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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찮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을 나꾸어 보았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번이나 흐붓하게 사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 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 날 산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여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 필과 주단 바리가 두 고리짝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각이 어수선하게 남았다.
다른 축들도 벌써 거진 전들을 걷고 있었다. 약빠르게 떠나는 패도 있었다. 어물장수도 땜장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장판은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해 놓고 계집의 고함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생원, 시침을 떼두 다 아네…… 충줏집 말야.”
계집 목소리로 문득 생각난 듯이 조선달은 비죽이 웃는다.
“화중지병이지. 연소패들을 적수로 하구야 대거리가 돼야 말이지.”
“그렇지두 않을걸. 축들이 사족을 못 쓰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곤 해두 왜 그 동이 말일세, 감쪽같이 충줏집을 후린 눈치거든.”
“무어 그 애숭이가? 물건 가지고 낚었나 부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었더니.”
“그 길만은 알 수 있나…… 궁리 말구 가보세나그려. 내 한턱 씀세.”
그다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 것을 쫓아갔다. 허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얼금뱅이 상판을 쳐들고 대어 설 숫기도 없었으나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적도 없었으나,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줏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 충줏집 문을 들어서 술좌석에서 짜장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어찌 된 서슬엔지 발끈 화가 나버렸다. 상 위에 붉은 얼굴을 쳐들고 제법 계집과 농탕치는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제법 난질꾼인데 꼴사납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농탕이야. 장돌뱅이 망신만 시키고 돌아다니누나. 그 꼴에 우리들과 한몫 보자는 셈이지.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된 눈망울에 부딪칠 때, 결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생원은 조금도 동색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 다 지껄였다 ― 어디서 주워 먹은 선머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거라, 냉큼 꼴 치워.
그러나 한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하염없이 나가는 꼴을 보려니, 도리어 측은히 여겨졌다. 아직도 서름서름한 사인데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마음이 섬찟해졌다. 주제도 넘지, 같은 술손님이면서도 아무리 젊다고 자식 낫세 되는 것을 붙들고 치고 닦아세울 것은 무어야, 원. 충줏집은 입술을 쫑긋하고 술 붓는 솜씨도 거칠었으나, 젊은애들한테는 그것이 약이 된다나 하고 그 자리는 조 선달이 얼버무려 넘겼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애숭이를 빨문 죄 된다. 한참 법석을 친 후이다. 담도 생긴데다가 웬일인지 흠뻑 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허 생원은 주는 술잔이면 거의 다 들이켰다. 거나해짐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할 작정이었누 하고,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모질게 책망하는 마음도 한 편에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얼마나 지난 뒤인지 동이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고 정신 없이 허덕이며 충줏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생원 당나귀가 바를 끊구 야단이에요.”
“각다귀들 장난이지 필연코.”
짐승도 짐승이려니와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뒤를 따라 장판을 달음질하려니 거슴츠레한 눈이 뜨거워질 것 같다.
“부락스러운 녀석들이라 어쩌는 수 있어야죠.”
“나귀를 몹시 구는 녀석들은 그냥 두지는 않는걸.”
반평생을 같이 지내 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까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꼽이 흘렀다. 몽당비처럼 짧게 쓸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 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니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투르르거렸다. 콧물이 튀었다. 허생원은 짐승 때문에 속도 무던히는 썩였다. 아이들의 장난이 심한 눈치여서 땀 배인 몸뚱어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좀체 흥분이 식지 않는 모양이었다. 굴레가 벗어지고 안장도 떨어졌다. 요 몹쓸 자식들, 하고 허생원은 호령을 하였으나 패들은 벌써 줄행랑을 논 뒤요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이 호령에 놀라 비슬비슬 멀어졌다.
“우리들 장난이 아니우.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발광이지.”
코흘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고 녀석 말투가.”
“김첨지 당나귀가 가버리니까 왼통 흙을 차고 거품을 흘리면서 미친 소같이 날뛰는걸.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우. 배를 좀 보지.”
아이는 앵돌아진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뭇 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려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늙은 주제에 암새를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아이의 웃음소리에 허 생원은 주춤하면서 기어코 견딜 수 없어 채찍을 들더니 아이를 쫓았다.
“쫓으려거든 쫓아 보지.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줄달음에 달아나는 각다귀에는 당하는 재주가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나도 후릴 수 없다. 그만 채찍을 던졌다. 술기도 돌아 몸이 유난스럽게 화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한이 없어. 장판의 각다귀들이란 어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조 선달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드팀전 장돌이를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 장을 빼논 적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 지방도 헤매이기는 하였으나 강릉쯤에 물건 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내를 돌아다녔다. 닷새만큼씩의 장날에는 달보다도 확실하게 면에서 면으로 건너간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지반 가까웠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 더구나 그것이 저녁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 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모아 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읍내에 백중이 열린 해 호탕스럽게 놀고 투전을 하고 하여 사흘 동안에 다 털어 버렸다. 나귀까지 팔게 된 판이었으나 애끊는 정분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념하였다.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장돌이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는 없었다. 짐승을 데리고 읍내를 도망해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짐승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었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산을 모을 염은 당초에 틀리고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러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호탕스럽게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 하나 후려 보지는 못하였다. 계집이란 좀 쌀쌀하고 매정한 것이었다.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신세가 서글퍼졌다. 일신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 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꼭 한 번의 첫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 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
허 생원은 오늘 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 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다.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도 없었으나 허 생원은 시침을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 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 부지.”
