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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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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짐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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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본즈 짝사랑찌통 썰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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ë리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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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짐본즈
* 21세기에 대한 23세기 인들의 잘못된 인식이 있습니다.
여기는 맥코이. 엔터프라이즈는 응답하라.
나는 지금 행성 B에 홀로 조난당했다.
이곳의 기후는 겨울로 자세한 기온을 알 수 없지만 체감기온은 약 영하 10도 이하다.
방한복은 추락 시 충격으로 기능이 거의 손상되었으며, 나는 지금 추위와 맞서며 두껍게 얼어붙은 빙판 위를 지나고 있다.
이 끝은 보이지 않고 온몸을 베어낼듯한 매서운 눈폭풍이 내 얼굴을 세차게 때리고 있다.
…이런 젠장!!
레너드가 진저리를 치며 몸을 일으킨 탓에 그의 발등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슬리퍼 한 짝이 결국 마루 위로 뚝 떨어져 나뒹굴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레너드는 매서운 바람이 부는 행성 B의 빙판에서 섭씨 36도를 웃도는 ‘버터 하우스’의 가죽 소파 위로 다시 돌아왔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더위를 쫓고자 한 상상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레너드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고, 본디 연한 하늘색이던 야자수 무늬의 하와이안 셔츠는 등부분이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소파에 닿아있는 허벅지 뒤쪽에서 스멀스멀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지자 결국 레너드는 이 빌어먹을 소파 위를 벗어나 아까부터 고팠던 시원한 물을 한잔 들이키기로 했다. 쩍하는 소리와 함께 가죽위에 붙어있던 살이 떨어지면서 미약한 통증과 함께 붉게 달아올랐다. 번들번들하게 물기가 묻은 소파 끝을 찡그리며 바라보던 레너드는 엉덩이에 자꾸만 달라붙는 검은 트렁크를 거칠게 떼며 거실로 내려왔다.
여전히 제임스는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사방을 오가며 통화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사흘 전에 왔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틀이나 더 걸릴 것 같다고요? 모레면 저는 여기서 수십 광년 떨어진 별에 있을 예정입니다.”
이 찌는듯한 더위에 벌써 30분 넘게 통화하면서도 제임스는 용케 화를 꾹 참고 있었다. 물론 목소리만. 잔뜩 굳은 표정의 제임스와 눈이 마주친 레너드가 힘내란 뜻으로 엄지를 들어 올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한 쪽에 자리 잡은, 레너드의 가슴 정도 높이의 흰색 냉장고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캔과 어제 먹다 남은 크림새우 그리고 2L 생수병 세 통이 들어있었다. 그중 반쯤 남은 것을 꺼낸 레너드는 머그잔 가득 물을 따른 뒤에 단숨에 들이켰다.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식도와 함께 급격하게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관자놀이에 아차싶었지만 이미 엎어진, 아니 삼켜진 물이었다.
“네, 바하르에서… 최대한 빠른 시간… 네…부탁합니다.”
드디어 전화를 끊은 제임스가 참고 참았던 분노를 한마디의 욕설로 내뱉으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레너드가 고생했다며 다시 한가득 물을 채운 머그잔을 그에게 건네자 제임스가 살짝 표정을 풀고 컵을 받았다. 역시 단번에 물을 들이키고는 바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만지는 제임스의 모습에 레너드는 큭큭 웃었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
“확인해보니 여기가 아닌 다른 지점으로 물건이 도착했나 봐. 이틀이나 더 걸릴 뻔했는데, 오늘자 항로를 검색해보니 바하르에서 출발하는 수송선이 이 근처를 경유하더라고. 원래는 안된다는 것을 한참 씨름했더니 그쪽을 통해 보내주겠대. 그럼 아마도 오늘 오후에는 도착할거야.”
“그래? 오늘도 꼼짝없이 여기에 있어야겠군.”
식탁 위에 올려 둔 머그잔에 부딪힌 더운 공기들이 물방울로 맺혀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그것을 연신손바닥으로 훔쳐 목덜미를 문지르던 레너드가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본즈,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눈앞에서 벌어지는 스트립쇼에 제임스의 화는 깨끗이 풀려있었다. 어느새 상체를 훤히 드러낸 레너드가 코웃음을 치며 축축한 셔츠를 뭉쳐 빨래 바구니에 던졌다.
“이상한 생각하지마. 샤워하러 갈 거야.”
=Pictures of Summer=
수많은 함선이 각자의 목표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최첨단의 과학 기술로 무장된 단단하고 매끈한 함선은 무척 강인해 보이지만, 실제로 안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이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우주는 아름답지만 한순간에 바로 생명을 앗아가 버릴 만큼 냉혹하기도 하다. 탐사가 계속되면서 이를 체득한 엔터프라이즈호의 크루들은 점점 자신들의 고향을 그리워하기 시작했고, 레너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어두운 쿼터 안을 울리는 알람에 눈을 뜰 때마다 제 몸을 데우다 못해 피부를 익게 하던 햇살이 그리웠고, 건조한 대기에 충혈된 눈을 비비다 보면 온몸을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하던 습기가 그리웠다.
그래도 길고 길었던 5년간의 탐사도 어느덧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특이사항이 없다면 엔터프라이즈호는 한 달 뒤 행성 에오르에 정박하여 귀환을 위한 전체점검을 받을 것이고, 점검기간 동안 모든 크루는 일주일의 휴가를 즐길 예정이었다.
레너드는 변함없이 근무 시작 30분 전에 미리 메디베이에 나와, 전날 당직자가 작성한 일지를 점검하며 오늘의 하루를 시작하려 했다.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기 전까지는 말이다. 레너드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패드가 익숙한 더티 블론드에 내려꽂히기 직전 가까스로 멈췄다.
“본즈, 우리 휴가말인데~”
“젠장, 짐! 갑자기 달려들어 뭐 하는…!”
제임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가 레너드의 분노를 삽시간에 잠재웠다. 제임스가 꺼낸 것은 요새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인공행성이었다.
오로지 휴양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 행성은 다양한 크기의 커스텀 섹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이용자가 원하는 지형, 기후, 건축, 동식물들로 섹션을 꾸미는 파격적인 컨셉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당신이 꿈꾸던 그 장소를 99% 구현해드립니다!‘
야심차게 내놓은 행성의 광고 카피는 우주에 나와있는 수십억 외계인들의 향수병을 곧 자극했고, 요크타운 근처를 시작으로 전 우주 여기저기에 빠르게 지점을 확산시키고는 있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늘 신청일마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자랑하는 바로 그 행성이었다.
“마침 에오르 근처에도 있더라고.”
“세상에 거길 예약했다고? 저번 신청일에도 서버가 마비될 정도였는데?”
