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모와 공리의 영화 -“인생(人生)”
영화 인생은 중국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꼭 보라 권하고 싶은 영화다
살아간다는 것 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가족의 아니,
한 인물의 인생을 통해 중국 현대사를 진솔하게 그려낸 영화다.
중국 민족만큼이나
20세기 세계사의 온갖 역사적 경험을 겪은 사람들도 드물다.
대약진 운동 과 문화 대혁명 이라는 중국 현대사의 두 비극을 다뤄,
중국 현실과 중국역사. 중국전통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중국에관한 서사라고도 말할수있다.
이 영화는 1940년대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까지의 중국의 현대사를 한 가족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영화의 원제는<<인생(人生)>>이 아니라, <<후오져(활착:活着)>>이다.
뒤에 붙은 져(착)은 중국어에 있어 접미사의 일종으로 지속성-(계속됨)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런 저런 역사적 부침을 겪으면서도 죽거나 꺾이지 않고
연연히 살아 내려가는 민초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옹지마처럼 반복되는 기나긴 운명의 희롱은 중국인들을 지치고
숙명론적으로 길들였을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삶에 대한 신념일 수도 있지만
어쩜 뿌리 깊은 불신과 체념주의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날의 중국인은 변했지만 -참 괜찮은 영화였다.
자살하겠다는말에- 산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도주하는 사람에게-무슨일이 있어도 살아남야한다.
역사가 그렇게도 인류를 속이고,
인민을 농락하고,
삶을 기만했을지라도 끈질기게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것이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을 연결 짓는 유일한 메시지인 셈이다.
줄거리-
1930년대의 푸꾸이(福貴)는 지주계급-유한족속이다.
하루 종일 도박판에 쳐 박혀 시간을 소진하는 놈팡이다.
결국은 도박판에서 가산을 다 날린다.
남자주인공인 부귀는 매일 밤 도박을 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꾸짖음과 아내의 눈물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계속 도박을 한다.
그의 집문서가 넘어 가는 날 아버지는 화병에 죽고,
아내는 집을 나가버린다.
아버지는 집을 잃게 되자 화병으로 죽고 그의 어머니도 병을 앓게 된다.
집문서가 넘어가는 날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는다.
그제야 세상의 험난함과 추움을 알게 된 푸꾸이는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어린 딸과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던 아내가 돌아오고,
그는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다.
부귀는 새로운 집주인이 된 용이 에게 찾아가 돈을 꿔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용이는 돈 대신 그가 돈벌이로 써오던 그림자극의 도구를 빌려준다.
부귀의 생활대책-그림극 문화혁명때 생명같은 그림극 도구가 불탄다
부귀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그림자극을 한다.
바로 “피잉쥐(皮影劇-일종의 그림자극)”이었다.
-나무인형에 가는 철사 줄을 매달아 위에서 움직이는 극
푸꾸이는 원래 도박판에서 가끔 가다 피잉쥐 패거리에 끼어 한 재주 보여주기도 했었기에
그가 이제 자신의 능력을 밥벌이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시절이 하수상하여 국공내전(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군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열심히 싸우던 시절)이 시작되고
푸꾸이는 국민당 군에 끌려가서 군인들을 위해 그림자극을 보여줌으로서 목숨을 부지한다.
일종의 위문 공연단 이었던 것이다.
국민당군에 끌려가 그림극 위문공연을한다.
그러던 어느 엄청나게 추운 겨울날.
추위에 오들거리며 떨다가 일어난 아침, 흰 눈이 온 강산을 뒤덮은
그 들판 위엔 온통 끝없이 펼쳐진 국민당군의 시체가 시야에 들어온다.
얼어 죽고, 병들어죽고, 내버려진 중국인들인 셈이다.
전쟁터에서의 생명은 허무하다.
국민당 군이 죽고 뿔뿔이 도망간 그 공백을 차지한 것은 이번엔 공산당군이다.
이제 푸꾸이는 공산군을 위해 그 그림자극을 보여줌으로써 생을 유지한다.
그러면서 전쟁은 끝나고 푸꾸이는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 공리는 아침에 뜨거운 물을 가가호호 배달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리는 뜨거운 물을 끓여 배달하면서 살고있다.
어린 딸 봉하(鳳霞)는 병마의 후유증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었지만
똘망 똘망한 아들놈 유경(有慶)이랑 네 가족이 행복한 순간을 맞는 듯하다.