아무렴 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를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었으나 성 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날 판인 때였지. 한 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건 그 다음날이었나?”
“다음 장도막에는 벌써 온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판은 소문에 발끈 뒤집혀 고작해야 술집에 팔려가기가 상수라고 처녀의 뒷공론이 자자들 하단 말이야. 제천 장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나. 하나 처녀의 꼴은 꿩 궈먹은 자리야.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수 좋았지. 그렇게 신통한 일이란 쉽지 않어. 항용 못난 것 얻어 새끼 낳고, 걱정 늘고 생각만 해두 진저리나지…… 그러나 늘그막바지까지 장돌뱅이로 지내기도 힘드는 노릇 아닌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생애와두 하직하려네. 대화쯤에 조그만 전방이나 하나 벌이구 식구들을 부르겠어. 사시장철 뚜벅뚜벅 걷기란 여간이래야지.”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산길을 벗어나니 큰길로 틔어졌다. 꽁무니의 동이도 앞으로 나서 나귀들은 가로 늘어섰다.
“총각두 젊겠다, 지금이 한창 시절이렷다. 충줏집에서는 그만 실수를 해서 그 꼴이 되었으나 섧게 생각 말게.”
“처 천만에요. 되려 부끄러워요. 계집이란 지금 웬 제격인가요. 자나깨나 어머니 생각뿐인데요.”
허생원의 이야기로 실심해한 끝이라 동이의 어조는 한풀 수그러진 것이었다.
“애비 에미란 말에 가슴이 터지는 것도 같았으나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 피붙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걸요.”
“돌아가셨나?”
“당초부터 없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생원과 선달이 야단스럽게 껄껄들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밖에는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말예요.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나,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있는 고장도 모르고 지내 와요.”
고개가 앞에 놓인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내렸다. 둔덕은 험하고 입을 벌리기도 대견하여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건듯하면 미끄러졌다. 허 생원은 숨이 차 몇 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이가 알렸다. 동이 같은 젊은 축이 그지없이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바탕 쪽 씻어 내렸다.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 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 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나 밤 물은 뼈를 찔렀다.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 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서 의부라고 전망나니예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할 날 있었을까.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곤 하니 집 꼴이 무어겠소.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쳐나와서부터 이 짓이죠.”
“총각 낫세론 심이 무던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물은 깊어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 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 듯하였다. 나귀와 조 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넜으나 동이는 허 생원을 붙드느라고 두 사람은 훨씬 떨어졌다.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리 말은 안 해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인구?”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허 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디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 버렸다. 허비적거릴수록 몸을 걷잡을 수 없어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퍽으나 흘렀었다. 옷째 쫄딱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여윈 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안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려하실 것 없어요.”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 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렷다?”
동이의 탐탁한 등허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혔으면도 하였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생원.”
조 선달은 바라보며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 했던가.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 새끼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치울 젠 딴은 대단한 나귀 새끼군.”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 주고. 내일 대화 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출전:조광12(1936.10)]
지은이 : 이효석
갈래 : 단편 소설. 순수 소설
배경 : 어느 여름 밤,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메밀꽃 핀 달밤의 산길
성격 : 낭만적. 탐미적. 시적(서정적), 토속적 정서를 바탕으로 인간의 원초적 애정을 시적으로 승화한 작품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이나 (부분적으로 그리고 특히 결말 부분에서 작가 관찰자 시점이 보임)
표현 :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필치와 사실적 묘사가 많이 나타남. 대화의 진행과 암시와 추리의 기법으로 주제 부각. 지명의 반복으로 의식과 감정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냄
제재 : 장돌뱅이 허 생원 일행의 삶, 메밀꽃을 배경으로 한 남녀 간의 사랑
주제 : 장돌뱅이의 인생 유전과 인연. 인간 본연의 애정문제, 떠돌이의 삶을 통해 본 인간 본연의 애정, 자연적이고 신비한 인간의 본원적 애정, 본능적 혈연 의식
인물 :
허 생원 – 주인공. 장돌뱅이. 과거의 추억 속에 사는 고독한 인물로 숫기가 없고 아둑시니 같지만 투전을 하는 면, 서정적인 일면도 있음. 유랑의 원형을 가진 떠돌이 인생.
동이 – 장돌뱅이. 젊은 혈기와 순수함을 간직한 젊은이. 행동에서 허생원의 친자식으로 암시되는 인물.
