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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낙스의 생애 | 청교도의 창시자 |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 |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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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 존 낙스 – 크리스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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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am 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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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편지]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옵소서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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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편지]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옵소서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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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양식 > 명언 > 존 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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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선지자와 존낙스의 기도, 그리고 프랭클린의 기도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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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선지자와 존낙스의 기도, 그리고 프랭클린의 기도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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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낙스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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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녹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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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갤리선 노예 시절[편집]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편집]

녹스와 메리 1세[편집]

평가[편집]

저서[편집]

각주[편집]

참고문헌[편집]

존 녹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존 녹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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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 존 낙스

칼빈을 통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개혁과 부흥의 봉화를 높이든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존 낙스였다.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부였으나 칼빈주의를 추종하면서 당시 스코틀랜드의‘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로마 카톨릭 신도인 메리여왕과 투쟁을 하면서 장로교를 스코틀랜드에 정착시켰다.

개혁신학의 기초를 존 칼빈이 세웠다면 장로교의 영성과 목회적 기초는 존 낙스가 세운 것이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였지만 동시에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메리여왕 조차도 그의 기도를 두려워하면서 “백만 군사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고 고백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하나님께 “스코틀랜드를 주시든가 아니면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가까운 해딩턴(Haddington)에서 태어나 14살 때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이 화형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 후 조지 위샤트를 만나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시대적 배경

당시의 스코틀랜드 정치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혼란 그 자체였다. 계속해서 나이 어린 왕들이 즉위하면서 섭정으로 이어져 왕권은 미약하였고, 귀족들은 분열하였으며, 교회는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정치 투쟁에 휩싸이기 일쑤였다.

또 교회는 오랫동안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성직자들과 교회의 주교, 수도원장, 수사들은 무지에 빠져 있었다. 성경에 바탕을 둔 설교는 사라졌고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만이 구원에 필수적이며, 죄 사함은 미사의 제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배웠다. 그들의 그릇된 삶이 그릇된 교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6세기 초쯤 위클리 파의 가르침과 존 후스의 개혁사상이 스코틀랜드에 들어오게 되고 또한 윌리엄 틴데일의 신약 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성경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개신교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성경읽기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이런 암울하고 타락한 시대를 목격한 존 낙스의 가슴에 교회 개혁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각성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

하나님만 두려워 한 존 낙스

존 낙스의 종교개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고, 스코틀랜드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낙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성에 포위되어 포로로 잡혀 있기도 했다.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노예선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교황의 추악한 삶을 폭로하고 카톨릭교회의 교리와 교회법을 비판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카톨릭교회 추종자인 메리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즉시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목회자들이 처형되었다. 낙스는 메리여왕의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칼빈이 있는 제네바로 향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나중에 낙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사르고 이단으로 정죄했다.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옆 건물에서 영국 피난민들을 섬기는 목회자로 영어 사용 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사역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두 여왕을 종교를 탄압하는‘괴물’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역자들과 함께 성경 전체를 새롭게 번역했다. 그것이 바로 1560년에 출간된 ‘제네바 성경’이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은 낙스는 복음적 교리들과 제네바의 종교개혁 원리를 가지고 12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1559년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교회는 카톨릭 일색이었지만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운동에 앞장섰다. 낙스의 설교의 핵심 교리는 선택과 칭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보혈이었다.

또 그는 개신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옛 카톨릭 왕국을 재건하려던 메리여왕에 맞서 세인트 자일스교회 강단에서 복음주의 교리를 주장하고, 로마교회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면서 로마교회와 교황제도를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했다.

메리여왕의 소환을 받은 낙스는 여왕 앞에서 로마교회를 창녀라고 부르면서 로마교회는 교리와 관습에서 벗어나 온갖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완전히 더럽혀져 있다고 서슴없이 주장했다.

청중을 사로잡았던 그의 설교가 회중들에게 성경적인 개혁 운동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자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스코틀랜드에 대 각성 운동과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1560년 8월,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의 날이 찾아 왔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배격하고 교황의 관할권을 폐지했다. 카톨릭 미사 집전을 금지하고,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낙스와 다섯 명의 개신교 사역자들이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하여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1560년 의회는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국가의 신조로 채택했다. 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 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이어 1561년 12월 5일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시작됐다.

스코틀랜드는 존 낙스의 개혁에 힘입어 개신교 국가로 변하여갔고 지구상에서 가장 칼빈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에딘버러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주어진 시대적 소명 앞에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개혁과 부흥의 불길을 높이 들었고 하나님은 그의 불꽃 같은 삶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며 그를 통해 결국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역사 앞에 선명하게 보여주셨다.

coram Deo

존낙스의 생애와 사상

당시의 스코틀랜드 정치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혼란 그 자체였다. 계속해서 나이 어린 왕들이 즉위하면서 섭정으로 이어져 왕권은 미약하였고, 귀족들은 분열하였으며, 교회는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정치 투쟁에 휩싸이기 일쑤였다. 그리고 유럽 열강은 신흥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군주제”의 발흥과 이것에서 야기된 숙명적인 역학구조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낙스 당시 종교 개혁의 시급성은 국가 내에서 로마 교회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500년에서 1560년 사이에 벌어진 각종 사건들을 통해 교회는, 특히 그 부유한 재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사회적 요소로 등장하였다. 교회는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국왕의 연간 수입이 17,000 파운드에 불과 했을 때, 교회가 거둬들인 수입은 년 간 300,000 파운드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로 인하여 최정상의 사회 계급을 차지한 인물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 재산을 좌우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교회의 내정 문제에 귀족들이 간섭하게 됨으로써 또 다른 결과를 낳게 되었다. 당시 횡행하던 족벌투쟁과 각종 정치적 책략 가운데 고위 성직자들이 귀족들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더글라스가가 해밀턴가를 에딘버러에서 쫓아낸 1520년의 “코즈웨이 숙청”사건에 던켈드주교 개빈 더글라스와 글라스고우의 제임스 비이톤 대주교가 연관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귀족 계급과 고위 성직자들이 밀접한 유착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성직자들이 국가의 재정 및 정치문제에 관련하면서 종교적 의무보다 여기에 더 심혈을 쏟는 예가 비일비재 하였다. 또 로마 교회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매우 부패해 있었다. 종교개혁 당시 열두명의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들에 의한 사생아 출신으로 보여 지는 많은 수도원장들이 또한 자신들의 사생아들을 많이 낳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해 볼 때에 하위 성직자들도 청교도적 금욕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겠다. 그러나 성직자들의 이러한 세속성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로마교회가 민중들에게 꼭 필요한 영적 갈구를 충족 시켜 줄 힘을 이미 잃었다는데 있었다.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

1560년에 스코틀랜드 국회는 종교의 변화를 포고하였다. 가톨릭 대신에 신교가 그 나라의 국교가 되었다. 대표적인 개혁자 존 낙스의 노력으로 칼빈주의의 신앙고백이 국교로 채택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시간적으로 독일, 스위스, 영국의 종교개혁보다 뒤지는 것이었으나 어느 나라보다도 철두철미한 개혁이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심장부를 두들겨 국민생활 구석구석에 영향을 주었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교회는 개혁의 시급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국가들 전부가 신교국이 된 것은 아니었다. 설령 신교국이 되었다하더라도 스코틀랜드처럼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한 국가는 없었다. 가령 독일 같은 나라를 보면 종교개혁을 단행하는 데에 놀라운 일을 함으로서 다른 나라들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교리들을 실제생활에 완전히 옮겨 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근거한 교회정치수립에 목표를 두었다. 그들은 개혁원리와 그들이 채택한 장로교제도를 직접 사도들의 교훈에 입각하여 정립하였다. 이 시대의 낙스의 등장은 여호와 이레라고 할 수 있다. 낙스의 사상과 활동의 가장 근본적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그의 프로테스탄트로의 개종이었다. 수사였던 낙스가 위샤트에 의해 개혁사상을 접한 이후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성경적 관점으로 재조명해 보면서 종교 및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낙스의 등장>

존 낙스가 태어난 날짜와 장소에 대해 역사가들은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1505년경에 해딩턴이라는 시골 마을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카톨릭 신앙으로 양육되었다. 그리고 그가 해딩턴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수사로 교육 받았다는 말도 있다.