“체콥에게 부탁해서 1분 먼저 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도록 회선을 뚫어달라했지.”
“……”
싸늘해지는 레너드의 눈빛에 아차 싶은 제임스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아무튼 오늘까지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거든? 이게 제법 항목이 많아. 그래서 말인데 일단 계절은…”
“여름.”
“응?”
“여름이 좋겠어.”
“너 더위 질색하잖아? 봄 어때.”
제임스의 만류에도 레너드는 꿋꿋하게 우주에 나오고 나서야 사실 내가 여름을 좋아했다는 걸 깨달았다며 밀어붙였다. 결국 제임스는 레너드의 의견대로 휴양지의 계절을 여름으로 선택했고, 두 사람은 굳은 표정의 스팍이 제임스를 찾아 메디베이로 들어오기 직전에 가까스로 총 153개의 문항을 모두 작성하여 전송했다.
◇◇◇
한 달 뒤, 엔터프라이즈호는 큰 문제 없이 행성 에오르에 도착했다. 하선한 크루들은 다들 환한 표정으로 각자 계획한 휴가를 즐기러 뿔뿔이 흩어졌고, 마지막으로 내린 제임스와 레너드 역시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예약된 셔틀에 올라탔다.
[환영합니다. 미스터 커크, 미스터 맥코이. 본 셔틀은 목적지인 SD-64783섹션까지 안전하게 운행되며 비행시간은 약 3시간입니다.]안내방송을 마친 셔틀이 떠오르자 기대감에 부푼 제임스와 레너드는 곧 맞이할 달콤한 휴가를 기대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었다.
◇◇◇
“…짐, 여기 맞아? 잘못 온 거 같은데.”
“좌표는 여기가 맞는데?”
3시간 뒤, 셔틀에서 내린 제임스와 레너드를 맞이한 것은 습한 더위를 가득 머금은 후덥지근한 공기와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의 홧홧한 열기를 내뿜는 땅이었다.
당황하는 사이 셔틀의 문이 닫히며 곧바로 제임스의 패드가 울리며 새로운 메일이 왔음을 알렸다. ‘안내서’라고 적힌 제목에 제임스는 물끄러미 레너드의 얼굴을 바라보다 메일을 열고 빠르게 읽었다.
“친애하는 커크씨, 맥코이씨. 이번 휴가지로 저희 행성을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출하신 신청서를 토대로 커스텀을 진행하였으나 항목 중 ‘클래식한’, ‘따스한 햇볕’, ‘적당히 습한’ 이라는 조건이 객관적이지 않아 저희가 소유한 데이터베이스를 참고로 구성하였음을 알려드리며 또한, 1차 및 2차 컨펌 기간동안 별도의 피드백이 회신되지 않아 약관상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였음을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해당 SD-64783 섹션의 기후는 21세기 지구의 한국이라는 국가를 참고로 구성되었으며, 계약기간인 5일후 정오에 귀가 셔틀이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라는데?”
“한국? 한국 날씨가 원래 이랬어?”
“나야 모르지. 근데 컨펌은 또 무슨 말이지?”
“짐, 일단 안에 들어가서 생각하자. 너무 더워.”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둘은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착륙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별장은 멀리서 보면 커다란 버터 덩어리 같은 직육면체 모양의 연노란색 건물이었다. 건물은 총 2층으로 되어있었고, 그 앞에는 두 개의 레인으로 나누어진 5m 길이의 수영장과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선베드 두 개가 놓여있었다. 건물 주위에는 열매가 달린 야자수도 몇 그루 있었는데 그 사이에 해먹까지 달려있었다.
“나름 잘 꾸몄네. 이렇게 더워서야 쓸 수나 있을지 모르지만.”
“해가 지면 괜찮지 않을까? 음?”
현관 앞에 멈춘 둘은 음성인식 개폐 장치가 아닌 초콜릿색 문의 우측 중앙에 달린 구멍이 뚫린 둥그런 손잡이에 또 한 번 당황해야만 했다. 레너드가 잠겨있는 손잡이를 흔들며 씨름하는 사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봉투를 발견한 제임스가 봉인을 뜯어 작은 은색 열쇠를 꺼내고는 레너드의 눈 앞에 흔들어 보였다.
“21세기의 시작이네.”
“조금만 늦었으면 내가 이 쇳덩이를 뜯어버렸을거야.”
“본즈, 이 곳을 버터 하우스라 부르는 게 어때?”
“그래. 아무튼 들어가기나 하자고. 버터처럼 녹아버리기 전에.”
열쇠를 끼워 돌리자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먼지 하나 없는 하얀 원목 마루의 바닥이 제임스와 레너드를 맞았다. 테이블에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은 뒤, 제임스는 재빨리 에어컨 가동을 외쳤다.
“에어컨 가동!”
응답이 없자 제임스가 이번에는 조금 더 소리를 높여 외쳤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21세기는 음성제어도 없었나 봐.”
“그럼 이번에도 수동으로 켜야겠네.”
“내가 찾을게!”
제임스가 에어컨을 찾아 나선 동안 레너드는 천천히 버터 하우스의 내부를 구경했다. 바닥과 어울리지 않게 창틀은 온통 체리색이었으며 거실 한 켠에는 커다란 붉은 꽃이 그려진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1층에 위치한 거실과 부엌, 욕실을 천천히 둘러본 뒤, 레너드는 아까 제임스가 올라갔던 계단을 뒤따라 올라갔다. 2층은 통째로 침실로 꾸며져 있었는데, 마침 제임스가 옷장-이 역시 체리목 재질이었다.-에 반쯤 몸을 넣은 채 무언가를 힘겹게 꺼내고 있었다. 잠시 뒤 끌려 나온 4개의 날개가 달린 회색 선풍기에 레너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에어컨이 없는 건 아니지?”
“애석하게도 그런 것 같아. 본즈.”
“젠장! 21세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활한 거야?”
“일단 이거라도 틀어볼까?”
쿵소리 나게 선풍기를 내려놓은 제임스가 버튼을 누르자 힘차게 날개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덥고 습한 불쾌한 바람이었다.
“…짐. 그냥 취소하고 에오르로 돌아가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계단을 내려가려는 레너드와 달리 제임스는 선풍기 옆에 서서 머뭇거렸다.
“뭐해? 가자니까.”
“…하지만 물품을 받아야 해.”
“응? 무슨 물품.”
레너드의 말에 살짝 입술을 깨물던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실은 여기 오기 전에 주문한 게 있어.”
“그런데?”
“트랜스포터로 보내면 손상될까 봐 일부러 수송선으로 받기로 했거든? 원래 도착하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안 온거 같아.”
“말도 안 돼! 그럼 그게 올 때까지 여기 있자고?”
“본즈으, 제발! 나 그거 한 달이나 기다렸단 말이야. 응?”