조 선달 – 보조적 인물. 장돌뱅이. 남의 흉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
구성 : 이 소설은 사건의 짜임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하는 순행적 구성, 혹은 평면적 구성이 있고, 사건 전개의 순서를 뒤바뀌게 하는 역행적 구성, 혹은 파행적 구성이 있다. 또한
이 작품의 구조는 매우 견고하다. 그것은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팔십 리 길과 그 길을 걷는 데 소요되는 시간의 정확한 일치에서 오는 것이다. 대화까지는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가야 하는데, 작가는 바로 이 노정(路程)과 소요 시간을 그대로 소설의 진행 축으로 삼고 있다.
‘밤과 낮’의 구조로 볼 경우
이 소설은 전체의 구조를 ‘밤과 낮’의 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드팀전에서 장사하는 허생원, 싸움질 하는 허 생원, 나귀와 함께 놀림 당하는 허생원이 밤이 되고 달빛이 비치는 산길에서는 이야기꾼이 된다. 이야기꾼은 소설가, 시인이며, 예술가이다. 또 성 처녀와의 사랑도 밤에 이루어졌다고, 허 생원은 자랑스럽게 그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낮은 현실의 공간, 밤은 회상의 공간이며, 낮이 절망인 공간, 불행의 공간인 반면에 밤은 희망의 공간이며, 행복의 공간이다. 이 소설의 의미는 이렇게 구조화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의 파악은 주제 파악에 도움이 된다.
줄거리 :
드팀전의 허 생원은 장돌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아직 홀몸이었다. 봉평장의 파장 무렵,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 생원은 장사가 시원치 않아서 속이 상한다. 조 선달에 이끌려 충주집을 찾는다. 거기서 나이가 어린 장돌뱅이 ‘동이’를 만난다. 허 생원은 대낮부터 충주집과 짓거리를 벌이는 ‘동이’가 몹시 밉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계집하고 농탕질이냐고 따귀를 올린다. ‘동이’는 별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난다. 허 생원은 마음이 좀 개운치 않다.
조 선달과 술잔을 주고받고 하는데 ‘동이’가 황급히 달려온다. 나귀가 밧줄을 끊고 야단이라는 것이다. 허 생원은 자기를 외면할 줄로 알았던 ‘동이’가 그런 기별까지 하자 여간 기특하지가 않다. 나귀에 짐을 싣고 다음 장터로 떠나는데, 마침 그들이 가는 길가에는 달빛에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메밀꽃의 정경에 감정이 동했음인지 허 생원은 조 선달에게 몇 번이나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한때 경기가 좋아 한밑천 두둑이 잡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노름판에서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평생 여자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메밀꽃이 핀 여름 밤, 그날 그는 토방이 무더워 목욕을 하러 개울가로 갔다.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성 서방네 처녀를 만났다. 성 서방네는 파산(破産)을 한 터여서 처녀는 신세 한탄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허 생원은 처녀와 관계를 맺었고, 그 다음날 처녀는 빚쟁이를 피해서 줄행랑을 놓는 가족과 함께 떠나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 끝에 허 생원은 ‘동이’가 편모(偏母)만 모시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발을 빗디딘 허 생원은 나귀 등에서 떨어져 물에 빠지고 그걸 ‘동이’가 부축해서 업어 준다. 허 생원은 마음에 짐작되는 데가 있어 ‘동이’에게 물어 보니 그 어머니의 고향 역시 봉평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동이’가 자기처럼 ‘왼손잡이’임을 눈여겨 본다.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어떤 일의 처음)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장이 선 곳)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 휘장(여러 폭의 피륙을 이어서 둘러치는 막) 밑으로 등줄기(등마루의 두두룩하게 줄기진 부분)를 훅훅 볶는다(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는 일). 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별 할 일이 없이 머뭇거리고)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매우 귀찮게, 너절하고 염치가 없게) 날아드는 파리떼도 장난꾼 각다귀(각다귀과의 곤충의 총칭. 모기와 비슷하나 훨씬 다리가 길고 피를 빨아 먹지 않음)들도 귀찮다. 얼금뱅이(얽둑배기 : 얼굴이 얽둑얽둑 얽은 모양)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온갖 피륙을 파는 가게. 포목점)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을 나꾸어 보았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번이나 흐붓하게(마음에 차게 많이) 사본(여기서는 물건을 ‘팔다’의 뜻임)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 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사 본 일 있을까?’는 ‘물건을 많이 팔아 보았던 적이 있었던가?’라는 뜻이다. 물건을 주고 돈을 사는 행위가 장사이기 때문이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이 말은 이 작품의 지배적인 배경이 여름날의 달밤이 될 것임을 암시해 준다. )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 날 산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여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 필과 주단 바리(마소에 짐을 싣는 단위)가 두 고리짝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각이 어수선하게 남았다.