낙스는 라틴어에 숙달된 후, 1521~1522년 겨울에 글라스고우 대학교에 보내어졌다. 그 때 그의 나이 열 일곱이었다. 낙스는, 동시대의 교육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라틴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훨씬 후반에 가서 그는 독학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웠습니다. 또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존 메이저(John Major)의 영향을 받았다. 메이저는 스코틀랜드의 장래를 위해 프랑스와 가깝게 지내기보다는 영국과의 평화 관계 유지가 필요하며, 왕정의 독재자가 시민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급진 사상을 가진 자였다. 낙스는 대학에서 이러한 급진 사상뿐 아니라 교회법도 공부하였다. 그는 신부로 활동하다가, 때로는 공증인(apostolic notary)으로, 위셜트를 만나기 직전에는 귀족 자제들의 개인 교사로 활동하였다. 낙스는 1540년쯤 회심했으며, 위셜트를 만났을 때 그의 신앙은 틀림없이 개신교적이었으나 개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다분히 루터적이고 반교황적인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1529년경에, 그는 교회법에 정해진 나이가 되기 전에 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제롬과 어거스틴의 저술을 읽으면서, 차츰 스콜라신학 연구를 그치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많은 미신들을 내던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정식으로 자기가 프로테스탄트임을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서서히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지하는 말을 하자 비튼 추기경은 그를 죽이려고 자객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를 유력한 두 가문의 보호 하에 두셨다.

이 무렵 조지 위셜트가 낙스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루터파 신앙에 관한 지식을 그의 동포에게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스코틀랜드 개혁 교리에 관한 그의 매우 진지한 설교는 새로운 신앙을 수립하는 원인이 되었다. 위셜트를 만나 후로 낙스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초대 교회의 유일한 참 개념”을 스코틀랜드에 세우려는 그의 욕망의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는 이제 위대한 소명을 분명히 깨닫고, 열렬하게 위셜트에게 가담했다. 위셜트는 1546년 3월, 세인트 앤드류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두 달 후 비튼 추기경이 살해 되었다. 용의자로 낙스가 지목 되었고, 감금당하게 된다.

낙스가 위셜트 순교 후 세인트앤드루스의 수비대에서 설교할 때 그의 나이는 30세 정도였다. 낙스는 당시 스코틀랜드의 최고 지식인들인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교수들과 일반 대중 앞에서 최초의 설교를 하였다.

그의 스승 존 메이저도 이 청중들 속에 있었다. 낙스는 다니엘 7:24, 25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를 적그리스도라 해석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청의 교리 이탈과 역대 교황들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이었다. 이 첫 설교를 통해 우리는 낙스의 소명에 대해 몇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낙스는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주장들을 정당화하였다. 둘째, 그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하나로 인정하였다. 셋째, 예배의 근간은 성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심장을 쪼개는 “파괴력”이 있었다. “어떤 자들은 교황제의 가지들을 쳤으나 그는 뿌리를 쳤다.” 낙스의 열정적인 설교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모인 훈련되지 않은 시민들과 조직 없는 수비대는 가톨릭과 왕실을 당해 내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왕실은 섭정, 기즈의 메리(제임스 5세의 미망인)를 통해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 제독 레옹 스트로찌(Leon Strozzi)의 지휘 아래 도착한 20여 척의 갤리선 대포가 성을 포격하였고, 낙스를 포함한 전수비 대원들이 포로가 되었다. 낙스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 “노트르담”(Notre Dame) 호에서 노젓는 노예로 일했다. 노트르담이 소속한 함대는 여름엔 루앙(Rouen)에 주둔하여 영국 해적들의 침략 행위를 방어하였고, 겨울에는 본거지인 낭트(Nantes)에 주둔하였다.

낙스는 노예 생활을 통해 인간의 가혹성과 잔인성을 보았다. 그가 치룬 노예 생활은 참담한 것이었다. [보통 갤리선의 길이는 일백 오십 피트에 달하였으며, 길이가 오십 피트 가량 되는 돛대를 달고 있었다. 선미에는 선장용 객실 하나와 창고가 있었고 노예들이 앉아 있는 의자들 한가운데는 우뚝 솟은 복도가 자리잡고 있어서, 감독이 이 위로 왕래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노예들을 말로, 또는 폭력으로 다스렸다. 한편에 대개 스물 다섯 개의 노가 있었고, 한 노에는 여섯 명의 노예들이 배당되었다. 보통 삼백 명 정도의 노예가 한 배에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쇠사슬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항해 중에 이들은, 밤에는 의자에 묶인 채 잠이 들었으며,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비, 바람, 추위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를 수선하거나, 청소할 때, 혹은 겨울에는 육지에 있는 오두막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갖가지 곤경을 당해야 했을 것이다······낙스와 그의 동료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악질적인 죄수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낙스는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갤리선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을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신다고 믿었다.

아울러 이 고통의 시기에 그는 낭트 주위에 살고 있는 프랑스 개혁주의자들과 산발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 1549년 영국 정부의 교섭으로 낙스는 극적으로 해방되었다. 영국에서 낙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로 교환의 방법으로 그를 구해낸 것이다.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은 낙스는 잠시 스코틀랜드의 귀환을 보류한 채 5년 동안(1549-54), 베릭(Berwick)과 뉴캐슬(New castle)에서 목회로, 런던에서는 설교로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는 따뜻한 우정을 나눔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노예 생활로 인해 생긴 위궤양과 신장염도 목회 기간 동안 치료되어 갔다. 성경 연구와 좋은 주석을 읽는 데도 열심을 내었다.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노햄 성(Norham Castle) 장군의 딸인 마조리 보우즈 (Marjory Bowes)도 이때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 6세는 낙스의 탁월함을 인정하고 그를 여섯 명의 궁정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지명하여 설교를 시켰다. 영국 체류 기간에 낙스는 모든 삶의 원리와 신앙을 성경에서 찾으려 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낙스를 “청교도의 창시자”로 평한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청교도주의의 기원은 정신과 원리면에서 윌리엄 틴데일이지만, 그 원리를 보다 분명히 한 자는 낙스라고 한다. 낙스는 “기성인”이 아닌 “독립적인 사람, 독자적 사상을 구축한 사람”이었고, 이 독립성은 “스스로 성경을 읽는 자세,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에 관계없이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으로 나타나며, 이것을 가졌기에 그는 청교도의 창시자이다.

이 외에 낙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기에 청교도의 창시자이고, 그 주도 원리에 기초해서 철저한 개혁을 믿었기에 청교도의 창시자이다. 청교도로서 낙스에게는 개혁이 단순한 수정이 아니고 새로운 형성이었으며, 이 개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낙스는 영국에서 목회하는 동안 1548년판 에드워드 6세의 공기도서(Order of Common Prayer)나 1549년에 발행된 성공회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사용을 거부했다.

그 대신 설교를 중심으로 자기가 고안한 예배 순서를 사용하였다. 낙스는 제목 설교나 본문 강해 설교를 주로 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에도 본문 요절의 교리적 의미를 반드시 시대 상황에 적용시키도록 하였다. 낙스가 전한 말씀 앞에서 개개인의 죄악과 세상의 타락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낙스는 성례를 집행할 때도 영국의 공식 규정에 매달리지 않았다. 낙스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스스로 성찬 예배 양식을 개발하였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요한복음 13:16에 기초한 설교를 하고, 그 후에는 믿음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다음에는 고린도전서 11:17-31에 있는 성만찬에 관한 바울의 설명을 낭독하였다. 그 후에 회개하지 못한 죄인들에게 성만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신자들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다음에는 고백의 기도와 성경에 기록된 용서의 약속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다시 회중 전체를 위해 기도를 올린 후, 식탁에 앉은 교인들에게 보통 빵과 포도주로 된 예품들을 분배하였다.]

낙스는 성찬식을 집행할 때 가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파의 공재설을 부정하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지지하였다. 베릭에서 남긴 그의 글은 이 문제를 보다 확실히 해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이 입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받아들이도록 자신을 주셨으니, 이는 본질의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대로, 마치 구약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성찬을 통해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낙스는 성찬에 관하여 또 하나의 혁명적 변화를 시도했다. 그것은 성찬을 받는 방법의 변화였다. 당시 국교도들은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것을 관례화했다. 낙스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 때 앉아 계셨으므로 성도들도 당연히 앉아서 성찬을 받으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실행하려 했다. 후대의 영미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는 의미에서 성찬시 무릎을 꿇지 않고 앉아서 빵과 포도주를 받았다.