양손을 깍지낀 채 애원하는 제임스의 모습에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레너드는 눈썹까지 축 늘어뜨린 그의 표정에 결국 딱 하루만 더 기다리겠다며 이번에도 두손 들었다.
◇◇◇
버터 하우스에서의 사흘 째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태양!’
연락을 받고 뛰어나간 제임스를 기다리던 레너드가 집 안 길게 드리워진 햇빛에 진저리를 치며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블라인드를 내렸다. 마지막으로 부엌에 온 김에 파스타라도 만들어볼까 하여 냄비를 꺼내려던 찰나, 요란하게 문이 열리며 제임스가 들어왔다.
“본즈! 도착했어!”
제임스의 손에 들린 것은 가로와 세로가 약 25cm, 높이 21cm정도의 상자였는데, 그 위에 어지럽게 적힌 다양한 언어들이 이 상자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손을 거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게 이거야?”
“응, 상태가 괜찮아야 할 텐데.”
상자를 연 순간 안에서 튀어 오르는 하얀 것에 기겁한 레너드는 그것들의 정체가 엄지만한 크기의 플라스틱 완충재라는 걸 알고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임스가 상자 안에서 꺼낸 것은 엄지와 검지만으로도 잡힐 정도로 작은 노란색 상자였는데, 모서리가 닳고 표면의 색도 바랬지만 겉면에는 언어는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는 언어가 쓰여있었다.
“코닥?”
낯선 단어에 레너드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제임스가 마저 읽어보라며 그의 손에 상자를 쥐어주었다.
“선명한 색상, 36매, 필름? 이걸 어디에 쓰는데?”
“여기에 쓰는 거야.”
제임스가 두 번째로 꺼낸 것은 중앙에 둥근 렌즈가 달린 검은색의 네모난 물체였다.
“뭐야 이건?”
“카메라. 필름 카메라.”
“카메라라고? 이 크고 두꺼운게?”
“정확히는 200년도 훨씬 더 전에 쓰던 카메라지.”
200년? 엄청난 기간에 레너드가 혀를 내두르는 동안 제임스는 손에 쥔 카메라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가죽 스트랩은 삭았고 모서리와 셔터 버튼의 은빛 도색도 대부분 벗겨졌으며 렌즈 끝 부분도 약간 찌그러진, 겉으로 보기에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골동품 사이트에서 발견하고 바로 주문했지. 옛날에는 여기에 필름을 넣고 필름상자에 쓰인 숫자만큼 사진을 찍었대.”
“네가 왜 여기서 이걸 기다렸는지 이제야 알겠네.”
“우리 휴가 컨셉에 딱 맞지? 얼른 찍어보고 싶어.”
콧노래를 부르며 제임스는 카메라 겉에 쌓인 먼지를 옷에 문질러 닦은 뒤, 미리 다운 받아두었던 카메라의 설명서를 패드에 띄웠다. 어디보자, 처음에는 건전지를 넣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던 제임스가 상자 안에서 AA라고 적힌 원기둥 모양의 건전지를 꺼냈고 그걸 본 레너드는 이렇게 무식하게 큰 건전지는 처음 본다며 또다시 혀를 찼다. 건전지를 넣은 제임스가 이번에는 카메라 뒤의 뚜껑을 열고 빈 공간을 레너드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에 필름을 넣는 거야. 잘 지켜보라고.”
자신만만한 말과 달리 제임스는 계속 헛손질을 하며 좀처럼 필름을 카메라에 넣지 못했고, 10여 분간의 사투 아닌 사투를 보다 못한 레너드가 제임스에게서 필름을 빼앗아 들었다.
“내가 할게.”
“조심해! 이거 빛 닿으면 안 된다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설명서 보고 똑같이 넣으면 되잖아.”
제임스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레너드는 설명서를 두어 번 읽더니 의외로 단번에 필름을 끼워 넣었다. 지잉하고 필름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 상단에 숫자 0이 뜨자, 제임스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오, 본즈. 나 방금 너에게 또 한 번 반한 거 같아.”
“이정도야 신경 이어붙이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럼 기념비적인 첫 사진을 찍어볼까.”
몇 번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는 시늉을 하던 제임스가 카메라를 들어 제대로 된 자세를 잡았고, 뒤늦게 자신을 향한 렌즈를 본 레너드가 얼굴을 가리며 손사래를 쳤다.
“잠깐, 지금 날 찍겠다고? 난 지금 땀에 찌들어서 머리도 얼굴도 엉망이라고.”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워서 여기 담고 싶거든? 본즈, 빨리. 어두우면 예쁘게 안 나와.”
“……젠장, 난 신분증 사진 찍는것도 좀이 쑤신다고!”
얼굴을 가린 손은 치웠지만 레너드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본즈, 좀 웃어봐. / 웃은 건데? / 더 크게! / 웃었다니까? 한참을 실랑이하던 도중, 좋은 생각을 떠올린 제임스가 한마디 던졌다,
“본즈, 그럼 트리블이라고 말해봐.”
“트리블?”
레너드의 입가가 자연스레 풀어지는 그 순간, 제임스는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지잉. 필름이 감기는 소리에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레너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제임스가 재빨리 카메라를 레너드에게 넘겨주었다.
“뭐야?”
“공평하게 서로 한 번씩 찍자고. 자, 여기를 이렇게 보면서.. 셔터를 누르면 돼.”
대략적인 조작법을 알려준 뒤, 제임스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가 거실에 놓인 책장 옆에 여유롭게 몸을 기댔다.
“예쁘게 찍어줘.”
“네가 예뻐야지…젠장.”
…..예쁘긴 하네.
뷰파인더 속에서 환하게 웃는 제임스의 모습에 레너드는 잠시 숨을 멈추고 셔터를 눌렀다.
◇◇◇
휴가의 마지막 날.
여전히 후덥지근한 21세기 한국 날씨에 레너드는 더위에 한껏 지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바깥은 어슴푸레한 새벽이었고, 타이머가 다 된 선풍기는 어느새 꺼져있었다. 땀으로 끈적해진 팔뚝을 몇 번 두들기던 레너드는 아직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여름 이불을 인형처럼 꼬옥 끌어안고 자는 제임스의 모습에 한참 소리죽여 웃던 레너드는 협탁위에 올려두었던 카메라를 들었다.
지이이잉.
어제와는 다른 낯선 소리에 레너드가 카메라를 살피는 동안 제임스도 눈을 떴고,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하는 레너드의 표정에 무슨 일이냐며 몸을 일으켰다.
“카메라…카메라가 이상한 소리를 냈어. 고장 났나 봐.”