다른 축(패거리)들도 벌써 거진 전들을 걷고 있었다. 약빠르게 떠나는 패도 있었다. 어물장수도 땜장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힘 없는 걸음으로 천천히 맥없이 걷다) 않으면 안 된다.(장꾼이라면 피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한다는 것으로 인물들의 신분과 처지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장판은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몹시 악을 쓰며 덤비는)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해 놓고 계집의 고함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생원, 시침을 떼두 다 아네…… 충줏집 말야.”
계집 목소리로 문득 생각난 듯이 조선달은 비죽이 웃는다.(계집의 목소리를 듣자, 문득 충줏집을 좋아하는 허 생원을 생각한 조 선달은 놀려대듯 슬그머니 웃는다. )
“화중지병(畵中之餠 : 그림의 떡. 마음에 있으나 가질 수 없는 경우에 씀, )이지. 연소패들을 적수로 하구야 대거리(상대하여 맞서서 대듦, 또는 그러한 언행)가 돼야 말이지.” (허 생원도 충줏집에 관심이 많으나 충줏집을 좋아하는 젊은 패거리들과 상대하여 이길 수 없으므로, 자신에게는 충줏집이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렇지두 않을걸. 축들이 사족을 못 쓰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곤 해두 왜 그 동이 말일세, 감쪽같이 충줏집을 후린(그럴 듯한 방법으로 남의 정신을 흐리게 하여 꾀어들이다.) 눈치거든.”
“무어 그 애숭이(애티가 있어 어려 보이는 사람이나 물건)가? 물건 가지고 낚었나 부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었더니.”
“그 길만은 알 수 있나…… 궁리 말구 가보세나그려. 내 한턱 씀세.”
그다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 것을 쫓아갔다. 허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얼금뱅이 상판을 쳐들고 대어 설 숫기도 없었으나(수줍어하는 태도가 있다)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적도 없었으나,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줏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허 생원의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 준 부분으로, 나이가 들긴 했으나 순박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충줏집 문을 들어서 술좌석에서 짜장(과연. 진실로)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어찌 된 서슬(날카로운 기세)엔지 발끈 화가 나버렸다. 상 위에 붉은 얼굴을 쳐들고 제법 계집과 농탕치는[농탕(弄蕩)치다 : 남녀가 희롱짓거리하며 놀다.]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제법 난질꾼(주색에 빠져 행실이 부정한 사람)인데 꼴사납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농탕이야. 장돌뱅이 망신만 시키고 돌아다니누나. 그 꼴에 우리들과 한몫 보자는 셈이지.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된 눈망울에 부딪칠 때, 결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생원은 조금도 동색((動色 : 얼굴빛이 변하는 것)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 다 지껄였다 (동이와 허 생원의 성격을 대비하여 나타내고 있다. 허 생원이 고집이 있고 완고한 반면, 동이는 다소곳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어디서 주워 먹은 선머슴(덜된 머슴아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탐하게(‘탐탁하다’의 방언. 모양이나 태도가 마음에 들고 믿음직스럽다.)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거라, 냉큼 꼴 치워(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그러나 한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하염없이 나가는 꼴을 보려니, 도리어 측은히 여겨졌다. 아직도 서름서름한(남과 가깝게 지내지 못하여 서먹서먹하다.) 사인데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마음이 섬짓해졌다(그다지 친숙하지 못한 사이라 서먹서먹한데 너무 지나치게 다룬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주제도 넘지, 같은 술손님이면서도 아무리 젊다고 자식 낫세(그만한 나이) 되는 것을 붙들고 치고 닦아세울(남이 꼼짝 못하게 휘몰아 나무라다.) 것은 무어야, 원. 충줏집은 입술을 쫑긋하고 술 붓는 솜씨도 거칠었으나, 젊은애들한테는 그것이 약이 된다나 하고 그 자리는 조 선달이 얼버무려 넘겼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애숭이를 빨문 죄 된다(나이 어린 젊은이와 시시덕거리면 못 쓴다. 순진한 젊은이를 유혹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한참 법석을 친 후이다. 담도 생긴데다가 웬일인지 흠뻑 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허 생원은 주는 술잔이면 거의 다 들이켰다. 거나해짐(술이 얼큰하게 취하다)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할 작정이었누 하고,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모질게 책망하는 마음도 한 편에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얼마나 지난 뒤인지 동이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고 정신 없이 허덕이며 충줏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생원 당나귀가 바(볏집이나 삼으로 세 가닥을 지어 굵다랗게 드린 줄)를 끊구 야단이에요.”
“각다귀들 장난(동네 장난기 많은 꼬마)들이지 필연코.”
짐승도 짐승이려니와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허 생원과 동이의 따뜻한 인간애가 두드러지게 드러난 표현이다. 서로 다투긴 했어도, 순박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라 금방 화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뒤를 따라 장판을 달음질하려니 거슴츠레한 눈이 뜨거워질 것 같다.
“부락스러운(말을 잘 듣지 않다.) 녀석들이라 어쩌는 수 있어야죠.”
“나귀를 몹시 구는 녀석들은 그냥 두지는 않는걸.”
