법이기에 능히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 진실에 닿기에 헛되지가 않느니라.
반야심경은 다시 한 번 반복하며 몇 번이고 강조한다. 다 공하니 뭔가를 얻으려 하는 모든 믿음을 내려놓고 오직 ‘반야바라밀다’, 즉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이거 말고는 어떤 다른 길도 없다는 말이다.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말이다.
여전히 뭔가를 얻고 지금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이들은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 어딘가 숨겨진 시크릿이 있을 것만 같다. 신비하고 대단하며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비법을 얻고 싶어 한다. 모두가 공하고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스승이 그렇게 몇 번이고 이야기해도 바로 자신의 믿음에 맞춰 그 뜻을 다르게 해석한다.
대부분의 찾는 이는 자신의 믿음을 쫓는다. 운이 좋게 삿상에서 스승의 가리킴을 받아도, 스승이 자신의 믿음을 지지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사실을 알면 다시 오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을 지지해 주는 선생을 찾아다닌다. 세상에는 자신의 믿음을 지지하고 옹호하고 더 견고히 쌓아주는 곳이 널려있다. 거의 다 그렇다. 그렇게 믿음을 붙잡고 뛰고 또 뛴다. 그렇게 세상의 수많은 수행자들이 다람쥐 쳇바퀴에 올라타 내려올 생각을 못 한다. 잡힐 것만 같은 자신의 믿음을 앞에 매달고 오늘도 헛되이 뛰고 또 뛴다.
다른 길은 없다.
오직 믿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주(呪)”라고 한자로 번역하고 주문이라고 한글로 옮기는 번역에 비법을 찾고 싶은 믿음이 강하게 베여있다. 이 주문을 세상 최고의 비법이라고 숭배한다. 우주 최강의 스승인 석가모니께서 직접 말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하고 좋을까. 비법을 원하는 나의 믿음을 충족시키려면 말하는 스승의 권위도 올려야 하고 비법을 담은 글의 권위도 올려야 한다. 그렇게 스승의 가리킴은 마하반야바라밀이 된다. 스승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특별한 존재로 포장해야 하니 싯다르타는 석가모니가 되고 세존이 된다. 수십 미터의 동상이 되어 금을 칠하고 앉아 있어야 한다.
한글 번역에서는 주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늘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말에 담긴 당신의 오해를 덜기 위해 이런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찾음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는 일이다. 뭔가를 얻는 일은 없다. 얻으면 잃어버린다. 일시적이다. 그러면 진리가 아니다. 최소한 반야심경에서 가리키는 진리는 아니다.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어떤 가림막도 없이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은유도 비유도 없다. 말 그대로다. 이 진리에 눈을 뜨는 방법은 오직 얻을 것이 있고 진리가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이런 믿음이라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다. 믿음이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없는 것을 증명할 길은 없다. 그저 자신의 믿음이 믿음에 불과하다는 이 사실만 바로 보면 믿음은 내려놓아진다. 눈을 가리던 먼지가 씻겨 나간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하면 체계적으로 찾는 이에게 알려줄까 고민한 결과 책에서 3장 ‘찾음’, 4장 ‘가리킴’, 5장 ‘길’을 써 내려갔다. 아무리 깊은 내용을 전한들 찾음의 본질과 가리킴의 본질과 길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한순간 다시 오해하고 왜곡되기에 아드바이타 가리킴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이 세 가지 본질을 먼저 이야기해야 했다. 세 가지 본질이지만 결국 다 같은 이야기다. ‘공’하기에 찾을 것도 가리킬 것도 가야 할 길도 없다는 이야기다. 반야심경에서 누누이 하는 이야기다.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래서 일러주리니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거라.
故說
고설
그래서 일러준다고 한다. 앞의 내용을 잊지 말라는 말이다.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아는 데 도움을 준다는 말이다. 말을 해도 해도 꼭 쥔 손을 놓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해봐라는 말이다. 전도몽상해서, “그래서 뭔가를 얻을 수 있는 대단한 신비의 주문을 알려주겠다”라는 말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찾는 이들은 스승에게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질문하지만 대부분 ‘어떻게?’라는 방법을 묻는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 깨달음의 전제조건에서
아무리 공하다, 얻을 지혜도 없다,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얻을 방법도 없다고 말해도 찾는 이는 또 묻는다. 그래서 그 사실을 ‘어떻게’하면 알 수 있느냐고. 또다시 방법을 묻는다. 한심해 보이나 다들 그러고 있다. 나도 찾음이 끝나기 직전까지 그러고 있었다. 찾는 이가 그렇다. 삼세제불은 다 찾는 이었기에 자신의 경험상 찾는 이의 이런 한심한 행동을 잘 이해한다. 그래서 “즉설주왈”, 일러주는 것이다.