레너드의 말에 카메라를 받아든 제임스가 한참을 살피더니 잠시 후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웃고 설명을하라는 재촉에, 제임스는 미소를 머금고 레너드의 손을 끌어다 제 가슴 위에 가져다 댔다.
“레너드 맥코이, 내가 자는 사이에 이런 깜찍한 짓을 하다니.”
“뭐…뭐가? 심각한거야?”
“드디어 우리의 추억이 완성되었네.”
“응?”
“필름을 다 써서 자동으로 감긴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댐잇! 걱정했잖아!
제임스의 얼굴을 강타한 레너드의 베개가 천장을 향해 높이 솟구쳤다.
◇◇◇
[미스커 커크, 미스터 맥코이. 즐거운 시간 보내셨습니까? 이제 본 셔틀은 1분 뒤 행성 에오르를 향해 출발합니다.]“와, 기계 목소리를 듣고 눈물 날 정도로 반가운 건 처음이야.”
너스레를 떠는 제임스의 말에 레너드도 동의하는 의미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에어컨 가동을 외쳤다.
서늘한 문명의 바람과 함께 셔틀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제임스와 레너드는 창 너머 조금씩 작아지는 버터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저기도 이제 곧 철거되겠지?”
“누군가가 그리워하는 또 다른 곳으로 변하겠지.”
“결국 버터 하우스는 여기에만 존재하겠군.“
제임스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장난스럽게 두드리며 레너드가 웃자 제임스가 바로 우주에서 제일 섹시한 닥터와 유능한 함장도 여기에 있지 하고 장난스레 응수하며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본즈, 마지막에 뭐 찍었어?”
“글쎄,”
이제는 익숙해진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며 레너드가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지구에서 확인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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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찌통물 3254689023개 보고 싶다… 커크와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가 다른 마음일리 없다고 확신하게 되는 본즈 보고 싶음. 물잔에서 결국 넘쳐흐르는 물처럼 자기 마음을 숨길 수 없게 된 날 같이 술 마시고 취해서 방에 돌아와서 자기 부축해서 눕혀주는 커크한테 짐 좋아한다 하고 고백했다가 커크가 못 들은척하고 본즈 눕혀주고 나가버리는 거 보고 싶다. 그 이후로도 커크의 태도는 매우 명확하게 그날일은 없었던 일 취급이고 그래서 본즈가 매우 씁쓸해하는 거 보고 싶음.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서럽고 원망스러워서 자꾸 커크한테 틱틱대게 되니까 커크가 하루는 날 잡아서 본즈 불러서는 이마 짚고 한숨을 쉬면서 본즈, 이러지 마. 망치지 말라고. 하는 게 보고싶음. 본즈는 거기서 대꾸하면 망한다는 거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결국은 대체 뭘 망치지 말라는 건데? 하고 대꾸해버리고 커크가 새파란 눈으로 응시하면서 내가 무슨 얘기하는지 알잖아. 하는 거 보고픔.
본즈는 막연히 걔도 그날 술 마셔서 못 들은 걸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의심을 실제로 확인받은 순간 더 와장창이고 그래서 그날 이후로 생활 전반에 회의 느끼면서 내가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나.. 그러는 거 보고 싶다. 그리고 탐사 중 멍 때리고 있다가 토착식물에게 공격당해서 배를 통째로 뚫리는 부상 입고 사경을 헤매면서 거의 삼 주간 의식 없이 누워 있다가 깨어남. 그건 마치 오랜 기간 참선한 승려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는 순간과도 같았음. 백 년 동안 봉오리로 맺혀 있다가 단 한 순간에 개화하고 즉시 스러진다는 연꽃처럼 눈을 뜬 단 한 순간에 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의 기억을 파노라마 필름처럼 죽 보고 이제 됐다고 생각하는 본즈.. 미련 떨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씨발 뭘 하는지 모르겠으면 지구로 가는 게 맞음. 짐 커크를 볼 때마다 좆같으면 안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거였음. 도대체 왜 그렇게 궁상을 떨었담.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너무 지쳐서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최저선이 꽁꽁 숨어버린 것에 가까웠지만 본즈는 드디어 자기 마음이 다 정리되었다고 생각함. 왜냐하면 짐커크를 봐도 생각해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마음도 치료가 필요한데 실컷 방치한 대가임.
봐도 아무렇지도 않고 뭐 느껴지는 것도 없고 함선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가짜처럼, 잘 조작된 연극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본즈는 한층 무덤덤하고 홀가분한 태도로 생활하기 시작함. 지상직을 알아보고, 커크와 자주 만나서 사과도 듣고, 괜찮다고 너스레도 떨고, 메디베이의 일을 인수인계하기 시작하고, 채플이 승진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추천장을 쓴다. 스코티를 비롯한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대원들의 소견서를 쓰고 건강검진을 토대로 한 주의사항을 편지로 작성해서 보내주고, 커크 얼굴을 보고 부서회의에도 참석하고 같이 술도 한잔씩 하고. 커크의 소견서와 편지는 안 쓸까 했는데 마음 다 식은 마당에 안 쓰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술 마시는 자리에서 줌. 커크는 처음에 뜬금없이 본즈가 건네는 봉투를 웃으면서 받았음. 이건 뭐야? 선물. 뜯어서 소견서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커크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음 소견서? 이게 선물이야? 누가 의사 아니랄까봐. 그리고 건강 주의사항을 쓴 편지를 읽으면서 커크의 표정이 굳기 시작한다. 본즈는 돌덩이같이 차갑게 식은 스스로의 마음에 놀람. 이제 커크가 그러거나 말거나 놀랍도록 신경이 안 쓰여서. 잔을 홀짝이면서 패드로 게임을 하다가 커크가 잔뜩 굳은 얼굴로 이게 뭐냐고 물어서 본즈는 패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함. 이별 선물.
커크는 본즈가 들여다보던 패드를 뺏어버림. 본즈가 혀 차는 소리를 냈음. 이리 내놔, 짐. 신기록 직전이라고. 뭐? 지금 그런 말이 나와? 그럼 안 나올까. 본즈는 패드를 들고 식식대는 커크를 들여다봄. 저 얼굴이, 저 표정이 내 것이길 눈물 나게 바랐던 순간이 분명 있었는데. 놀랍도록 감흥이 없고 그 기억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타인의 기억같이 느껴짐. 그게 정말로 내 감정이긴 했을까? 커크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본즈를 붙듦. 본즈. 요즘 우리 잘 지냈잖아. 문제없었잖아.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본즈는 고개를 갸우뚱함. 그냥 우주에서 지내는 게 지겨워서 그러는데. 실감이 안 나서. 지상직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내가 갈만한 연구소에 자리가 났더라고. 그래서 가려고. 커크는 무너지기 직전의 표정으로 본즈를 보다가 겨우 입술을 깨물고 말함. 본즈. 전에 내가 네 고백 거절했던 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지금… 잠깐, 짐. 본즈는 커크의 말을 끊었음. 남의 기억. 남의 감정. 도저히 내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어떤 순간의 화면들. 본즈는 머리를 긁적였음.