반평생을 같이 지내 온 짐승(허생원과 동일시)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까스러진(털이 매끄럽지 못하고 거칠거칠한)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나귀의 생긴 모습을 묘사한 부분으로 늙은 허 생원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다.), 바스러지고(헐어져 잘게 조각나다.) 개진개진(추레하고 물기가 엉겨 붙은 모양)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꼽이 흘렀다. 몽당비(끝이 닳아 모자라지고 자루만 남은 비)처럼 짧게 쓸리운(꼬리 같은 것이 땅에 쓸려 짧게 말려 올라간)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 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조금씩 스며 나오는 모양)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니(허 생원의 나귀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 있다.)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투르르거렸다. (입을 약간 벌린 채로 부르떨었다.)콧물이 튀었다. 허생원은 짐승 때문에 속도 무던히(정도가 어지간히도)는 썩였다. 아이들의 장난이 심한 눈치여서 땀 배인 몸뚱어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좀체 흥분이 식지 않는 모양이었다. 굴레(마소의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어 매는 줄)가 벗어지고 안장도 떨어졌다. 요 몹쓸 자식들, 하고 허생원은 호령을 하였으나 패들은 벌써 줄행랑(도망)을 논 뒤요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이 호령에 놀라 비슬비슬(덤비지 않고 피하는 태도로 힘없이 비쓱거리는 모양) 멀어졌다.
“우리들 장난이 아니우.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발광(發狂 : 병으로 비친 증세가 일어남)이지.”
코흘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고 녀석 말투가.”
“김첨지 당나귀가 가버리니까 왼통 흙을 차고 거품을 흘리면서 미친 소같이 날뛰는걸.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우. 배를 좀 보지.”
아이는 앵돌아진(못마땅하여 마음이 돌아서다.)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나귀의 행동이나 늙고 볼품없는 모습이 허 생원 자신의 행동과 모습에 닮아 있음을 깨달은 부분이다. 즉, 허 생원이 나귀와 동일감을 느끼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뭇 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려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늙은 주제에 암샘(수컷이 암컷에 대해 욕정을 느끼는 행위)를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나귀’에 대해서 하는 말이지만 ‘늙은 주제’는 ‘허 생원’을 동시에 가리키는 효과를 나타낸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허 생원은 주춤하면서 기어코 견딜 수 없어 채찍을 들더니 아이를 쫓았다.
“쫓으려거든 쫓아 보지.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줄달음에 달아나는 각다귀에는 당하는 재주가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나도 후릴(휘둘러서 치거나 때리다) 수 없다. 그만 채찍을 던졌다. 술기도 돌아 몸이 유난스럽게(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르게) 화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한이 없어. 장판의 각다귀들이란 어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조 선달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드팀전 장돌이(각처의 장으로 돌면서 물건을 파는 장수)를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 장을 빼논 적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 지방도 헤매이기는 하였으나 강릉쯤에 물건 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내를 돌아다녔다. 닷새만큼씩의 장날에는 달보다도 확실하게 면에서 면으로 건너간다(달에 의한 시간보다도 장날에 철저한 장꾼의 면모가 엿보인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장돌뱅이의 애환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지반 가까웠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 더구나 그것이 저녁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 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허 생원은 봉평에서의 기이한 만남 때문에 항상 가슴이 두근거렸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모아 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읍내에 백중(百中, 百衆: 명일(名日)의 하나로 음력 7월 보름날)이 열린 해 호탕스럽게(기상이 높고 행실이 방탕스럽게) 놀고 투전(鬪? : 노름의 일종)을 하고 하여 사흘 동안에 다 털어 버렸다. 나귀까지 팔게 된 판이었으나 애끊는 정분(정이 넘치는 따뜻한 마음)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념하였다. 결국 도로아미타불(애쓴 일이 효과 없이 되어 본디 상태로 되돌아감을 일컫는 말)로 장돌이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는 없었다. 짐승을 데리고 읍내를 도망해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짐승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었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산을 모을 염(念 : 생각)은 당초에 틀리고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러[호구지책(糊口之策)]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호탕스럽게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 하나 후려 보지는 못하였다. 계집이란 좀 쌀쌀하고 매정한 것이었다.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신세가 서글퍼졌다. 일신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 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꼭 한 번의 첫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 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 (과거 회상의 시작)