1552년 11월 “제2 공기도서”가 반포될 때, 낙스가 외친, 성찬을 무릎 꿇고 받는 데서 오는 위험 특히 우상 숭배의 가능성을 막기 위한 조항이 다른 종이 한 장에 인쇄되어 이미 출판된 기도서에 풀로 붙여졌다. 낙스가 왕 에드워드 6세에게 직접 설교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냈기 때문이다. 이 개신교적 설명은 “검은 예배 규정” (the Black Rubric)으로 호칭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성찬에 관해서는 낙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낙스는 출교 처분을 받았던 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부했다. 다른 국교회 사역자들은 그런 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낙스는 교회의 권징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교황제의 잔재인 국교회의 감독직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가 “검은 예배 규정”으로 유명해지자 에드워드 6세의 섭정인 노섬벌랜드 공작 측에서 낙스에게 로체스터(Rochester)의 감독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낙스는 정중히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낙스는 정치가와 야합하여 감독이 되는 것을 싫어했고, 그 위에 성경이 감독 정치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에드워드 6세가 죽자 메리 튜더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고,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300여 명이 순교하고, 800여 명이 대륙으로 피난해야만 했다. 낙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낙스는 1554년 1월 프랑스 디에프(Dieppe)로 망명 후 3월 초에는 제네바의 칼빈을 찾았다. 낙스는 칼빈을 만나자 그동안 의문을 가졌던 것들에 대해 여러 가지 신학적 질문을 던졌다.

[미성년자로서 부왕의 왕위를 계승한 이도 합법적 군주로 인정하고 순종해야 할 것인가? 여인이 일국을 통치하는 경우, 이 권리를 남편에게 양도할 수 있는가?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집권자에게도 마땅히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이 경우, 지방의 수령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도시, 촌락을 점령하는 것은 합법적일 수 있는가? 우상 숭배하는 통치자에게 반기를 드는 귀족들을 그리스도인들은 후원해도 좋은가?]

칼빈은 낙스를 반가이 맞이하고 위의 질문들을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들인 로잔의 비레와 취리히의 불링거에게도 할 수 있도록 낙스에게 기회를 주었다. 불링거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에드워드 6세는 신민들의 복종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합법적 통치자라는 데 동의 [하고, 이 말은] 곧 스코틀랜드의 메리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다]······원칙적으로 여자가 통치한다는 데에는 반대하나, 일단 합법적으로 즉위하였을 경우 그 국가의 법이 허락한다면 남편에게 통치권을 넘겨 줄 수 [있다]. 상 숭배적 통치자들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사례별로 이들을 검토해야 [하며] ······우상 숭배하는 통치자에 반란을 일으키는 귀족들의 문제 역시 상황과 양심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특히 이러한 상황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려는 위선자들은 제거해야 하며, 항상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는 겸허한 정신으로 행동을 취해야 한다.]

칼빈은 불링거의 견해에 전반적으로 찬성하였다. 그러나 여성들의 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타난 여선지 드보라를 예로 들면서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무력 항쟁으로 통치자를 제거하려는 낙스의 생각에 반대하였다. 낙스는 이와 같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들의 답변에 상당히 실망하였다. 이후, 낙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영국인 피난민 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고 부임하였으나, 곧 영국 성공회식 교회 관리를 주장하는 리처드 콕스와 대립하여 결국 칼빈이 사역하고 있는 제네바로 이동하였다.

<낙스의 제네바 사역>

낙스가 칼빈주의를 알게 된 것은 프랑스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로 추측된다. 낙스는 프랑스 해군의 갤리선 노트르담 호에 강제로 승선되어 중노동을 했지만, 이 배가 루앙과 낭트에 정박할 때는 육상 근무를 할 수 있었다. 1548년에는 이 지역에도 칼빈주의가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낙스가 프랑스 개혁주의자들을 만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신빙성 있는 증거는, 낙스가 칼빈이 쓴 예레미야 주석을 이미 1549년에 알고 있었고, 1550년에 간행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었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보아서 학계는 낙스가 영국에 들어가기 전에 제네바를 방문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학계의 연구가 신빙성 있다고 볼 때, 영국 체류 때 낙스의 신앙은 상당 부분이 칼빈주의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리처드 콕스와의 대결 양상도 낙스의 개혁주의 신앙과 콕스의 성공회 신학의 마찰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콕스와 헤어진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바로 옆 건물에서 약 200여 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돌보게 되었다. 이때 낙스는 칼빈의 예배 모범서를 본따 “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The Form of Prayer and Ministration of the Sacrament)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했다.

예배 순서는 “죄 고백과 시편 낭송, 주의 강림을 간원하는 기도, 설교 및 그 후의 질의 응답, 목회자의 기도, 축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찬식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성도들이 원할 때 실시했고, 세례식은 순서 중에 기도와 설교가 포함되어 은혜롭게 행해졌다.

교회 행정은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 직분들은 매년 선거를 통해 주어졌다. 매주 목요일 세 직분자들은 함께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고 치리를 행했다. 치리는 개인적 권면, 공개석상의 꾸지람, 파문 등의 절차를 밟았다. 치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실시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일 년 정도 그곳에 가 있다가 1556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영국에 있는 장모와 아내까지 데리고 왔다. 그는 가장으로서, 목회자로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진술한다.

[······전에는 전혀 당해 보지 못했기에 더욱 두려운 날마다의 가정사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순진한 양떼들을 다스려야 하는 일 등으로 정신없이 쫓기다 보면, 나는 소중한 친구들뿐 아니라, 나 자신을 망각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

칼빈과 낙스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접촉을 밀접하게 나누었다. 칼빈은 낙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제네바에서 낙스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사 계급인 지도층 위그노들과 그들을 따르는 상인들, 인쇄업자들 그리고 학자들이 칼빈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영국, 폴란드, 스페인에서도 뛰어난 지식인들이 칼빈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낙스는 직접 간접으로 그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사상 체계와 신학의 폭을 넓혔다. 낙스는 그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제네바 생활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저는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채, 이곳이야말로 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들에서도 그리스도는 진실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과 종교가 이처럼 신실하게 개혁되어 가는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낙스는 4년 동안(1555-59) 이곳에서 영국인들을 돌보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종교 탄압이 수그러져 제네바의 영국 피난민들이 속속 귀국하였기에 낙스도 새로운 일감을 찾아야 했다. 낙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국에 들아가 목회 사역과 궁중 목사직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완성으로 남겨 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재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으로 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1558년 낙스는 칼빈과 의논하지 않고, 여인의 괴수 정부에 대한 첫번째 나팔 소리(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여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이 책자는 개신교를 박해하는 스코틀랜드 섭정 기즈의 메리와 영국 여왕 메리 튜더를 염두에 두고 썼으며, 여인의 국정 관여와 통치 행위의 부당성을 탄핵한 것이었다. 낙스는 말한다.

[자연의 빛,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질서, 여인들을 향한 저주와 악담,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의 해석자인 성 바울의 말,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존경을 받아 온 저자들의 지혜에 의해 조명된 규칙과 법령에 의하면, (여인들의 지배는) 자연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역행하는 것임이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여인이 국가와 제국을 손아귀에 넣고 남성을 지배하거나 국가, 영지, 지방, 도시의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는 일이다······그러므로 모든 남자들은 이제 나팔 소리가 한 번 울렸다는 사실을 명심할지어다.]