너 그때 그 농담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
본즈는 얼굴을 찡그렸는데 그건 도저히 커크 앞에서 억지로라도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일 정도의 의욕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임. 그렇지만 어쨌든 인간적인 반응 중 하나니까 나름 얠 대할 때의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다는 생각으로 얼굴을 찡그린 채 본즈는 커크의 어깨를 툭 쳤음. 짐. 그게 장난이었던 거 네가 더 잘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우주는 더는 싫어서. 영 시간감각이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거든. 지구에 가고 싶어서 계속 준비하고 있었어. 커크는 놀랍도록 반응이 없었음. 본즈는 혼자 떠들다가 좀 머쓱해져서 커크를 토닥토닥 두드림. 원래는 보고서로 알릴 생각이었는데… 뭐, 남들은 다 아니까. 늦게 얘기해서.. 본즈는 말을 하며 얼굴을 찌푸림. 미안한가? 얘한테? 아니, 안 미안한 것 같은데…
안 미안한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좀 피곤한 기분이 들어서 본즈는 말을 돌렸음. 그렇게 됐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연구소로 지원했어. 본부에 오면 좀 들리고. 커크의 얼굴을 힐끔 보고 본즈는 덧붙임. 안 들려도 상관없고.
보통 헤어질 때 뭐라고 하더라. 본즈는 궁리하면서 기억을 천천히 뒤졌음. 그리고 커크한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음. 짐. 네 함선에서 일해서, 그리고… 네 친구로 지낼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술자리는 어영부영 파함. 커크가 그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즈는 혼자 몇 마디를 꺼내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금세 흥미를 잃었고 커크를 위해 더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질리고 지쳐버림. 싫은데 뭐 하러 앉아있지? 본즈는 산뜻하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커크한테 밤인사를 건넴. 그럼 좋은 밤 보내, 짐. 나 먼저 들어간다. 커크를 자리에 남겨두고 본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휴게실을 나와 버림. 발걸음도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가로질러 방으로 돌아갔음.
본즈는? 스팍은 기다렸다는 듯 대꾸함. 오늘 하선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커크는 허, 하고 저도 모르게 숨을 토했음. 그리고 스팍한테 물음. 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스팍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시치미를 뗐음. 커크는 머리를 싸쥐고 고민에 빠짐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스팍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림. 저에게 함장 권한을 이양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커크는 허탈하게 웃음. 자네 많이 인간 같아졌어. 농담으로 받을 줄도 알고…어쨌거나 스팍의 말은 명확함. 내 일이라 이거지. 내 권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승인해야 하는 게 맞음. 그럼 감정은? 커크는 본즈가 의식 없이 누워있던 3주를 떠올리며 이를 악뭄. 대원들이 다쳐서 의식 없이 누워있는 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도 아님. 그간 매일 무슨 생각을 했지?
커크는 본즈를 설득하기 위해 몇차례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함. 영문을 모르겠지만 본즈는 그 전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음. 마치 본즈는 죽고 본즈의 형태를 한 전혀 다른 생물이 본즈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커크는 본즈의 그런 변화를 기민하게 느꼈는데 대표적으로 자길 대하는 태도에서 그런 인상을 많이 받는다. 커크가 본즈랑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보기 위해 본즈를 호출했을 때 본즈는 신호가 20번이 넘게 울린 다음에야 호출에 응했음. 목소리는 여전히 평소대로였지만 시간 좀 내라는 말에 대번에 목소리에 귀찮음이 섞이는 걸 통신기 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음. 본즈는 한참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곤란하다고 늘어놓았는데 커크는 특유의 직감으로 본즈가 자길 피하는 게 아니라 귀찮아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챔.
그럼 내가 네 방으로 갈게. 잠깐이면 돼. 하선 승인에 대한 얘기야. 부러 하선 승인에 힘을 주어 말하자 본즈는 마지못해 몇 시까지 오라고 하고 먼저 통신을 끊음. 먼저 통신을 끊어버리는 레너드 맥코이라니.
커크의 얼굴을 보고 별말 없이 개인실 문을 열고 자리와 마실 걸 권하는 건 예전의 본즈와 다를 게 없는데 대화 내용은 그렇지 않았음. 커크가 어색하게 본즈, 하선 신청 말인데… 하고 입을 떼서 지금 당장은 무리이다, 후임도 정해지지 않았고 당장 본부에서 내려온 중요한 미션도 있는데 바로 내려 줄 수는 없다고 했을 때 본즈는 인상을 씀. 짐. 내 의료부는 유능해. 의료실장이 몇 주 정도 공석이어도 일 못할 놈들은 없다고. 좀 비워뒀다가 네가 직접 잘 맞을만한 사람을 데려와. 아니면 원래 있던 사람을 승진시키든가. 어렵지 않잖아. 왜 그래? 답지 않게. 커크는 겨우 웃음. 그러게. 답지 않게 왜 그럴까. 본즈는 관심 있던 연구소에 공석이 난 만큼 하선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얘기밖에 하지 않았음. 막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커크는 괜히 한 번 더 생각 바꿀 마음은 없느냐고 물었음. 본즈는 술을 마시면서 밝고 가벼운 표정으로 대꾸했음. 전혀. 이번에 지구 가면 뭐 할지 리스트 작성중인데. 한번 볼래냐? 본즈는 흐흐 웃으며 정말로 작성 중이던 버킷리스트를 띄워서 보여줌. 커크는 속이 쓰린 기분을 참고 힘겹게 웃으며 맞장구를 침. 그래. 재밌겠네.
아무리 질질 끌어도 승인하지 않고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음. 커크는 결국 레너드 맥코이의 하선 신청서에 싸인을 함. 영문 모를 한숨이 푹푹 흘러서 그날은 누구와 함께 술을 마실 수가 없었음. 텅 빈 휴게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면서 커크는 과거를 생각함.
자기가 이렇게 혼자, 연락도 없이 이 휴게실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으면 마치 원래 약속을 했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서 맞은편에 앉던 사람의 기억 같은 것. 실없는 소리, 재미없는 비유. 함장이 된 이후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떤 한 사람의 자취.