허 생원은 오늘 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 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다(귀에 못이 박히도록은 관습적 표현으로 자주 빈번함을 의미).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도 없었으나 허 생원은 시침을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이즈러지다 : 한쪽이 차지 않다. 한 귀퉁이가 떨어지다)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배경의 서정적 묘사 – 허생원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 마련].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긴 산중턱에 굽이쳐 난 길을 지금 걸어가고 있다. / 일행이 산 중턱을 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산 속이 너무나 조용하여, 달이 마치 짐승처럼 살아서 숨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 / 시각의 청각화),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메밀꽃이 하얗게 핀 모습을 묘사함]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산중턱에 온통 메밀밭이 펼쳐져 있어서, 막 피기 시작한 꽃에 달빛이 내려 되비치는 모습이 소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심히 황홀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다.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는 죽은 듯이 고요한 배경을 보여준다.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젖었다.’는 표현은 푸른 달의 이미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또한’소금을 뿌린 듯이 흐믓한 달빛’을 통해 메밀꽃을 부각시킨 표현도 시적(詩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시적 소설, 서정적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붉은 대궁(초본 식물의 줄기)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그 모습이나 상태가 여리거나 나약하거나 하여 슬픔을 느끼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하는 상태)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이 대목은 허 생원 일행이 다음 날 장이 서는 대화로 갈 때의 아름다운 달밤의 정취가 묘사되어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허 생원에게 여기에 나타나 있는 밤의 정취는 낮의 지친 장터와는 좋은 삶의 대조를 이룬다. 허 생원에게 이러한 밤길은 단순한 수단으로서의 통로가 아니다. 고 이 밤길은 떠돌이 장돌뱅이들에게는 정신적 고향이자, 안식처와 같은 역할을 하며, 푸른 달빛에 깨알 깨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낭만적인 밤길은 허 생원 같은 떠돌이에게 환상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세계인 것이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동이가 허 생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배경].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청각적 대상을 촉각으로 나타낸 공감적 표현)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감각의 전이가 이루어진 공감각적 표현으로 청각의 시각화).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명확하게]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 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이 대목은 이 작품의 배경의 치밀성을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허 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동이는 그 내용을 듣지 못했다. 길이 좁아 세 사람의 나귀가 한 줄로 서서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앞장 선 허 생원의 이야기는 맨 뒤에 서 있는 동이에게 들리지 않은 것이다. 동이가 만약 이 때 허 생원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두 사람 사이의 부자 관계를 바로 확인하고자 했을 것이므로, 작품의 사건 전개는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매매를 알선하는 영업을 하는 집) 토방(土房 : 마루에 놓게 된 처마 밑의 흙마루)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달밤이면 추억을 이야기하게 되는 이유 제시 – 성 서방네 처녀와의 인연이 달밤에 이루어짐].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뛰어난 미인]이었지.(밝은 달, 하얀 메밀꽃, 환한 성 서방네 처녀의 모습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둠과 대비되는 백색의 환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팔자에 있었나 부지.”
아무렴 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를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구수한’이라는 후각적 언어와 ‘자줏빛’이라는 시각적 언어가 어울려 아늑하고도 화려한 밤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었으나 성 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날 판인 때였지(성 서방네가 가난하여 집 안에 있는 물건을 팔려고 가지고 나가기가 바쁜 판이라는 뜻). 한 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성 서방네 처녀가 물레방앗간에서 운 까닭].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울고 있는 여자에게 정을 느낀다는 것은 남성의 보호본능을 나타낸 말).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커다란 걱정이 있을 때는 오히려 두려움이나 수줍음 등도 사라지기 쉽다는 뜻)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허생원이 추억을 아름답게 회상하며, 동시에 죄책감을 표현하고 있는 윤리 의식이 드러난 구절 /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이었어.”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건 그 다음날이었나?”
“다음 장도막(場도막 : 장날과 다음 장날 사이)에는 벌써 온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판은 소문에 발끈 뒤집혀 고작해야 술집에 팔려가기가 상수(常數 : 자연으로 정해진 운명)라고 처녀의 뒷공론(-公論 : 겉으로 떳떳이 나서지 아니하고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자자들 하단 말이야. 제천 장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나. 하나 처녀의 꼴은 꿩 궈먹은 자리야.(처녀의 모습은 흔적이 없어. 꿩 궈 먹은 자리라는 것은 무슨 일을 치르고도 뒤 흔적이 없이 깨끗할 때 하는 말로, 풍유법, 관습적 표현)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수 좋았지. 그렇게 신통한 일이란 쉽지 않어. 항용(恒用 : 드물거나 귀할 것이 늘 있어서 보통임) 못난 것 얻어 새끼 낳고, 걱정 늘고(대개 변변하지 못한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살다 보니, 여러 가지 걱정도 함께 생기는 것을 말함) 생각만 해두 진저리나지…… 그러나 늘그막바지까지 장돌뱅이로 지내기도 힘드는 노릇 아닌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생애와두 하직하려네. 대화쯤에 조그만 전방(廛房 : 가게. 상점)이나 하나 벌이구 식구들을 부르겠어. 사시장천(四時長天) : 사시사철. 늘) 뚜벅뚜벅 걷기란 여간이래야지.”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소중하게 간직한 추억이다. 그 날 달밤의 로맨스에 대한 미련을 지울 수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또한 죽을 때까지 장돌뱅이로 살겠다는 숙명적 직업관이 드러나 있고, 허생원에게서 유랑적인 삶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저 달 볼 테야.”