공교롭게도 1558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해였다. 여왕은 낙스로 인해 명예가 실추되었다. 칼빈도 낙스의 언어와 행동의 격렬함에 놀랐다. 낙스는 나중에 엘리자베스를 여선지 드보라와 같다고 일컫고 그의 언어를 순화시켜 여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낙스가 영국에 오는 것을 반길 영향력 있는 왕실 인사는 없었다. 1559년 5월 2일 마침내 낙스는 하나님의 섭리가 스코틀랜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면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이 길만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존 낙스 :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의 항쟁>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낙스를 귀족과 시민들이 환영하였다. 낙스는 제네바에 있을 때 일시 스코틀랜드에 들려 여러 귀족들을 동역자들로 세웠다(1555). 모레의 백작인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아질의 백작인 로른(Lorne) 경 그리고 레싱턴의 윌리엄 메이트랜드(William Maitland) 등이 그들이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이 낙스와 같은 개신교도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우선 신앙적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가 급속히 프랑스에 귀속되어 간다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섭정이며 가톨릭 교도인 기즈의 메리가 딸을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프랑스에 예속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이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은, 개신교도가 된다는 것이 국가를 사랑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인식틀을 가진 것이다. 낙스는 자신을 환영해 주는 이들로부터 깊은 감격을 느꼈다. 이들은 1557년 12월 참복음을 증거하는 목회자 아래 종교 개혁을 하겠다고 서약하여 “제일 계약”(the First Bond)에 서명했다. 1559년 낙스와 이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은 퍼스(Perth)에 일단 집결했다가 에든버러에 진군하여 섭정에게 종교 개혁을 설득시키려고 하였다. 섭정은 4,000여 명의 정부군과 900명의 프랑스 지원 부대에 전쟁 준비를 명령하였다. 낙스의 군대는 훈련이 안 된 시민군 5,000여 명이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인 낙스는 영국 여왕을 직접 만나 지원을 부탁하려다가 자기에 관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감정이 나쁘다는 것을 감안하여 유능한 외교관 윌리엄 메이트랜드를 특사로 보내 영국 여왕의 지원을 확약받았다. 여왕 엘리자베스는 낙스의 여성관에 불만이었지만, 스코틀랜드가 가톨릭으로 남아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을 위협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지혜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는 있었다. 영국은 일만 명의 군대 지원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윈터(Winter) 제독이 1560년 1월, 8척의 함대를 이끌고 낙스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1560년 1월 마침내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국내 문제에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한 국제전쟁이 되었다. 낙스는 같은 해 4월부터 에든버러 중심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St. Giles Church)를 담임했다. 낙스는 그의 후원자들이 이 전쟁에 소극적임을 알고 곧 승리할 수 있다는 전투 정신을 설교로 불어넣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슬픔과 혼란과 공포가 기쁨과 명예와 용기로써 변화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베냐민 지파를 이기게 하셨듯이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왜냐하면 시절이 아무리 험악하더라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리는 다시 한번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사 토머스 랜돌프(Thomas Randolph)는 여왕에게 “낙스의 음성이 500개 나팔보다 더 효과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던디와 퍼스에서 낙스의 설교를 듣고 가톨릭 교회의 성상을 파괴하는 소동도 일어났다. 한 청년은 낙스의 설교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는 몸을 약간 구부정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어찌나 활기와 정력에 넘치는지, 마치 설교단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그 속에서 날아 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그가 다니엘서를 강해할 때는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낙스의 설교는 청중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낙스군과 영국 연합군은 1560년 4월 4일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리스 지역도 장악해 버렸다. 프랑스군은 포위되어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루지 못하고 휴전을 요청하였다. 1560년 6월 11일 스코틀랜드의 섭정 기즈의 메리(메리 스튜어트의 모친)가 돌연히 사망하여 가톨릭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그녀는 한때 “존 낙스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개신교를 멸시하였으나, 임종시에는 개신교 목사 존 윌록(John Willock) 앞에서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숨을 거두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스코틀랜드의 왕좌는 프랑스에서 과부가 된 메리 스튜어트에게 돌아갔다. 1560년 7월 6일 에든버러 조약에 따라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퇴각하였다. 이제 종교 개혁을 저지할 방해물은 거의 다 제거되었다.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때까지 국사는 잠시 12명으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이루어지다가 1560년 8월 3일 의회가 소집됨으로 정치 주도권은 의회로 넘어갔다. 낙스는 즉시 종교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의회는 낙스와 그의 동료 목사들에게 신앙 고백서의 작성을 요구했다. 낙스는 4일 만에 5명의 동료 존들(John Spottiswood, John Row, John Douglas, John Winram, John Willock)과 같이 신앙 고백서를 작성, 의회의 상임위원회에 제출했다. 상임위원회는 이 고백서를 인준하여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그리고 본회의는 동년 8월 17일에 이를 승인하였다.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 개혁주의자들의 교리, 즉 칼빈의 요리 문답과 1559년의 프랑스 신앙 고백, 폴란드인으로서 칼빈주의자인 존 라스코(John Lasco, 1499-1560)와 스위스 종교 개혁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75)의 글들을 참조한 것이 역력하다. 이 신앙 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나오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서문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가 고백해 오면서 수치와 위협을 받던 교리의 모든 것들을 만천하에 공포하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습니다”로 시작되어, “우리는 끝날까지 이 신앙 고백에 머물러 있기를 단호하게 천명합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샤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고백서는 진리에 대한 진술들이 무오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 안에서 수정과 개선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제20항은 교회 회의들의 무오성에 반대하면서 “어떤 회의들은 분명히 과오를 범하였으며, 그것도 매우 중대한 내용에서의 과오였다”고 지적하였다.

낙스는 1546년 트렌트 종교 회의(The Council of Trent)가 취한 가톨릭의 구원관에 기겁하였다. 트렌트 종교 회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여 신과 인간이 협동함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미사의 참석은 가톨릭의 구원관에서는 필수적이다. 가톨릭 신학에서 “미사는 구원 신비의 중심이며,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며, 아울러 사실적이고 현재적 희생이었다.”

낙스는 인간의 방법이 배제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었기에 미사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제8항은 다음과 같이 담대히 선언한다.

[동일하신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은총으로 이 세계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요, 형제요, 목자요, 우리 영혼의 위대한 감독으로 지명하셨다.]

교회관에 대해서는 제18장에서 교회의 3대 요소, 곧 말씀의 참된 선포, 올바른 성례전의 집행 그리고 정당한 교회 훈련(권징)을 언급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 “정직하고 곧으며 남자다운 문체로 기록되었으되, 불평이나 아첨이 없고, 논리적 정확성과 학문적 수준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온종일 진리를 전파한 후 피곤에 지친 사람이 밤에 조용히 앉아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생각해 보며 마음에서 새 힘을 되찾는 것과 같다.”

<낙스와 장로교회>

낙스가 주축이 되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안에는 칼빈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지만 교회 정치에 있어서 장로교회로 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다. 더욱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낙스의 생존시 감독(Superintendent)이라는 직책이 엄연히 존재한 점이다. 그렇다면 낙스는 영국 성공회와 같은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를 스코틀랜드에 창설했는가 하는 것이 규명되어야 한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던 도널드슨(G. Donaldson)은 낙스가 개혁한 스코틀랜드 교회는 처음부터 감독제였으나,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제네바에서 돌아와 제2의 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장로회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도널드슨이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첫째, 낙스는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영국의 궁정 목사로 시무할 때 이미 감독교회 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둘째, 스코틀랜드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개혁파 교회보다는 루터파 교회의 영향하에 있었다.

셋째, 1560년 낙스가 작성한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에 의하면 목사의 임명이 회중에 의한 선거와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에 의해 시행된 시험과 공적 임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이란 상당한 권한이 부여된 감독을 의미한다.

넷째, 감독은 1년에 2회 이상 담당 관할 구역을 시찰하고, 목사의 불경건한 삶이 발견될 경우 대회를 소집하여 해당 목사를 해임시킬 뿐 아니라, 감독구에 있는 주요 도시에 감독 재판소를 설치하여, 감독의 임명 또는 교인들의 이혼 문제를 다루는 사법 재판관 기능을 했다.

다섯째, 연금 수령에 있어서 감독은 500내지 700파운드를 받았는데 반해 일반 목사들은 100파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차등 지불은 감독의 우위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도널드슨의 학설은 내픈과 리드에 의해 반박되었다. 특히 리드는 낙스의 저술을 세세히 분석하여 낙스가 성직자의 주임무를 말씀의 선포로 보았던 점 그리고 성직자는 성공회와 같이 교회 기구나 세속 권력의 관여가 아닌 오직 회중의 동의에 의해서 임명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제1치리서 제5항 제1조에서 제3조에 기록된 “감독”이라는 용어는 낙스의 진의가 아니었다. 낙스가 처음 작성한 원본에는 감독이란 용어가 빠졌으나 후에 그의 동료 윌록과 스포티스우드가 수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감독이라는 말을 삽입했다.