궁극적 깨달음에 전제조건은 없다. 얻어야 할 것도, 버려야 할 것도 없다. 이미 있는 그대로에 더해야 할 것도, 덜어야 할 것도 없다. 이 ‘있는 그대로’ 안에서 많은 사람이 뭔가를 하고 있다. 뭔가를 하고 싶어 한다. 뭔가를 해야만 할 것만 같다. 스승은 “그냥 있으라”라고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스승은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라고 하지만, 당신은 완벽한지를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하게 된다. 뭔가를 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찾음에서 뭔가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할 때는 어떤 목적도 필요 없다. 뭘 얻고자 함이 아니다. 누가 뭘 얻겠는가? 뭔가를 얻으려고 목표를 세우고 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형태로든 부작용을 낳는다. 물론 이런 부작용도 가는 길의 일부이기에 사실 부작용이란 없다. 목표를 이루려는 모든 행위는 결국 모든 목표를 내려놓는 길로 가는 여정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 수행에서
呪
주
찾는 이는 늘 다시 ‘어떻게’를 묻기에 스승은 어쩔 수 없이 뭔가 할 거리를 준다. 이렇게 주는 할 거리 중 하나가 주(呪), 즉 주문이다. 만트라다.
얻을 것이 없다고 알려주는데 계속 “어떻게 그 사실을 아나요?”라고 물으면 스승은 어쩔 수 없이 그럼 “얻을 것이 없다.”라는 말을 늘 반복해보라고 일러준다. “진리는 이미 여기 있다. 그러니 구할 것이 없다.”라고 스승이 말하면 찾는 이는 “그 사실을 어떻게 깨달을까요?”라고 또 ‘어떻게’를 묻는다. 그럼 스승은 찾는 이에게 이렇게 일러준다. “간절한 마음으로 ‘진리는 이미 여기 있음을 알게 하소서.’라는 말을 하루에 100번씩 반복하거라.” 이것이 주문의 본질이다.
반야심경에서 “즉설주왈”하면서 말하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주문 또는 진언이라고 번역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만트라(Mantra, Sanskrit: मन्त्र)다. 반야심경에서 그렇게 얻을 것도 얻을 방법도 없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뭔가 비법을 찾고 싶어 만트라를 신비한 마법으로 이해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옴(Oṃ, ॐ)”은 많은 사람들이 신비한 영적 힘을 지닌 소리라고 여기며 최고의 만트라라고 여긴다. 이 소리를 분석하고 이야기를 붙여 신의 영역으로 가져다 놓는다. 다들 부정하고 싶겠지만 정확히 반야심경에서 “그런 것은 없다.”라고 말하며 넘어서라고 하는 ‘전도몽상’이다.
만트라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마음이 이끌리는 만트라가 있으면 하라. 하지만 그 본질을 바로 알고 해야 한다. 그러면 만트라의 진정 신비한 힘이 깨어난다. 반복으로 익숙하게 만들어 앎을 일으킨다. 앎의 본질을 잘 아는 스승은 그래서 찾는 이에게 반복할 말을 일러준다.
처음에는 “이미 여기 있다.”라는 스승의 가리킴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는데 만트라를 계속 간절히 반복하다 보니 문득 스승의 말씀이 심장을 파고든다. 그리고 앎이 일어난다. “아하!”