눈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음. 커크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죽여 울었지만 눈물이 멎고 울음이 저절로 그칠 때까지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어깨에 손을 얹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
어쨌든 함장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고 커크는 본즈를 항행 중 조우하는 가장 가까운 스타베이스 기지에 내려주기로 약속함. 크게 위험한 일도 없었고 새로 탐사할 행성도 당분간 없었으므로 일정대로 이별하게 될 것 같았지만 우주에서의 일이 늘 그렇듯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음. 엔터프라이즈는 근접거리에 있는 행성에의 외교업무를 맡게 되었음. 본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항로를 변경하게 되어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지 기지에 데려다주는 건 어렵겠다고 설명하자 본즈는 가볍게 수긍했음. 어쩔 수 없지. 커크는 본즈의 그 말, 만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다시 한 번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어쩔 수 없지. 본즈는 나를 따라 함선에 탄 이래로 저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 걸까? 본즈 같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기 마음을 준다는 것, 그걸 입 밖으로 내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만한 무게 아래서나 가능할 일이었을지 커크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음. 다만 막연하게 정말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뿐. 거의 대부분의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 일들이 본즈에게는 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임. 죽어나가는 대원도, 치료시기를 놓쳐 떠나보내야 했던 대원도, 손 쓸 새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눈을 감은 친구도,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무수한 상황들도. 본즈한테는 전부 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임. 그리고 아마도.
그 중 가장 큰 ‘어쩔 수 없는’ 건 자기 자신이었을 거라는 깨달음이 마음을 아프게 쳤음. 나에 대한 마음이나 그걸 입 밖에 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그게 본즈한테는 얼마나. 본즈는 그때도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고 넘어갔을까? 커크는 뒤늦게야 자기가 잘못 행동했다는 걸 깨달음. 놀라서, 어색해서. 낯설어서, 갑작스러워서. 거절할 거였다면 그런 식으로 거절해서는 안 되는 거였음. 제대로 들었다고 알리고, 미안하지만 너와 같은 마음은 아니라고 정식으로 말하고, 사과를 전한 뒤 제대로 거절했어야 했음. 그랬으면….
외교업무는 별 탈 없이 진행됐음. 특이점이라면 엔터프라이즈가 행성을 떠나기 하루전날 밤에 연회를 연다며 모든 승무원을 초대한 거였는데 커크는 행성연방과 이 행성간의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초대에 거절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함선 내에서 특별히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인원을 제외하고 나머지에게는 자율적으로 참석하라고 알림. 기술부는 대부분 참석하지 않고 함선의 제어관리를 위해 남았고 과학부와 의료부, 지휘부의 인원들이 대부분 연회에 참석함. 커크는 대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쭉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행성의 고위층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기보다는 본즈가 내려왔을지 아닐지 신경 쓰고 있는 쪽이 맞았음. 커크는 계속 연회장 입구를 힐끗대다가 연회 중반에 채플 간호사랑 함께 연회장에 입장하는 본즈를 발견함. 본즈는 세상 귀찮은 얼굴로 투덜거리면서도 그 행성 원주민이 가까이 올 때면 금세 낯빛을 바꿔 웃는 얼굴을 했음. 커크는 양해를 구하고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비집어가며 본즈한테 향했지만 본즈가 있는 곳에 도달했을 때 본즈는 채플의 손에 끌려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간 후였음. 커크는 딱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생각조차 없이 자리에 서서 본즈가 인파 사이로 빠져나오길 기다렸음.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고 유니폼이 아닌 만찬에 적합한 복장을 한 대원들 사이에서 본즈를 찾는 건 쉽지 않음. 커크는 안달을 내면서 본즈를 찾다가 다시 고위층을 만나 재빨리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풀려난 다음에 다시 본즈를 찾아 연회장 안을 헤매기를 반복함.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본즈는커녕 왠지 잔뜩 지쳐서 연회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음. 문득 고개를 돌리니 스팍이 우후라와 같이 춤을 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옴. 커크는 인상을 찌푸렸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스팍과 우후라는 우주에 나와서 항해를 하는 동안에는 연애 같은 건 아예 배제해놓고 살 것 같은 사람의 대표주자격이었는데 이 둘이 연애를, 심지어 지금도 계속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었음. 언제 죽을지 모르고. 위험하고,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항해 중에 어떻게 미래를 약속한 사람을 만들 수 있지?
그럭저럭 얼굴 비출 사람에게는 다 비춘 후에 진심으로 피곤해져서 연회장 가장자리로 물러난 커크는 그제야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본즈를 발견함. 아까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 쓸려 다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채플도 없이 혼자 테이블 근처에 서서 온갖 술을 다 맛보고 있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음. 그래. 이게 본즈지. 가까이 가서 뭐 하고 있냐고 묻자 본즈는 말없이 잔을 하나 들어 건넸음. 여기 술 괜찮더라고. 본즈는 커크한테 자기가 마셔보고 괜찮았던 것을 이것저것 밀어주고 입도 떼지 않고 물처럼 술을 들이킴. 커크는 분명히 본즈의 바로 옆에 서 있는데 아주 멀리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음. 심지어 그게 곧 현실이 될 텐데. 스팍이랑 우후라는 어떻게 계속 만날 수 있는 거지? 나는 저 둘이라면… 커크는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뗐음. 상대를 생각해서라도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항해 중에는 연애 같은 거 절대 안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 본즈는 별스러운 말을 다 듣겠다는 얼굴로 커크를 곁눈질하고 대꾸 없이 계속 술을 마셨음. 커크는 혼자 떠들기 시작함. 신기하지 않아? 계속 저렇게 만난다는 게. 나는 상상도 안 가는 일인데. 둘 다 여하튼 대단한 것 같아. 본즈는 잔을 기울이면서 듣다가 툭 내뱉음. 그게 이유야?
뭐?
그게 누굴 만나지 못할 이유냐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커크가 멍해져서 대꾸하지 못하는 동안 본즈는 앞에 모아뒀던 잔을 마지막까지 비우고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뒤 커크를 남겨두고 자리를 떴음. 커크는 멀어지는 본즈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 붙잡지 못함. 무슨 뜻이야, 본즈? 멀어지는 본즈의 뒷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기 직전 커크는 겨우 정신을 차렸음. 또, 또?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정신을 차리자 본즈의 팔목을 틀어쥔 채 연회장 바깥쪽 인적 드문 회랑으로 나와 있었음. 본즈가 멀뚱히 커크를 쳐다보면서 잡힌 팔을 흔들었음. 놔. 아파. 커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사과한 뒤 손을 놓았음. 그런데… 손을 놓자마자 본즈는 바로 몸을 돌려 연회장으로 향함. 커크는 깜짝 놀라 본즈의 어깨를 다시 붙들었음. 본즈가 미미하게 인상을 쓰면서 다시 한 번 놓으라고 반복해 말했음. 커크는 마른침을 삼키고 얘기 좀 하자고 말함. 본즈는 커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음. 또, 또 예상외의 대답. 커크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버버하는 사이 본즈는 침착하게 어깨에 얹힌 커크의 손을 잡아서 가볍게 털어냄. 그리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가볍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음. 시간을 좀 내달라고 부탁을 받았을 때 항상 그럴 의무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지금은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외교업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엔터프라이즈는 의료실장의 교체를 위해 가장 가까운 스타베이스기지로 향함. 항행 내내 커크는 복잡한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연회장에서의 본즈의 대화와 스팍과 우후라의 모습에 골몰했지만 여전히 별무소득이었음.