그가 오래 전 도박으로 탕진한 가산과 큰 저택을 물려받았던
사람이 이제 시대가 변해 지주라는 죄목으로 총살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푸꾸이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는 인민혁명군을 위해 공연을 한 무산계급 출신의 혁명동지로
자신의 신분이 변해 있음을 정말 다행으로 여긴다.
푸꾸이가
공산당에 협력했다는 증서를 보여주자 마을 읍장은 부귀를 반갑게 맞아준다.
역사는 계속되고 이번엔 대약진 운동이 시작된다.
이는 물론 모택동이 일으킨 운동이다.
그 이전 3년 동안 중국은 엄청난 자연재해에 고생하였다.
그래서 일거에 공산주의 부국을 만들기 위해 대약진운동이란 것을 전개했었다.
동네마다 용광로가 만들어지고, 집집이 쇳조각들이 긁어모아지고
모두들 제철 제련작업에 투입된다.
(이는 엄청난 자원의 비효율적 집행이었음이 밝혀진다.
큰 용광로, 작은 용광로가 전국 곳곳에 세워진다.
미 제국주의가 동부에서 침략해올 때를 대비하여 중국은 “3선이론”이란 것을 내세워
중국내륙 깊숙이 제철공장, 정련공장을 중복 건설한다.
포항제철이나 광양제철소가 왜 바닷가에 있는지는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당시 중국은 그런 배려 없이 산골짜기에 공장을 세우는 우를 범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걸고넘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자원과 모든 결정은 모택동의 독단과 집단광기로 이루어진 시대였기 때문이다)
푸꾸이의 또랑또랑하던 아들놈 유경이가 희생당하는 것이 이 시대였다.
잠결에 학교에 불러간다.
높은 분이 지도 나왔다기에 나가서 제련작업을 도와야하기 때문이다.
푸꾸이는 그런 애처로운 어린 유경 이를 업고는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이야기한다.
“유경아 잘 들어라. 지금은 우리 집이 비록 병아리같이 작지만.
병아리가 크면 닭이 되고, 닭이 크면 양이 되고, 양이 크면 소가 된단다.
” 유경이가 묻는다. “소가 크면 뭐가 되죠?” ” 음.. 소가 크면 공산주의가 된단다.
공산주의가 되면 매일 고기와 만두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단다..”
공산주의가 되면 매일 고기와 만두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단다..”
그날 유경 이는 담장에 누워 자다가 후진하는 트럭 때문에 무너진 담벼락에 깔려 죽는다.
아들을 죽인자가 문화혁명으로 생명이 위험해 야반 도주하겠다는말에
주인공이 하는말- 무슨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트럭을 몬 사람은 이전에 푸꾸이 밑에서 피잉쥐를 하던 사람이었고
이제 이 마을 높은 관리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그들 가족은 한 생명을 담보로 잡은 셈이기도 하다.
다시 역사는 흐르고 문화대혁명의 시대가 온다.
푸꾸이의 벙어리 딸 봉하도 어느덧 다 커서 홍위병 청년과 결혼을 한다.
봉하가 병원에서 출산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의사란 존재는 모두 반혁명반당분자로 下放당하고 자아비판 당하는 신세가 된다.
새파란 학생들이 혁명완장을 차고 병원을 차지한다.
결국 봉하는 아기를 낳다 과다출혈로 죽는다.
하혈을 하지만 어린 학생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딸은 출산을하다 죽고
이때 며칠을 굶었다는 왕빈 이라는 산부인과 의사가
고깔모자(반당분자의 징표)를 뒤집어쓰고 병원에 끌려와서 만두 먹다가 체하여
죽을 고비를 당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의 진수이다.
푸꾸이는 새 조국 건설을 위해 딸과 아들을 바친 셈이다.
출산시 필요한 3일 굶은 의사는 만두를 7개 먹고 급체해 죽는다.
몇 년 후 병석에 누워있는 푸꾸이의 처가 사위와 손자의 생일 축하인사를 받는다.
그들이 유경 이와 봉화의 무덤에 다녀오는 길에 손자 놈을 위해 병아리를 산다.
푸꾸이는 오래 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피잉쥐 도구를 담아두는 궤짝에
병아리를 담으며 감개무량하게 이야기한다.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고, 닭이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이 자라면 소가 된단다.”
손자가 묻는다. “소가 자라면 뭐가 되죠?” 그러자, 공리가 그런다.
“그 다음엔 너도 어른이 되는 거야.” 손자가 아주 기뻐서 그런다.