이렇게 뭔가 알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눌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한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만트라면 여기에 이야기를 붙여 만트라의 신비한 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만트라가 그 결과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일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원인이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이 말이 와닿지 않을 것이다. 만트라의 힘이라 믿고 싶다. 그런데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특정한 원인이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이 믿음이 사실인지, 아니 사실이 될 수나 있는지 책 2장 ‘찾음의 시작’ 가운데 ‘어떻게 벤자민 버튼이 데이지를 만나게 됐을까?”에서 살펴본다. 이 믿음을 바로 봐야 스승이 반야심경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바로 볼 수 있다. 모든 장애 ‘일체고액’은 자신의 믿음이다. 밖에 있지 않다. 장애도 답도 다 ‘내’ 안에 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점은 만트라를 외는 찾는 이의 간절함이다. 알고자 하는 찾는 이의 간절한 마음이다. 만트라는 그 의미를 알고 반복하면 좋겠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반복해도 상관은 없다. 뭐라고 반복하며 외치던 그 외침 속에는 여전히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간절함이 외면하고 싶던 자신의 믿음을 바로 보게 한다. 진정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라는 스승의 말을 받아들이게 된다. 진정 세상도 세상을 바라보는 ‘나’도 공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스승은 찾는 이에게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떠라고 일러준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한때, 많은 이들이 이 마지막 부분을 신성시하며 만트라는 번역하는 게 아니기에 뜻을 생각하지 말고 반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상 최고의 신비하고 대단한 주문이니 주문 자체에 뭔가 대단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분명 반야심경은 그런 거 없다고 말한다. 혹여라도 그들의 믿음처럼 그런 것이 있었으면 오랫동안 중국이나 한국의 수행자들은 다 헛일한 샘은 아닐까.
산스크리트어를 비슷한 한자 음으로 음역하고 그 한자음을 다시 한글 음으로 옮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정확한 발음이 아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गते गते पारगते पारसंगते बोधि स्वाहा이고 IAST에서 나타내는 음운은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이고 IPA에서 나타내는 음운은 ɡəteː ɡəteː paːɾəɡəteː paːɾəsəŋɡəte boːdʱɪ sʋaːɦaː이다. 분명 우리가 발음하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랑 비슷하기는 하다. 비슷하다는 것도 이 발음에 익숙한 한국인이 보기에 그렇다. 고대 인도인이 들으면 전혀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혹, 우리가 바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 반대의 말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미국 식당에 가서 보니 나이프는 있는데 포크가 없어서 “포크 좀 갖다 주실레요? Could you give me a pork?”라고 말하면 돼지고기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Folk의 “F” 사운드를 바르게 발음하지 못하고 한국 사람들이 자주 실수하듯 한글 음대로 “P” 사운드로 “포크”로 발음하면 나이프 옆 포크가 아니라 돼지고기가 된다.
나와 너가 점하나 차이지만 정반대의 말이 되는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한국말이 서툰 남자가 한국 여자분에게 “너를 좋아한다.”라고 고백하려 한다. 차마 만났을 때 말은 못 하고 전화를 걸어 용기 내어 말한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여자분이 왜 전화해서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지 몰라 황당해서 “… 응… 그래서?”라 반문한다. 남자는 바로 뭔가 잘 못된 걸 직감하고 전화를 서둘러 끊고 머리를 쥐어 뜯는다.
한국말이 어설픈 외국인이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데 기사분이 이리 가면 되냐고 여러 번 묻길래 택시 기사에게 여러 번 “계속 직진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택시 기사분이 화가 나 보였다 한다. 한국인 친구가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니 “계소키 직진해요.”로 들린다. 한바탕 웃고 나서 외국인 친구에게 욕같이 들렸을 수 있겠다고 일러준다. 자칫 욕 같은 이 말에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택시 기사분이 성질 있는 분이셨으면 가만있지 않으셨을 거라고 덧붙인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한들, 콜라를 모르는 조선시대 수행자가 “콜라콜라 코카콜라 팹시도콜라 모지 사바하”라고 한들 뭐가 다를까.
우스게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뼈 있는 말이다. 흘려들을 소리가 아니다. 여전히 “혹시나.. 그래도..”하는 마음이 있다면 가만히 자신에게 어떤 믿음이 있는지 살펴보라.
아직도 “그래도, 혹시나”하면서 뭔가 얻을 것이 없을까 하며 바라는 찾는 이는 마지막 부분을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행이라 여긴다. 스승은 오늘도 자신의 노력만을 탓하며 뼈 깎는 수행을 이어가는 수행자들이 안타깝다. 그래서 침묵으로 충분할 가리킴이 길어진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주문도 설하게 된다. 이 또한 다 있는 그대로인 것을 스승은 잘 안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수많은 수행에 관한 환상과 믿음을 내려놓고 ‘수행’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한다. 수행은 뭔가를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 피안(彼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표현이다. 이것이 수행의 본질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에서 이 수행의 본질을 자세히 살펴본다. 정말 스승이 말하는 수행의 참뜻이 뭔지를 알아본다. 세상 가득한 온갖 수행에 깃든 수행자의 믿음을 들쳐본다. 이 믿음들을 바로 보고 내려놓아야지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을 바로 이해한다. 반야심경에서 일관되게 반복해서 말하는 스승의 가리킴을 오해하지 않는다.