이 감독이라는 명칭은 개혁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마련된 행정 조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영구직이 아닌 한정직이었고(처음에는 3년, 1570년도부터는 1년으로 단축되었음), 자기 관할 구역으로부터 비판과 치리를 받는 입장이며, 무엇보다도 영국 성공회가 인정하지 않는 장로 제도를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인정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도널드슨이 생각한 것처럼, 영국 교회의 치리자의 입장이 아닌 지교회를 돌보는 방문자 또는 순회 전도자로 해석되어야 한다.

1566년 스코틀랜드 총회는 제2헬베틱 신앙 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을 채택하여 목사 직위상의 우월성을 부정하였다. 여기에서 낙스는 영국 망명 생활에서 로체스터 감독직을 제안받았으나 감독 정치는 성경이 금한다고 믿었기에 정중히 사양한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따라서 낙스는 처음부터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장로교회의 씨앗만 뿌린 것이다.

우리는 1560년 당시 비록 개신교 세력이 절대 우위를 차지했지만, 가톨릭 교회의 직분자들(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이 계속 교회에 출석했고, 그들은 직분에 따른 재산도 그대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가톨릭 성직자 및 그들의 재산 관리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그들과 타협해야 했던 것이다. 1572년 추밀원과 개혁교회 지도자들이 합동하여 리스 협약(Concordat of Leith)을 작성했다. 이 협약에서 가톨릭측 인사들도 개혁교회에서 임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개혁교회의 일원이 되면 개혁교회의 총회에 복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낙스가 뿌린 장로교회의 씨앗은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 시대에 와서 꽃을 피웠다.

<낙스의 정부론>

낙스가 개혁에 열중하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통치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1561년 8월 프랑스에서 귀국하였다. 그녀는 왕권 신수설에 근거하여 절대 왕정을 꿈꾸고 있었다. 낙스가 진행시켜 법제화된 가톨릭 미사 금지를 그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낙스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에 오자마자 왕궁의 홀리루드 하우스(Holyrood house)에서 미사를 드렸다. 낙스에게는 한 번의 미사가 만 명의 군대가 침공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낙스는 곧 여왕의 미사 행위를 설교로 규탄했다. 여왕과 종교 개혁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왕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용감하고 영리했다. 그러나 성격에 안정이 없었고, 확신에 찬 남자들이 고분고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왕은 프랑스 궁중에서 음모와 술수를 자연스럽게 배워 왔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부드러운 화술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낙스는 여왕의 미모와 화술에 넘어가지 않았다. 여왕이 가톨릭 의식으로 단리(Henry Darnley)와 재혼하려 할 때 낙스는 이를 공격했다(1563). 여왕은 분에 떨며 눈물을 흘리며 낙스에게 말했다. “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서 당신의 호의를 얻고자 했습니다······이제 나는 복수할 것을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낙스는 연소한 여왕을 설득시키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질책했다.

[여왕의 결혼이 당신[낙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씀하셨지요. 혹은 당신이 이 공화국에서 무엇인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여왕의] 신하입니다. 그리고 비록 백작이나 남작이나 귀족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저를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

단리가 살해되자 여왕은 보스웰 백작과 개신교식으로 다시 결혼하였다. 보스웰은 단리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 때 낙스는 메리 여왕의 퇴위와 처형을 주장하였다.

[오, 하나님, 자기 남편을 살해한 잔악한 살인자의 힘과 오만을 꺾으시옵소서. 그녀의 편당과 교묘한 술책을 파하시고, 바로 당신이야말로 지혜 있는 자를 그 지혜 가운데서, 오만한 자들을 그들 스스로의 악독한 생각 가운데서, 영원한 혼란 가운데로 내려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옵소서. 주여, 진실로 당신을 경외하는 심령으로 당신을 부르게 하시며, 바로 이러한 가운데서 자라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싸움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당신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올바르게 이 모든 싸움들을 마치고,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 안에서 우리 생애를 마치게 하시옵소서.]

낙스가 단순히 여성 통치자가 싫어서 이런 강경책을 말했을까?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낙스의 정부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낙스는 여성이 통치자가 되는 것을 확실히 싫어하였다. 그 위에, 통치자가 가톨릭 군주로서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을 혐오하였다. 낙스는 영국에서 메리 튜더가 가톨릭을 국교로 하여 개신교를 탄압하고 스페인 왕과 결혼한 후 곧 사망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여왕의 잘못된 정책으로 비슷한 사건이 경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낙스는 구약 특히 예레미야를 기초로 하여 독재하는 군왕이나, 우상 숭배를 주장하는 통치자에 대해 무력 항쟁을 인정하였다. 칼빈은 귀족층에 의한 질서 정연한 법적 저항을 인정하였지만, 낙스는 귀족층이나 하부 통치 계급이 독재자에 대하여 수수 방관할 때는 평민들도 개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개혁에는 군왕의 지위 박탈은 물론이고 사형 집행까지도 포함시켰다. 낙스는 칼빈보다 훨씬 더 과격한 혁명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쓴 “두번째 나팔소리의 개요”를 보면 군주 저항론자인 낙스의 위치가 선명해진다.

1. 국왕은 단순히 왕가에서 탄생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다스릴 수는 없다. 이보다 하위에 있는 재판관들을 선거하도록 한 하나님의 법이 또한 왕들의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

2.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한 왕국내에서는 공개적 우상 숭배자들을 공직에 임명할 수 없다.

3. 하나님과 그의 자명한 진리를 거슬러 폭군들에게의 복종과 그의 위치를 계속 유지코자 하는 서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

4. 만약 국민들이 잘 모르고 우상 숭배자를 통치자로 선출하였을 경우, 그 사실이 밝혀지면 그를 선출한 이들은 다시 그 지위를 박탈하고 처벌할 수 있다.

낙스가 이렇게 강경하게 발언한 이유는 개신교도에 대한 군왕들의 핍박이 참고 견딜 만한 수준을 넘어섰고, 오직 혁명만이 자유스럽게 복음 전파를 할 수 있는 변화의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낙스는 1555년 대륙의 아우그스부르크 평화 조약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이 조약은 국가의 종교를 결정하는 것이 군주의 신앙에 달려 있었다. 한 지역 군주가 가톨릭 교도라면 그 지역에 속한 모든 백성은 의무적으로 가톨릭 교도가 되어야 했다. 신성 로마제국은 이 원리 밑에서 종교 분쟁을 종식시켰다. 낙스를 포함한 칼빈주의자들은 종교는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지 군주의 선택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제 유럽의 거의 모든 제국내에서 칼빈주의자가 된다면, 순교를 각오해야만 했다.

낙스의 강경한 정부론은 그의 계약 사상에서도 드러난다. 낙스는 국민이 통치자에게 복종할 의무(군주와 신하와의 “계약” 관계)가 있듯이, 통치자도 하나님이 세우신 신의 법(군주와 하나님의 “계약” 관계)을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군주가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는 백성은 불법을 자행하는 군주를 과감히 제거해야 마땅하다.

낙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따라서 폐하께서는 과연 국민들이 폐하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또한 상호 계약에 의한 폐하의 의무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국민들은 다름아닌 하나님 안에서 폐하께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폐하는 그들 앞에서 법을 지키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들로부터 봉역(奉役)을 원하시며, 그들은 폐하에게서 모든 악인들로부터의 보호와 방어를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여왕 폐하, 당신께서 그들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하신다면······어찌 그들로부터 온전한 순종을 기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두렵건대 여왕 폐하,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낙스의 “계약 사상”에 기초한 정부론은 프랑스의 위그노 항쟁과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존 밀턴은 영국왕 찰스 1세의 사형 판결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낙스의 사상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낙스의 저항으로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퇴위되어 스코틀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다(1568).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의 왕위 찬탈 모의에 연루되어 사형이 집행되었으니, 그때 그녀의 나이 45세였다(1587). 스코틀랜드의 왕위는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 6세에게 주어졌고, 제임스 6세는 나중에 엘리자베스를 이어 영국왕 제임스 1세로 등극한다. 낙스는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의 스틸링에서 즉위할 때 소년 왕 요아스(왕하 12장)에 관해 설교하였다.