산길을 벗어나니 큰길로 틔어졌다(좁은 산길에서 큰길로 나감은 가파른 고갯길과 함께 이 소설의 구성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산길에서는 동이가 허 생원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었으나, 큰길에서 옆으로 나란히 가면서, 허 생원의 회고담을 들으며, 대화가 가능하게 되고 자신의 출생과 성장의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 꽁무니의 동이도 앞으로 나서 나귀들은 가로 늘어섰다.
“총각두 젊겠다, 지금이 한창 시절이렷다. 충줏집에서는 그만 실수를 해서 그 꼴이 되었으나 섧게 생각 말게.”
“처 천만에요. 되려 부끄러워요. 계집이란 지금 웬 제격인가요. 자나깨나 어머니 생각뿐인데요.”
허생원의 이야기로 실심(失心 :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맥이 빠짐)해한 끝이라 동이의 어조는 한풀(기운. 끈기) 수그러진 것이었다.
“애비 에미란 말에 가슴이 터지는 것도 같았으나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허 생원이 동이를 꾸짖을 때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라고 한 말에 대하여, 실상 아버지가 없는 동이의 심적인 괴로움을 나타낸 말이다. ). 피붙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걸요.”
“돌아가셨나?”
“당초부터 없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생원과 선달이 야단스럽게 껄껄들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밖에는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말예요.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성 처녀가 가족과 더불어 제천으로 도망간 사실을 연상해 볼 때, 동이가 허 생원의 아들일 것이라는 암시 부분이다.). 우스운 이야기나,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있는 고장도 모르고 지내 와요.”
고개가 앞에 놓인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내렸다. 둔덕[두두룩하게 언덕진 곳]은 험하고 입을 벌리기도 대근하여(견디기에 어지간히 힘들고 만만하지 않아)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건듯하면(조금만 주의를 소홀히 하면) 미끄러졌다. 허 생원은 숨이 차 몇 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이가 알렸다.(고갯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점점 더 힘들어, 나이가 들었음을 새삼 깨닫곤 하였다.) 동이 같은 젊은 축이 그지없이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바탕 쪽 씻어 내렸다.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 버린 널다리(널빤지로 건너지른 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袴衣 : 남자의 여름 홑바지)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 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나 밤 물은 뼈를 찔렀다.(밤의 냇물은 뼈에 사무쳐 찌르는 듯이 몹시 차가웠다. )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의붓아버지]를 얻어 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苦酒 : 독한 술. 술을 많이 마심. 또는 그런 사람)래서 의부라고 전(전적으로. 완전히)망나니예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할 날 있었을까[동이와 동이모친의 평탄하지 않은 삶].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곤 하니 집 꼴이 무어겠소.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쳐나와서부터 이 짓이죠[장돌뱅이 노릇을 하고 있는 처지를 자조적으로 표현].”
“총각 낫세론(나이로는) 심이 무던하다고(성질이 너그럽고 수더분하다)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아직 총각의 나이를 면하지 못한 동이로서는 무던한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사정 이야기를 듣고 딱한 신세로군.)
물은 깊어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 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물체가 바람 따위를 받아서 휘우듬하게 물살에 쏠림) 듯하였다. 나귀와 조 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넜으나 동이는 허 생원을 붙드느라고 두 사람은 훨씬 떨어졌다.[허 생원과 동이를 이야기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환경 조성]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리 말은 안 해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동이 어머니의 친정이 봉평이고, 허 생원이 성 처녀와 사랑을 맺은 곳도 봉평이라는 공통점을 미루러 볼 때, 동이가 허 생원의 아들일 것이라는 둘 째번 암시이다.)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인구?” (허 생원은 동이가 자신의 아들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을 알아채고 확인해 가는 과정이다.)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동이가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 허 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디었다.(동이가 자신의 아들일 것이라는 충격에 발을 빗디디었다는 표현이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 버렸다. 허비적거릴수록 몸을 걷잡을 수 없어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퍽으나 흘렀었다. 옷째 쫄딱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가볍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여윈 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안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려하실 것 없어요.”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 동이의 모친이 자신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 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奇特한 : 말이나 행동이 기이하고 신통한) 생각이야. 가을이렷다?”[허 생원이 동이의 내력을 어느 정도 확인하고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 다른 말을 하는 것]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등허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혈육에 대한 암시).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혔으면도 하였다(동이가 틀림없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물을 다 건넜는데도 둘의 처지가 서글픈 생각이 들어 더 업혀 혈육의 정을 느끼고 싶었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생원.”