업무 인수인계를 끝내고 본즈는 마지막 3일정도는 손님의 신분으로 엔터프라이즈에 머물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간 동안 커크가 뭔가 같이 하자는 건 거절하지 않았음. 커크는 마지막 3일 동안 본즈와 가장 긴 시간을 보냄. 이틀은 커크 역시 휴가를 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있었음. 둘은 지구의 신문을 읽고, 3차원 체스를 두고, 홀로덱에 들어가서 같이 게임을 했음. 재조합기를 업데이트한 다음에 새로 추가된 메뉴를 각각 시켜서 먹어보면서 점심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고 술루의 온실에 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시간을 보내기도 함. 저녁에는 역시 술을 마심. 하지만 이전과 달리 본즈는 취하도록 마시는 일이 없었음. 커크는 속이 타서 물같이 술을 들이붓는데 본즈는 몇 잔을 마시고 나면 잔을 밀어 치워두고 안주를 주워 먹으면서 커크의 말에 농담조로 맞장구를 쳤음.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민감하게 본즈의 속내를 느낄 때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서 커크는 애만 태우면서 시답잖은 농담이나 할 수밖에 없었음. 왜 더 안마시냐고 묻자 본즈는 심드렁하게 이제 취하는 건 싫다고 대꾸함.
하하. 술기운에 억지로 웃긴 웃는데 눈물이 날 것 같고. 본즈는 시큰둥하게 앉아서 그런 커크를 보면서 감정이란 뭘까 생각한다. 하긴 파멜라랑 결혼했을 때도 그랬네. 뭐가? 하는 커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본즈는 자기가 생각을 입 밖에 낸 걸 깨달음.
못할 얘기도 아니고… 본즈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염. 신기해서. 내가 옛날에 파멜라랑 결혼했을 때, 이혼했을 때. 그때는 정말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 많이 했었거든. 헤어질 때도 딱 죽을 것 같았고. 그런데 지금은 남의 일같이 덤덤해. 그때 왜 그랬나 싶고. 그냥 좀 신기해서. 본즈는 너무 쓸데없이 많이 떠들었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남. 비틀대며 따라 일어나는 커크의 어깨를 다독여서 눌러 앉히고 본즈는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말했음. 너도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간다.
마지막 날은 본즈랑 같이 보내지 못함. 송별 파티가 열렸고 일이 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본즈랑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음. 커크는 먼발치에서 본즈를 보면서 생각함. 한명 한 명에게 손 글씨로 적은 소견서와 편지, 스팍과 우후라. 그게 이유냐는 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본즈. 갑자기 사무치게 외로워져서 커크는 울컥함. 본즈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보였음. 이걸 바랐던 거 아니었나? 본즈의 고백에 당황했지. 왜 이런 말을 하나 원망했고, 없었던 일로 취급하려고 했음. 듣지 못한 것처럼 모른척해서 없었던 일처럼 취급하고 싶었음. 본즈는 소중한 친구였고, 연애를 할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래서 과연 지금 후회하지 않을만한 결과가 돌아왔나? 다시 돌이켜 생각해도 여전히 본즈와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음. 하지만 만약에 그러자고 했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임. 사람들 사이에서 잔뜩 뭔가 떠들다가 본즈가 문득 커크 쪽으로 시선을 돌렸음. 그리고 씩 웃음. 커크는 자기한테 웃은 건가 해서 마음이 철렁하는데 그 순간 커크의 등 뒤에서 체콥이 튀어나가 본즈에게 매달렸음.
본즈는 웃는 얼굴로 체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뭔가 다정하게 속삭임. 커크는 정신이 없었음. 본즈가 사고를 당한 이래로 본즈는 단 한 번도 커크를 향해 웃지 않았는데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눈앞이 흐림.
아, 이제 와서.
답답하고 속이 타니 시원하게 느껴지는 건 술뿐임. 영혼의 고통에 약이 되는 것은 오직 술밖에 없나니. 파티는 가볍고 훈훈한 분위기였고 다들 울고 혹은 웃으며 송별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 급속도로 취하고 있는 건 커크뿐이었음.
내일은 스타베이스 기지에 입항하는 날이니 더 바쁘고 할일이 많아서 파티는 일찍 파했음. 혼자 테이블에 엎드려 반쯤 잠들어있는 커크를 보고 본즈는 한숨을 쉬었고, 자기가 데려다 놓겠다는 스팍을 거절하고 등을 떠밀어 우후라에게 돌려보냄. 본즈는 끙 하고 시체같이 늘어진 커크를 떠메고 커크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음. 복도를 가로질러 커크의 방 앞까지 갔을 때쯤엔 이미 땀범벅에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임. 왜 이렇게 마셔댔냐? 듣지도 못할 말을 투덜대면서 본즈는 커크를 깨워 문을 열라고 다그침. 커크는 본즈가 자기 쿼터 코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림. 또다시 슬픔이 넘실거려 눈가를 때렸음. 커크를 몇 차례나 깨운 본즈는 커크가 반응이 없자 그제야 짧게 투덜대며 패널에 손을 댐. 나중에 왜 네 맘대로 문 열었냐고 하기만 해봐라.
커크를 침대에 거의 내동댕이치다시피 던진 본즈는 신음하며 허리를 겨우 폈음. 그냥 도와준달 때 도와 달랠걸. 누운 채 눈을 감은 커크의 옷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본즈는 이불만 끌어다 커크의 목까지 덮고 방을 나가려고 했음. 커크가 갑자기 잡지만 않았어도.
커크는 이번에는 눈이 젖어드는 걸 참지 못함. 눈물이 배어나오는 얼굴을 감추지도 못한 채 커크는 본즈를 붙들고 물었음. 안 가면 안 돼, 본즈? 본즈는 한숨을 푹 쉬고는 커크를 토닥토닥 달래 커크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냄. 커크는 더럭 겁이 나 더 절박하게 본즈한테 엉겨 붙었음. 상체를 벌떡 일으켜 본즈를 붙잡자 본즈는 오만상을 쓴 채 한숨을 쉬면서 결국 커크의 침대 가에 앉았음. 짐. 왜 그래. 안 되는 거 알면서.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다정하고 체콥을 대하던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더 슬퍼졌음.