1567년 12월 의회가 열렸을 때 낙스는 의회의 개회 설교를 하고 그 의회가 “앞으로 모든 왕들은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겠다는 서약을 의무화하고 아울러 교회 모임의 자유와 권한을 인정한 새로운 입법 조항을 지켜 보았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낙스의 신학>

존 낙스의 신학적 입장은 그의 저작들을 볼 때 두 가지 방향에서 나타나 있다. 하나는 성경론이고, 다른 하나는 예정론이다. 성경에 관한 낙스의 강조점은 성령의 권위의 본질과 성경 해석에 둘 수 있다.낙스는 성경이 본질상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점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성경이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그의 기본 입장은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확신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상 명료하며 그 말씀 자체 안에서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만약 성경 어딘가에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성령께서 다른 성경 어딘가에서 더욱 명쾌하게 동일한 사항을 설명하시다는 점을 믿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의심이 전혀 있을 수 없다. 그는 또한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여서 성경이 모순이나 오류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믿었다. 더욱이 그는 신*구약 성경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의 통일성을 인정했다.

성경 해석에 돠한 낙스의 견해를 보면 그는 성경을 사용할 때 신*구약 성경 모두를 다 사용했다. 성경 해석과 관련해 낙스가 강조한 점은 신*구약 성경의 연속성이다. 성경 해석의 방법에 있어서 낙스는 주로 성경의 문자적 의미와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 내에서 명료하며, 성경은 성경을 설명하고 성령의 조명에 의해 해석됨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정과 관련해 낙스는 최초로 하나님의 예정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전제했고, 하나님이 각 사람을 위해 하실 바를 결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뜻으로 규정했다. 예정이 적극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다시 말해 선택과 유기의 두 가지 측면을 지녔다는 것이 낙스의 견해였다. 선택은 하나님이 어떤 이들에게 그의 뜻을 따라 구원과 영생을 선언하심을 의미한다. 반면에 유기는 하나님 나머지 사람들에게 영원한 멸망 또는 저주를 선포하심을 의미한다.

<낙스 이후의 스코틀랜드>

낙스가 죽자 어린 왕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모튼(Morton) 백작은 성공회식 감독주의를 소개하려 하였다. 모튼은 존 더글러스를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로 임명하고, 대주교로부터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가가 강력히 통제하는 성공회식 주교들이 임직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고위 성직자들은 “툴칸(tulchan)의 감독들”로 불렸는데, 툴칸이란 게일어(Gaelic)로 “암소가 우유를 내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속을 채운 송아지 가죽(a stuffed calf-skin)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도의 시기에 칼빈의 제자이며 낙스의 후계자로 앤드루 멜빌이 등장한다. 멜빌은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제네바에서 칼빈의 도움을 받아 제네바 아카데미의 헬라어 강사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시민법을 가르쳤다.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글래스고 대학교의 총장에, 1580년에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총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제네바식 교육 행정, 교과 과정, 교수법을 스코틀랜드에 소개하여 대학 교육 제도를 크게 개선하였을 뿐 아니라, 낙스의 제1치리서를 1578년 개정하여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만들었다.

제2치리서는 감독 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여 칼빈처럼 교회 직분을 장로와 집사로만 나누었다. 제2치리서는 157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장로교 교육을 받은 제임스 6세가 영국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하자마자 영국의 청교도는 물론 스코틀랜드 장로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제임스도 그의 어머니가 지지해 온 왕권신수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대의 정치는 왕권신수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히 마찰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멜빌은 제임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전에 여러 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지금도 말씀드립니다. 스코틀랜드에는 두 개의 왕국이 있고,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머리인 제임스 왕과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임스 왕은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왕도, 주도, 머리도 아니고, 하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우리는 귀하를 왕으로 섬기며, 귀하에게 합당한 예의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제임스는 멜빌을 런던탑에 4년 동안 가두었다가 영국에서 추방한다. 멜빌은 프랑스 세단(Sedan)에서 신학생들을 양육하다가 1622년 사망했다. 제임스의 사망(1625) 후 찰스 1세(재위 1625-49)가 통치하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더 힘든 수난을 맞는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성공회주의를 강요하고 1637년 7월 23일 장로교회를 폐지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처분에 봉기하여 장로교회 정치를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에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과 사무엘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가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두 사람은 1643년 영국 런던에서 모인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감독관으로 참석하여 영향을 끼쳤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신학교수인 러더퍼드는 낙스식 계약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즉 “통치자는 하나님과 백성과의 이중 계약 아래 있다. 백성이 계약을 깰 때 법에 의하여 제재를 받는 것과 같이, 통치자도 백성과의 계약을 깰 때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한다. 결국 찰스 1세는 영국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인들의 연합 저항에 부딪혀 설 자리를 잃고, 1649년 1월 영국 의회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올리버 크롬웰의 무단 정치가 끝나자 스코틀랜드인들은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는 찰스 2세(재위 1660-85)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영국 장로교도들도 찰스 2세가 장로교인들을 우대할 것으로 믿고 영국왕으로 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이러한 기대를 모두 배반하고 장로교회의 신앙을 고백하는 수많은 계약파 성도들을 무참히 고문하고 살해하였다.

찰스 2세의 사후,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가톨릭화하려 했다. 그의 정책에 따라 나타난 저항은 신속했다. 1688년 명예 혁명으로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가 남편 윌리엄(William of Orange)과 같이 영국에 입성하였다. 네덜란드인 윌리엄은 이미 개혁주의자였다. 메리는 종교 관용령을 선포했다. 169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감독주의를 폐지하고 장로 정치를 유일한 그리스도 교회의 정부 형태로 승인했다.

<존 낙스 : 정리>

낙스는 참으로 위대한 청교도였다. 1560년대 초에 청교도란 말은 성공회에 비타협적이란 뜻과 아울러 “까탈스럽고, 비판적이며,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이란 의미를 가진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것이었다. 아마 낙스의 삶과 사상은 이러한 개념 속에 들어갈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섭정 여왕 기즈의 메리, 영국 여왕 메리 튜더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대할 때 잔혹하리만큼 냉정하고 까다롭게 굴었다. 연약한 여성들을 설득시키기보다는 그들의 약점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정죄하였다. 어찌 보면 사내 대장부로서 옹졸하게 보여질 수도 있겠다. 낙스는 또한 많은 면에서 비타협적이었다. 그는 끝끝내 가톨릭과 성공회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이 위에 낙스는 무엇을 해도 서둘러 했다.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를 4일 만에 완성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분석한 낙스의 모습은 외형상으로 보면 모두 부정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이 낙스의 진면목일까? 낙스가 수행한 모든 것들을 보다 심사 숙고해서 연구해 보면 낙스의 약점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낙스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종교 전쟁으로 폭풍우 치는 긴박한 사태의 연속선 속에서 살았다. 그는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 애교와 눈웃음을 즐길 수 없었다. 순간 순간이 그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기 때문이다.

낙스는 특별한 때에 특별히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해야 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에는 유순하고 말이 없는 사람보다 낙스와 같이 강하고, 엄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영웅적이고 거센 사람, 그러면서도 하나님 한 분만 무서워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낙스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이러한 사랑이 그의 심장에 있었기에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열정에 불타서 일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지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개혁을 설득시켜 자신의 동역자로 세워야 했다. 그는 차분히 합리적으로만 일할 수 없었다. 시민과 귀족들에게 헌신의 용기와 결단을 촉구할 때 그의 언어는 웅변적이 되었다. 지적이기보다 자주 감정적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의 행동 양식은 정적인 것보다 동적이었고, 또 이 동적인 행동 지침을 신약보다는 구약에서 많이 찾았다. 구약의 영웅들이 활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낙스를 평가할 때 그가 처했던 특수한 상황인 스코틀랜드 정치 및 종교 상황, 낙스의 신앙 및 교육 배경 그리고 그의 인간성을 주의 깊게 분석할 필요가 있겠다. 한마디로 낙스를 평하면,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살아간 위대한 “청교도의 창시자”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낙스의 유언과 운명 직전 그가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준 권면을 들으면서 그의 생애를 정리해 보자.