“그럼 내가 어른이 되면 소를 타고 다니나요?” 이에 푸꾸이가 그런다.
” 아니. 네가 어른이 되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다닐 거야.
그때가 되면 세상 살기가 지금보다 좋아질 테니까.”
영화는 그렇게 희망적인 대사로 끝난다.
이 영화는 깐느 심사위원대상과
푸꾸이 역의 역의 갈우가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서구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중국현대사는 결국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투쟁이라는 외적 변천에
관계없이 실제 인민은 열심히 제 살길을 찾아 살아간다는 간단한 진리를 보여준다.
겉보기에는 현대사 관통이지만 한편 보면 지독한 풍자임에 분명하다.
지금이야 웃으며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지만,
당사자들은 어찌 죽음과 희롱한 그 시절 그 때를 잊을수가 있을까.
푸꾸이는 한 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운명을 헤쳐나간 적은 없다.
도박에서 지는 것도, 국민당군 공산당군에 차례로 부역하는 것도,
그리고 아들을 죽음의 운명으로 몰아넣는 것도 모두 상황이,
현실이 그를 그쪽으로 몰아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그림자극을 위해 목숨 걸고 지키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리고 그 현실이란 것이 죽음과 매시간 희롱하는 것들이기에
우리는 더욱 범상치 않은 보통 인민의 행동과 운명을 동정적이며
가슴 따뜻해지는 시선으로 지켜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장예모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지난 수십 년 그런 바보 같고,
우스꽝스런 집단광기의 희생자는 바로 중국 인민이었음을 보여주고,
나아가 그러한 운명조차 받아들이는 인민이 있기에 사회는 진화하고 국가는 발전한다는
-적어도 그런 느낌이 들 정도의-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다.
광란의 중국역사를 보는 감독의 눈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병원에서의 그 지독한 부조리. 의사가 있지만 결코 도움이 안 되고,
자신만만한 홍위병 여학생의사가 있지만 믿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되는 듯 안 되고,
안 되는 듯 결국은 다 되는,
그리고
새옹지마처럼 반복되는 기나긴 운명의 희롱은 중국인들을 지치고
숙명론적으로 길들였을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삶에 대한 신념일 수도 있지만
어쩜 뿌리 깊은 불신과 체념주의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날의 중국인은 변했지만 -참 괜찮은 영화였다.
서양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만리장성, 천안문. 모택동 등과 함께
장예모. 공리 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만큼 장예모 감독의 영화는 서구에 잘 알려져 있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가 서구인들에게 강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그를 세계적인 감독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장 감독 영화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의 작품[인생] 에 투영된 역사적 배경과 그의 뛰어난 역사 해석을 살펴보자.
장예모 감독을 비롯한 베이징 영화대학 78 학번들을 가리켜
제5세대 영화감독이라고 지칭하는데
이들은 문화 대혁명의 비극을 체험한 세대들이었다.
80년대의 중국 지식인들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폐허적이고
절망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재검토 작업을 벌였는데
이러한 작업의 중심은 5.4운동 이후의 중국 현대사에 대한 재 검토였다.
즉 중국 현대사의 전개가 반외세 민족주의 혁명을 완수 했지만
반봉건의 과제는 완수하지 못했다는 인식이 점차 커져갔고,
중국에서 봉건주의가 사회주의의 옷을 입고 횡행하고 있다’는 표현이 나타날 정도 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파악한다면 중국 사회주의는 봉건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80년대 중국의 절실한 과제는 반봉건 근대화(또는 현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장예모 감독의 영화는 80년대의 시대 이념을 강하게 담고 있다.
그에게 있어 중국 전통이란 청산해야 할 어둠의 기억,
청산해야 할 잔재로서의 봉건 전통이고 반생명의 상징인 것이다.
또한 그의 영화는 중국에 관한 서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에는 중국 현실과 중국역사.
중국전통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중국의 전통. 그 중에서도 중국의 봉건 전통이다.
국두, 홍등이 대표적으로 그러하고 ‘붉은 수수밭’,
‘귀주이야기’등도 봉건전통을 주요 쟁점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영화들 속에서 그는 봉건 전통을 인간의 욕망에 대한 억압이자
반생명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영화에 대하여 90년대 들어서서 많은 비판이 일고 있는데
장 감독 영화 속의 중국과 중국 전통은 구체적인 역사 현실 속의 그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고 현실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부분을 과장해서
중국 현실에 대한 한 상징으로 가공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새로이 시도한 영화가 [인생]이다.