본즈. 한번만 더 기회를 줘. 커크는 이제야 그때 본즈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느낌. 이랬구나. 내가 ‘왜 본즈는 그런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고 고백 따윌 해서 어색하게 만드는 거야’ 따위의 원망을 하고 있었을 때 본즈가 느끼던 심정은 이런 거였구나.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이 마음이 흘러넘쳐 쏟아져버릴 수도 있다는 걸 커크는 이제는 알 수 있었음. 본즈는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미 발령장 나왔어. 내일이면 하선이거든요, 함장님. 하면서 커크의 이마를 좀 밀었음. 장난어린 손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음. 내가 못 들은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널 대할 때 네 기분이 이랬을까. 목이 메는 걸 참고 커크는 본즈를 절박하게 붙잡음. 본즈. 주정부리는 거 아냐. 너무 늦게 깨달아서 미안해. 가지 마, 제발.
본즈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커크의 가슴팍을 눌러 눕히고 자리에서 일어났음. 짐. 오늘 너무 과했지? 취해서 기억도 안 나겠지만 앞으론 술 이렇게 마시지 마라. 잘 자고. 커크는 눈을 깜빡이며 본즈를 쳐다봄. 본즈는 컴퓨터를 불러 조명을 낮추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 버렸음. 커크는 멍하게 본즈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다가 뒤로 털썩 누워버렸음. 실소가 흐름. 아.
이런 거였구나.
다음날 엔터프라이즈는 예정대로 무사히 스타베이스에 입항함. 본즈는 간단하게 들고 갈 수 있는 짐을 싸서 가방을 든 채 나왔음. 송별 파티에 참석하지 못해 작별인사를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도크에 일제히 모여 있음. 커크는 스팍과 함께 조금 뒤늦게 도착했음. 손이 닳도록 악수를 나누던 본즈가 커크와 스팍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왔음. 본즈는 먼저 스팍에게 손을 들어 벌칸 인사를 해 보이고 스팍의 어깨를 팡팡 치면서 앞으로 잘 지내고 건강하라는 인사를 건넸음. 그리고 커크에게 몸을 돌림.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낯섦. 모르는 타인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커크는 손을 내밀었음. 본즈가 성큼 다가와 커크의 손을 맞잡으면서 아까 스팍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커크의 어깨를 팡팡 쳤음. 잘 지내고, 짐. 건강 잘 챙겨라.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탐사 나가면 몸조심하고. 술은 적당히 마셔. 또 뭐 있지? 옆에서 채플이 헤어지는 날까지 건강 얘기밖에 안하세요? 누가 의사 아니랄까봐~ 하며 야유를 보냄. 본즈가 멋쩍게 웃었음. 내가 그랬어?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후에 본즈가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커크에게 말했음. 짐. 우주가 지겨워서 내리는 거긴 하지만 혹시라도 다시 우주에 나오고 싶어지면 그때 엔터프라이즈에 내 자리가 있을 거라고 믿어도 돼? 지구 생활 지겨워지면 다시 돌아올게. 슬프다고 밤에 울지 말고. 커크는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음. 물론이지, 본즈. 없는 직책을 만들어서라도 자리 내 줄 테니까… 혹시 우주에 다시 나오고 싶어지면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해. 오, 역시 믿을 건 연줄뿐이구만. 든든하네, 커크 대령님. 본즈의 너스레에 또다시 웃음보가 한바탕 터졌음.
도크로 우르르 몰려나가는 사람에 섞여서 커크는 다시 한 번 본즈를 끌어당겨 껴안음. 어깨를 끌어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음. 놔주고 싶지 않아 저도 모르게 본즈의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계속 끌어안고 있자 본즈를 비롯해 주변사람들도 다 묘한 기류를 느낀 듯 표정이 어색해짐. 깨닫지 못한 건 커크 혼자뿐이었음. 본즈가 귓속말로 짐, 이것 좀 놔. 하고 속삭이고 옆에서 스팍이 박사도 그만 내려야죠 하고 말을 하고 나서야 커크는 자기가 좀 이상하게 보일 만큼 본즈를 꽉, 오래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음. 어색하게 팔을 풀어 몸을 떼어내는데 본즈가 씩 웃으며 커크의 양어깨를 툭툭 쳤음. 이런, 지미보이. 친구랑 헤어지는 게 그렇게 섭섭할 줄은 몰랐는데. 이리 와봐. 형님이 찐하게 포옹해줄 테니까. 커크는 불현듯 본즈의 태도에서 기시감을 느낌. 입 밖으로 나왔지만 아무도 듣지 않고 버려진 말. 그 말이 소리가 되어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처럼 외면하는 태도. 본즈는 정말로 커크를 끌어당겨 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꽉 껴안아준 뒤 몸을 뗐음. 그리고 손을 한번 흔들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했음. 뒤늦게 주변에 모여 있던 대원들 사이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커크는 불현듯 직감적으로 저 뒷모습을 보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함. 저도 모르게 주춤 앞으로 나갔던 걸음이 점차 뛰기 시작해 스타베이스 도크스테이션의 번잡한 인파를 뚫고 본즈의 팔뚝을 붙들었을 때는 숨이 턱에 닿게 헐떡이고 있었음. 본즈가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면서 아직도 할 말이 남았냐고 물어서 커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음. 본즈. 어제 내가 했던 말 진심이야. 주정이나 말실수 같은 거 아니야. 필름 끊긴 적도 없어. 정말이야. 내가 너무 늦게… 짐. 본즈는 횡설수설하는 커크의 말을 차분하게 잘랐음. 곤란한 미소를 띤 채 본즈는 차분히 커크의 손을 잡아 떨어냄. 헐떡이는 커크를 잡아 똑바로 세워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뒤 본즈가 고개를 저었음.
짐, 이러지 마.
망치지 말라고.
얼어붙은 커크를 내버려둔 채 본즈는 몸을 돌렸음. 잘 지내, 짐. 건강하고. 지구에 오면 연락해. 시간이 맞으면 술 한 잔 하자고. 태평한 어조는 걸음에 따라 흔들리면서 작아짐. 본즈의 뒷모습이 인파 틈으로 점점 매몰되어 사라지는 걸 보면서도 커크는 꼼짝도 할 수 없었음. 스팍, 우후라. 망치지 마. 그게 이유야? 여러 가지가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음. 제임스 커크는 뒤늦게 왜 자기가 본즈와는, 본즈하고만큼은 연애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지 이유를 깨달았지만 너무 늦은 뒤였음.
어느 순간을 넘기기 전까지 이 손 안에 전부 다 있었는데. 커크는 텅 빈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음. 사방은 사람으로 가득한데 전에 없이 외롭고 적막했음. 본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음. 사실 눈앞에 있을 때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음. 커크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울었음.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던 건 너무 사람이 많아서, 항구 도크스테이션에서 애같이 팔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우는 사람이 제임스 커크 함장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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