<낙스의 유언>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거니와, 나는 사람들에게 명백하고 순수하게 그의 진리를 보여 주는 데 조금도 비겁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오염시키지 않았으며, 속이지도 않았고, 없는 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내지도 않았다. 단지 내게 주신 은혜의 능력 안에서 그의 진리를 공정하게 분담하여 가르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스런 복음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밝히 보여 주신 바에 따라 거만한 자들의 오만을 꺾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거스리는 그들의 반란을 폭로하였다. 또한 스스로의 죄악을 깨달았기에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양심을 불러일으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소리 높여 선포하였으니, 믿는 이들의 가슴 속에 그분의 죽음의 능력과 부활의 장엄하신 역사를 선포하였다. 이는 오늘 이 시간까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양심 속에 오직 한 가지 간증이니, 세상이 나를 향해 분노를 품은들 무슨 상관이랴.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주는 권면>

많은 이들이 내가 너무 엄격하고 극단적이라고 크게 불평해 왔으며, 또한 지금도 불평하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외치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속에 그 비판받는 인간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었음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신다. 단지 그 인간들이 범하고 있는 죄악을 참으로 증오하고 혐오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사실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도 가능하다면 이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를 부르시고 기꺼이 은혜를 베푸시사 신비스런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심판 자리 앞에 서게 될 때, 과연 그가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는가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이 너무도 컸기에 전혀 인간들의 눈치를 살핌 없이 주께서 내게 명하시는 대로 너무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감히 고백하노니, 나는 하나님 말씀을 인용하여 개인적 이익을 취한 일이 없으며, 인간을 기쁘게 하고자 노력한 일도 없고, 나 개인의 정욕 혹은 다른 이들의 정욕을 만족시킨 일도 없으며, 단지 내게 허락하신 은사를 성실하게 사용하여 내가 감독한 교회의 덕을 세우려고 노력하였을 뿐이다.