‘이제는 예전같이 민속으로 물들이고 골동품이나 발굴하는 영화를 찍지 않고
중국 현대사 속의 인생 체험을 바탕으로 중국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중국인들의 독특한 인생철학이 담긴 영화 를 만들겠다.’며
시작한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인생]은 1940년대부터 문화 대혁명 종결까지를 배경으로 하여 굴곡 많은
중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간 한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 는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다.
그는 이 영화 속에서 신 중국 이후 비극의 역사로 상징되는
‘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을 주요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데
주인공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뒤 ‘그림자극’을 하면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국공내전을 맞고 고향에 돌아와서 대약진 운동을 경험하고 문화 대혁명을 맞는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의 역사는
가족의 비극의 역사를 낳게 되어 주인공은 아들과 딸을 잃게 된다.
영화에서 아들이 죽는 것은 대약진 운동 때이다.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사회주의 생산력 증대운동의 일환으로
15년 내에 영국과 미국을 따라 잡자’는 것이 주요 구호였다.
이 운동의 절정기는
1958년과 1959년이었고 중국인들은 석탄과 식량, 철강생산에 총 매진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모든 기계는 혹사되었고
사람들은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중노동을 하였다.
주인공의 아들은 학교 담장 밑에서 잠을 자다가 변을 당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사고이고 우연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필연이 내재되어 있다.
아들이 학교 담장 밑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약진 시기의 밤낮 없는 노동으로 인해 아들이 잠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아버지가 억지로 깨워 학교를 보낸 결과
아들은 학교 담장 밑에서 잠을 자다가 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딸은 문화대혁명 때 죽는다.
딸이 해산을 맞아 병원에 입원하지만 그 병원에는 의사가 없다.
다들 반혁명분자로 몰린 것이다.
병원을 접수한 것은 문화 대혁명의 선봉대 역할을 했던 홍위병 학생들이었다.
딸은 출혈과다로 생명이 위태로워지나 홍위병 학생들은 속수무책이다.
아버지와 사위는 반혁명분자로 몰려 비판을 당하고 있는 늙은 의사를 몰래 데려온다.
그러나 의사는 배가 고파 만두를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실신해 버리고 결국 딸은 죽고 만다.
이 역시 필연이 내재된 우연이다.
사상이 반혁명적이라 하여 모든 전문가들을 직장에서 내쫓았던
문화 대혁명 자체에서 딸의 죽음의 근원적 원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역사적 비극이 존재할 때 대다수 민중은
그 역사적 비극과 직접적 관계에 놓이지 않을 수도 있다.
즉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장 감독이 [인생]에서 묘사하는 점이 바로 이러한 간접적 은유의 형식이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이라는 중국 현대사의 두 비극을 다루되 ,
그것을 인간 삶의 우연 같은 필연,
필연 같은 우연이라는 그물을 통해 거르면서
인간 삶의 한 형식으로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역사의 비극적 측면을 치열하게 고발하고
응징하는 태도로 영화를 진행시켰다면 아마도 무척 무미건조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은 국공내전과 대약진 운동, 문화 대혁명 등 파란의
현대사 속에서 그 역사만큼 파란의 개인사를 산 한 중국인의 기록이다.
그러나 장 감독이 [인생] 에서 궁극적으로 그리려 한 것은
그러한 개인사의 경험을 동원하여 중국 현대사의 비극적 경험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원 너머에 있다.
장 감독이 묘사하려 한 것은 역사의 온갖 고난을 겪은 뒤
그것을 구체화하고 삶의 경험으로 소화시켜내는
중국 민중의 비극적 삶에 대한 응집력과 넉넉한 삶의 자세이다.
영화 속의 중국 현대사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 일뿐이다.
중국 민족만큼이나
20세기 세계사의 온갖 역사적 경험을 겪은 사람들도 드물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고난의 현대사를 겪은 것이 우리 한국민족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대사를 다룬 우리 영화들은
역사적 비극과 개인사를 직접적 관계 속에서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치열하게 다루고 있어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유리되는 경향이 있다.
TV드라마로써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던 [여명의 눈동자]나[모래시계] 등이 그러하다.
일반 민중의 삶 속에서 담담하게 역사를 관조하고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영화인,
역사적 비극을 한 차원 높여서 현실의 매듭을 푸는 단서를 제공하고
미래의 희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영화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