수행의 본질을 바로 알고 스승이 일러주는 내용을 한번 들여다보자.
揭諦揭諦 波羅揭諦
아제아제 바라아제
신비한 주문을 번역하면 안 된다는 한때의 믿음을 뒤로한 채 요즘은 이 부분을 한글로 번역해서 알리는데, 한글 위키피디아에 나온 다음 번역이 일반적이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그런데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gone, gone, everyone gone to the other shore, awakening, svaha.”
(일단 직역해보면 “건너갔다, 건너갔다, 모두가 저 너머로 건너갔다. 깨달음이여, 사바하”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라는 한글 번역에는 정확히 반야심경에서 그렇지 않다고 알려주는 믿음이 가득하다. 신비한 주문을 열심히 외워서 깨달음을 얻자는 믿음이 넘쳐난다. 이 말은 “지금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지금은 깨달음이 없다는 말이다. 또 이 말은 “여기는 아니다.”라는 말이다. 여기는 벗어나야 할 삼사라다. 현세상을 부정하고 이데아를 꿈꾸는 플라톤의 철학이다. 괴로운 삶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나온 번역이다. 반야심경의 전체 내용과 맞지 않는 번역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산스크리트어의 영어 번역을 보면 반야심경 전체 내용과 흐름을 같이 한다. “건너갔다, 건너갔다, 모두가 저 너머로 건너갔다.”라는 반야심경의 뜻을 잘 품고 있다. 공하다, 얻을 것이 없다, 갈 곳이 따로 없다고 말하는 반야심경이 가리키고자 하는 바다. ‘나’만 저 너머로 간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이미 도착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말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무무명 역무무명진”에서부터 “일체고진실불허”까지의 내용을 요약한다.
아직 스승의 말이 명확히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이기 힘든 찾는 이는 이렇게 요약된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기다린다. 스승이 왜 이렇게 내용을 요약해서 되풀이하게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일단 되뇌기 쉽게 핵심을 요약한다. 이미 자세한 뜻은 길게 앞에서 설명했으니 찾는 이는 요약된 내용의 본 뜻을 알고 있다. 요약을 반복하면서 가리킴의 본 뜻을 계속해서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풀이하는 까닭은 앎의 본질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반복하면 익숙해진다. 익숙하면 문득 “아하!” 한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들 앎이라고 말한다. 물론 단순한 반복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복할 때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그 뜻에 자꾸자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다. 이것이 만트라다. 이것이 살펴보기다.
책 5장 ‘길’에서 ‘살펴보기’ 글을 보면 이 앎의 본질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 글에서 설명하는 ‘살펴보기’가 다들 알고 있는 위빠사나 명상이다. 위빠사나(Vipassanā, विपश्यना, 觀, Vipaśyanā)와 만트라는 본질적으로 같다. 같은 수행이다. 관심을 가지고 반복해서 살펴보다 보면 앎이 일어난다.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다.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일어난다.
앎의 본질을 바로 알면 결국 다 이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수행 방법은 본질적으로 같다.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다르지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위빠사나나 만트라를 하나의 형태나 특정한 수행 방법으로 국한하면 오해가 생긴다. 책 5장 ‘길’에서 수행에 담긴 다양한 오해를 살펴본다.
娑婆訶
사바하
사바하(薩婆訶, svāhā, Sanskrit: स्वाहा)는 산스크리트어로 어떤 주문을 말한 뒤 마무리하는 통상적인 말인데 여러 번역을 통해 나타나는 의미는 간절함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렇게 찾음의 본질과 수행의 본질을 살피며 스승이 반야심경을 통해서 찾는 이에게 무엇을 가리키려 하는지 그 의도를 담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반야심경을 요약해서 찾는 이가 반복하기 쉽게 만든 말이다. 반복으로 오랜 믿음이 씻겨나가고 스승의 가리킴에 가슴이 열리도록 하는 말이다. 그렇게 문득 앎이 일어나게 하는 주문이다.
모든 헛된 믿음을 내려놓고 다시 보면 참으로 신비하게 앎을 일으키는 주문이며 당신의 가슴을 환히 밝히는 주문이며 최상의 주문이며 따로 다른 대단한 비법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이것만 집중하면 되는 주문이다. 그래서 능히 모든 오해와 믿음의 어려움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특정한 문장이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실체가 그렇다. 그렇게 공하다. 이 공을 통해 관자재보살의 실체를 본다.