<참고 서적>

G. D HENDERSON, 홍치모*이은선 역, 스코틀랜드 교회사, 한국 로고스 연구원, 1991

G.바넷트 스미스*도로시 마틴, 존 낙스와 종교 개혁, 보이스사

정준기, 청교도 인물사, 생명의 말씀사, 1997

황봉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존 낙스의 신학, 예영커뮤니케이션, 2001

스탠포드 리이드, 서영일 역, 하나님의 나팔수 존낙스의 생애와 사상, 1984

홍치모,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혁명, 1991

JOHN KNOX, THE REFORMATION IN SCOTLAND, BANNER OF TRUTH

출처 :행복 충전소(大名*大明*大命) 원문보기 글쓴이 : DMpastor

스코틀랜트(Scotland): 존 낙스(John Knox)-장로교 창시자

자료실 Reference Board 스코틀랜트(Scotland): 존 낙스(John Knox)-장로교 창시자 지상으로 미리 가는 제2차 종교개혁 발상지 여행<2> 에딘버러에 있는 존 낙스의 생가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년)는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장로교 창시자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부였으나 칼빈주의를 추종하면서 당시 스코틀랜드의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로마 가톨릭 신도인 매리 여왕과 투쟁을 하면서 장로교를 스코틀랜드에 정착시켰다. 개혁 신학의 기초를 존 칼빈이 세웠다면 장로교의 영성과 목회적 기초는 존 낙스가 세운 것이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였지만 동시에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매리 여왕조차도 그의 기도를 두려하면서 “백만 군사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고 고백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하나님께 “스코틀랜드를 주시든가 아니면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가까운 해딩턴(Haddington)에서 태어났다. 크리스천 위클리가 주최하여 오는 10월에 개최되는 제2차 종교개혁 발상지 학습여행 첫 코스로 에딘버러를 선택한 것도 바로 존 낙스를 찾아가기 위함이다. 14살 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이 화형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 후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를 만나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위샤트는 존 낙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오랜 동안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성직자들과 교회의 주교, 수도원장, 수사들은 무지에 빠져 있었다. 성경에 바탕을 둔 설교는 사라졌고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만이 구원에 필수적이며, 죄 사함은 미사의 제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배웠다. 그들의 그릇된 삶이 그릇된 교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6세기 초 쯤 위클리 파의 가르침과 존 후스의 개혁사상이 스코틀랜드에 들어오게 되고 또한 윌리엄 틴데일의 신약 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성경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개신교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성경읽기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이런 암울하고 타락한 시대를 목격한 존 낙스의 가슴에 교회 개혁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각성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 존 낙스의 종교개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고, 스코틀랜드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낙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성에 포위되어 포로로 잡혀있기도 했다.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노예선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교황의 추악한 삶을 폭로하고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교회법을 비판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캐톨릭 교회 추종자인 매리 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즉시 개신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목회자들이 처형되었다. 낙스는 매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캘빈이 있는 제네바로 향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나중에 낙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사르고 이단으로 정죄했다.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옆 건물에서 약 200여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섬기는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는 교회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로 나누고 평등과 자율과 연합을 근간으로 한 장로정치를 시행했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1556-1559년 까지 영어 사용 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말씀을 전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두 여왕을 종교를 탄압하는 ‘괴물’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역자들과 함께 성경전체를 새롭게 번역했다. 그것이 바로 1560년에 출간된 ‘제네바 성경’이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은 낙스는 복음적 교리들과 제네바의 종교개혁 원리를 가지고 12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1559년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교회는 카톨릭 일색이었지만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운동에 앞장섰다. 스코틀랜드에 팽배한 미신과 우상 숭배, 폭정을 제거할 것을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항상 활기와 박력과 능력이 넘쳤으며, 솔직한 말과 담대한 용기,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낙스의 설교의 핵심 교리는 선택과 칭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보혈이었다. 존 낙스는 개신교회란 이단을 박멸하고 옛 카톨릭 왕국을 재건하려던 매리 여왕에 맞서 세인트 자일스 교회(St Giles’ Catheral)강단에서 복음주의 교리를 주장하고, 로마교회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면서 로마교회와 교황제도를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했다. 매리 여왕의 소환을 받은 낙스는 여왕 앞에서 로마교회를 창녀라고 부르면서 로마교회는 교리와 관습에서 벗어나 온갖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완전히 더럽혀져 있다고 서슴없이 주장했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 낙스의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았고 회중들은 성경적인 개혁 운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스코틀랜드에 대 각성 운동과 영적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1560년 8월,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의 날이 찾아 왔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배격하고 교황의 관할권을 폐지했다. 카톨릭 미사 집전을 금지하고,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낙스와 다섯 명의 개신교 사역자들이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하여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1560년 의회는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국가의 신조로 채택했다. 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 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이어 1561년 12월 5일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시작됐다. 스코틀랜드는 존 낙스의 개혁에 힘입어 개신교 국가로 변하여 갔고 지구상에서 가장 칼빈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에딘버러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회심 이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낙스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개혁주의자였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존 낙스의 생가와 그의 설교로 스코틀랜드 영적 각성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던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을 방문하고 매리 여왕과 맞서 설전을 벌인 역사적인 발자취를 더듬어 볼 예정이다. 동시에 스위스 제네바에 가면 종교개혁 기념비에 서 있는 존 낙스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기념비에는 기욤 파렐, 존 칼빈, 장 테오도르 드 베자, 존 낙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크리스천 위클리 [조명환 기자] 존 낙스가 목회했던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 자일스 교회당 내 존 낙스의 동상 매리여왕과 대립을 벌렸던 존 낙스를 묘사한 그림 존 낙스는 장로교의 창시자이다[위키피디아]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캐톨릭 군주 매리 스튜어트 여왕 스코틀랜드의 매리 스튜어트 여왕[위키피디아] 우리는 ‘매리(Mary)’란 여왕이름에 익숙해 있다. 매리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인 고로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라고 숭배하는 카톨릭 여왕에게 많이 붙는 이름이다. 우리는 ‘블러디 매리’라고 신교를 엄청 핍박하여 무자비하게 신교도들에게 피의 숙청을 감행한 잉들랜드의 매리 여왕을 기억하고 있다. 이 매리 여왕은 어머니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해 캐톨릭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영국교회를 탄생시킨 헨리 8세의 첫째 딸이다. 캐서린 왕비는 캐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의 공주였다.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볼린과 눈이 맞은 헨리 8세가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핑계를 잡아 이혼을 하려 했지만 교황청이 말을 들어먹지 않자 이혼을 감행하고 영국국교회를 탄생시켰으니 캐톨릭 측에선 헨리 8세가 반역자인 셈이다. 그가 수많은 여자들을 왕비로 맞아들여 아들 갖기를 원했으나 결국 아들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에드워드 6세가 고작이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는 아주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맏딸 매리 공주가 뒤를 잇게 되었다. 튜더 왕가에서 나왔으니 흔히 ‘매리 튜더’라고 부른다. 캐톨릭 신도인 어머니를 내 쫓고 신교를 탄생시킨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으니 그는 캐톨릭으로 방향을 틀어 대대적인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신교 찬성파를 죽였고 어머니 캐서린의 이혼에 앞장섰던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 등을 숙청했다. 그래서 블러디 매리다. 그런데 또 하나의 매리 여왕이 있다. 이번엔 잉글랜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여왕이다. 스코틀랜드의 매리 여왕은 사실 잉글랜드의 매리 여왕과 친척이다. 그러니까 잉글랜드의 매리여왕이 헨리 8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손녀라면 스코틀랜드의 매리 여왕은 헨리 7세의 증손녀다. 좀 복잡하다. 사실 영국에서도 왕족이란게 그들만의 리그인고로 자기들끼리 다 해먹고 지배한 역사가 아닌가? 매리 튜더가 신교를 핍박했다면 매리 스튜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엔 캐톨릭의 개혁을 외치며 들고 일어선 종교개혁자 존 낙스(John Knox)가 있었다. 이 존 낙스에게 매리 스튜어드 여왕이 KO승은 아니더라도 판정패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캐톨릭 군주가 되었다. 아시다시피 잉글랜드에서 성공회가 탄생했다면 스코틀랜드에선 장로교가 탄생했다. 좀 시간이 지난서 요한 웨슬리에 의해 감리교가 잉글랜드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잉글랜드에 가면 성공회와 감리교의 역사를, 스코틀랜드에 가면 장로교의 역사를 배운다. 모두 캐톨릭에 반기를 들고 종교개혁을 외친 신앙적 선각자들의 희생과 헌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크리스천 위클 리가 주최하는 제2차 종교개혁 발상지 학습여행에서 첫 번째로 방문하는 도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는 매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왕의 활동무대였다. 그녀는 우선 화려했으나 비운의 여왕이었다. 우선 생후 6일 만에 왕위에 오른 여왕이니 얼마나 운명이 기구한가?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린 시절을 숨어살다 시피하다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하여 나중에 왕비가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에스파냐(스페인)의 눈치를 보는 수준이었고 어느 나라하고 손을 잡아야 마음이 놓이는 때였다. 프랑스는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여왕을 며느리로 불러온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에 시집갔던 매리 여왕은 남편이 일찍 사망하자 보따리를 싸가지고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스코틀랜드는 캐톨릭 교회와 장로교회와의 갈등이 심각한 때였다. 그는 헨리 스튜어트와 2번째 결혼을 했으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은 낳았다. 그게 제임스 6세. 성경이름 가운데 ‘킹 제임스 성경’이란 이름에 붙는 왕의 이름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왕국의 왕의 이름에서 나왔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안하고(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뒤를 이어 제임스 1세가 되었다. 제임스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를 때 나이는 겨우 1세. 그 제임스 왕이 매리 여왕의 유일한 아들이었는데 그가 커서 두 왕국을 합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추대된 것이다. 참고로 그 제임스 왕은 성공회를 제외한 다른 개혁 교회를 핍박하여 청교도들이 영국을 버리고 신대륙으로 이민을 결심케 한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제임스의 아버지이자 매리의 2번째 남편인 헨리가 살해되었다. 여왕과 사랑에 빠진 보스웰 백작이 범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매리여왕은 스코들랜드 국민들에게 ‘불륜죄’로 찍히기 시작했다.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목숨을 연명하고자 잉글랜드로 도망을 가서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제 발로 들어선 죽음의 길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매리를 보자마자 칼라일 성에 감금시켜 버렸다. 혹시 스코틀랜드의 반역세력과 연대해서 자기의 왕위를 넘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무려 18년 동안이나 매리 스튜어트를 유폐시킨 것이다. 아무리 권력이 무섭기로서니 언니뻘인 매리 스코틀랜드 여왕을 그렇게 오랜 동안 가둬 뒀다가 목을 잘라 참수시키다니 . . . 매리 여왕은 캐톨릭을 상징하는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노스햄프튼셔의 사형장에서 비극적인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물론 엘리자베스 1세가 신교를 지지하고 있었고 매리 여왕이 캐톨릭이긴 했지만 수차례 살려달라는 편지를 묵살하고 그녀를 죽인 것이다. 6일 만에 왕위에 오르고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가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된 후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불륜죄를 짓고 23세에 잉글랜드로 망명을 갔으나 사촌언니에게 붙잡혀 18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 목이 잘려 세상을 마감한 매리 스코틀랜드 여왕의 파란만장한 인생. . . 그가 죽을 때 나이는 41세에 불과했다. 2번째 남편 헨리 스튜어트 사이에서 난 아들 제임스 왕과 어머니와의 상봉은 평생 한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매리 스튜어트는 참으로 참으로 비운의 여왕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왕국의 왕이 되어 튜더왕조가 끝나고 영국에 스튜어트 왕조를 열기 시작한 제임스 6세는 비운의 어머니 매리 여왕의 시체를 나중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셔다 놓았다. 그런데 매리 스코틀랜드 여왕의 참수 소식은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를 격노케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틈만 나면 제거되기를 바랐던 엘리자베스 1세가 캐톨릭 신봉자인 매리 여왕을 죽인 것은 철저한 캐톨릭 군주였던 펠리페 왕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래서 잉글랜드를 손봐주겠다고 나선 것이 그 유명한 스페인 함대였다. 무려 130여척에 2만 명의 군사, 8천여 명의 선원을 태우고 리스본을 떠나 잉글랜드로 쳐들어 왔지만 그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의 엘리자베스에게 패배의 쓴 맛을 보게 될 줄이야! 당시 유럽 최강을 자랑하던 스페인에게는 굴욕이었다. 잉글랜드는 드레이크란 해적에게까지 작위를 주면서 스페인 함대를 무찌르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결국은 그때부터 시작된 스페인-잉글랜드 전쟁이 잉글랜드의 승리로 기울기 시작하자 영국은 전 세계의 해상권을 손에 쥐는 대영제국의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럽에서는 스페인을 제외하고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개발했으니 그게 바로 미국의 버지니아. 버지니아란 처녀(Virgin)로 살아가고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서 따 온 이름이다. “짐은 영국과 결혼했다”고 선언한 엘리자베스1세가 대영제국의 초석을 다지기는 했지만 매리 여왕을 참수시키는 등 수많은 피의 역사를 통해 그게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스페인-영국 전쟁의 발단은 매리 스코틀랜드 여왕의 죽음이었고 그 매리여왕의 발자취와 함께 존 낙스의 종교개혁의 역사 현장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오는 10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향하게 된다. 존 낙스가 태어난 스코틀랜드 해딩턴의 가을 지난달에 끝난 유럽의 종교개혁 발상지 여행 첫 번째 목적지인 스코틀랜드 해딩턴은 장로교 창시자 존 낙스가 태어난 마을이다. 에딘버러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해딩턴에서 태어난 존 낙스는 제네바에서 존 칼빈을 만나 동역하다 다시 에딘버러로 돌아와 장로중심의 개혁교회 목회를 시작했다. 그가 목회할 때 살았던 생가는 현재 박물관이 되었고 그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적한 해딩턴의 가을풍경이 LA의 가을풍경과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사진/기사=조명환 기자] 웨스터민스터 애비에 있는 매리 스튜어트의 무덤 덤바튼 성 훌리루드 왕궁 This entry was posted in 자료실 Reference Board .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Hit 430 종교개혁 500주년 -95가지 시선-이덕주교수 webmaster 2017.06.21 2638 429 Memorial Day:Why we remember webmaster 2017.05.29 1613 428 기도자들이 암송하고 사용해야 할 성경구절들 webmaster 2017.05.29 13041 427 뉴욕 웨슬리회심기념성회 webmaster 2017.05.22 1560 426 영국방문: 존 웨슬리의 발자취를 따라서(England:Following John Wesley’ Footprint) webmaster 2017.04.23 2147 425 Adopting Korean Culture webmaster 2017.04.14 1101 424 LIKUMC 교인묘지(pinelawn memorial cemetery) webmaster 2017.04.13 1096 423 마아세르(십일조)의 의미 webmaster 2017.04.09 2012 422 십자가의 길(Via Dolorosa)과 빌라도 법정 webmaster 2017.04.09 2574 421 종교개혁 특강-필립 멜랑히톤 webmaster 2017.04.04 1123 < Prev 1 2 3 4 5 6 7 8 9 10 43 ... Nex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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