이 주문을 문장으로 말하면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이다. 반야심경을 통해서 석가모니가 사리자에게 말하는 내용을 요약한 이 문장이 책의 제목이다. 글에서 책을 언급할 때마다 반복해서 일컫는 책 제목은 사실 당신을 위한 주문이다.
이미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뭘 얻을 필요도 건너갈 필요도 없다. 이미 모두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모두 있다. 이미 있는 그대로다. 중생에게는 없고 부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모른다고 또, 안다고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미 여기 지금 모두 있기 때문이다. 중생도 없고 부처도 따로 없다. 사물도 사물을 바라보는 ‘나’도 당신이 믿는 모든 다른 세상도, 극락도 지옥도, 모든 신들도, 브라흐마도 비슈누도 시바도, 정말 어떤 예외도 없이 모두 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삼세제불이 정확히 아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눈을 떠라. 이 사실이 관세음보살이다. 이 진리가 관세음보살이다. 그렇게 관세음보살이 드러난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다.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반야심경
6장. 가리킴의 본질
가르침이 아니라 가리킴이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핵심이 되는 말씀
반야심경은 진리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하나의 가리킴이다.
摩訶般若波羅蜜多
마하반야바라밀다
마하는 “궁극의”라는 뜻이고 반야바라밀다는 본문의 내용처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가리킴이다. 궁극의 진리는 모든 믿음을 걷어내면 드러나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는 그대로의 진리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로 번역한다.
心
심
심은 핵심이라는 뜻이다. 핵심만 추려서 요약했다는 말이다. 영어에서는 이 마음 심자를 보고 하트 수트라(Heart Sutra)로 번역한다. 이때도 우리의 심장처럼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經
경
경은 스승의 가리킴이다. 말로 전하는 가리킴이 경이다. 이 경의 뜻에 오해가 없어야 반야심경을 바로 이해한다.
가리킴의 본질은 이야기다. 진리가 아니다. 도구다.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오해가 없다. 반야심경을 대하는 기본자세가 바로 선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4장 ‘가리킴’에서는 이런 가리킴의 본질을 깊이 살핀다. 가리킴의 본질을 깊이 살펴 스승의 가리킴에 오해가 없도록 한다. 가리킴의 본질은 쉽다. 특별한 의미가 전혀 없다. 산을 오를 때 방향 표지판이 무엇인지 어떻게 보는지 알려주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리 간단해도 처음 보는 아이에게 한 번은 알려줘야 한다. 이건 가지고 노는 장난감도 아니고 목적지를 표시하는 것도 아니며 누구를 매다는 물건도 아니며 신성하다 숭배할 대상도 아니고, 그저 화살표 모양이 가리키는 곳에 무엇이 있고 그 길의 방향을 가리키는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그렇게 알면 그만이다.
가리킴의 본질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오해가 적다. 가르침이 아니라 가리킴이다.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진리가 아니라 일회용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4장 가리킴에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진리를 핵심만 요약해서 간결하게 가리키는 가리킴이다. 진리가 아니다. 믿고 따르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학문이 아니다. 스승의 가리킴이다. 찾는 이가 직접 보라고 방향을 알려주는 방향 표지판이다. 석가모니가 사리자에게 저기 달이 있다고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반야심경도, 반야심경을 설명하는 이 글도,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도, 다른 모든 스승의 말씀들도 다 마찬가지다. 하나의 가리킴이다. 하나의 이야기다.
이 모두가 가리킴이다.
진리가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이야기일 뿐이다. 헛소리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있는 그대로’에서
반야심경의 해설이 많은 이의 가슴에 와닿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반야심경이라는 가리킴을 통해 당신이 찾아온 그 무엇에 눈을 뜨기 바란다.
7장.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나는 반야심경이 좋았다.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한 구절이 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찾음이 깊어질 때 이 한 구절의 뜻이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가슴 깊이 닿은 가리킴들이 존재 전체로 퍼질 때 뜬금없이 어릴 적 되뇌던 ‘관세음보살’의 의미가 확연해졌다. 그리고 곧 “나는 관세음보살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찾음이 끝났다. 그렇게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가 일어났다. 그렇게 “도일체고액”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가 환히 드러났다.
반야심경은 그렇게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의 사다나다.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 나다.
있는 모두가 관세음보살이다.
부디 도움이 되길,
관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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