조 선달은 바라보며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失足 : 발을 헛디딤. 행동을 잘못함)을 했어. 말 안 했던가.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표면상으로는 허생원이 자신의 실수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나귀를 통해 허생원을 표현하려는 지은이의 의도가 담겨 있다.). 읍내 강릉집 피마(-馬) : 성장한 암말)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 새끼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치울 젠 딴은(아닌게 아니라) 대단한 나귀 새끼군.”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동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거의 확신하였기 때문에, 물에 빠져 몹시 추웠지만, 마음은 들뜨고 가벼웠다. )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훈훈하게)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 주고. 내일 대화 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발단부에 허 생원이 왼손잡이였던 것과 관련된다. 자연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왼손잡이는 유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연 과학적 이론이나 근거로 풀 것이 아니다. 단지, 주인공 허 생원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소설에서는 과학적 진실과는 다른 문학적 개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어둠의 귀신)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이 작품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주로 허 생원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허 생원과 동이의 관계에서 대화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키고 끝내 ‘왼손잡이’라는 암시를 통해서만 독자가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 점에서는 작가와 인물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작가 관찰자 시점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관용적 표현으로는 피가 켕기다라는 말로 핏줄로 이어진 사이에 저도 모르게 서로 당기는 친화력이 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소리가 맑고 시원하게) 울렸다.(동이가 자기의 아들임을 확인한 허 생원의 마음은 한없이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따라서 발걸음도 나귀의 방울 소리도 맑고 경쾌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달이 어지간히(거의 근사하게) 기울어졌다. [출전:조광12(1936.10)]
애시당초 : 어떤 일의 처음
장(場)판 : 장이 선 곳
휘장(揮帳) : 여러 폭의 피륙을 이어서 둘러치는 막
등줄기 : 등마루의 두두룩하게 줄기진 부분
궁싯거리고 : 별 할 일이 없이 머뭇거리고
춥춥스럽게 : 매우 귀찮게
각다귀 : 각다귀과의 곤충의 총칭. 모기와 비슷하나 훨씬 다리가 길고 피를 빨아 먹지 않음
얽둑배기 : 얼굴이 얽둑얽둑 얽은 모양
흐뭇하게 : 마음에 차게 많이
드팀전 : 온갖 피륙을 파는 가게. 포목점
사다 : 여기서는 물건을 ‘팔다’의 뜻임
바리 : 마소에 짐을 싣는 단위
축 : 패거리
타박거리다 : 힘 없는 걸음으로 천천히 맥없이 걷다
앙칼진 : 몹시 악을 쓰며 덤비는
화중지병(畵中之餠) : 그림의 떡. 마음에 있으나 가질 수 없는 경우에 씀
대거리 : 상대하여 맞서서 대듦, 또는 그러한 언행
후리다 : 그럴 듯한 방법으로 남의 정신을 흐리게 하여 꾀어들이다.
애숭이 : 애티가 있어 어려 보이는 사람이나 물건
숫기가 없다 : 수줍어하는 태도가 있다
짜장 : 과연. 진실로
서슬 : 날카로운 기세
농탕(弄蕩)치다 : 남녀가 희롱짓거리하며 놀다.
난질꾼 : 주색에 빠져 행실이 부정한 사람
동색(動色) : 얼굴빛이 변하는 것
선머슴 : 덜된 머슴아이
탐탐하다 : ‘탐탁하다’의 방언. 모양이나 태도가 마음에 들고 믿음직스럽다.
서름서름하다 : 남과 가깝게 지내지 못하여 서먹서먹하다.
낫세 : 그만한 나이
닦아세우다 : 남이 꼼짝 못하게 휘몰아 나무라다.
거나해지다 : 술이 얼큰하게 취하다.
바 : 볏집이나 삼으로 세 가닥을 지어 굵다랗게 드린 줄
부락스럽다 : 말을 잘 듣지 않다.
가스러진 : 털이 매끄럽지 못하고 거칠거칠한
바스러지다 : 헐어져 잘게 조각나다.
개진개진 : 추레하고 물기가 엉겨 붙은 모양
몽당비 : 끝이 닳아 모자라지고 자루만 남은 비
쓸리운 : 꼬리 같은 것이 땅에 쓸려 짧게 말려 올라간
빼짓이 : 조금씩 스며 나오는 모양
투르르거렸다 : 입을 약간 벌린 채로 부르떨었다.
무던히도 : 정도가 어지간히도
굴레 : 마소의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어 매는 줄
줄행랑 : 도망
비슬비슬 : 덤비지 않고 피하는 태도로 힘없이 비쓱거리는 모양
발광(發狂) : 병으로 비친 증세가 일어남
앵도라지다 : 못마땅하여 마음이 돌아서다.
암샘 : 수컷이 암컷에 대해 욕정을 느끼는 행위
후리다 : 휘둘러서 치거나 때리다
유난스럽다 :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르게
장(場)돌림 : 각처의 장으로 돌면서 물건을 파는 장수
백중(百中, 百衆) : 명일(名日)의 하나로 음력 7월 보름날
호탕스럽게 : 기상이 높고 행실이 방탕스럽게
투전(鬪 ) : 노름의 일종
정분 : 정이 넘치는 따뜻한 마음
도로아미타불 : 애쓴 일이 효과 없이 되어 본디 상태로 되돌아감을 일컫는 말
염(念) : 생각
객줏집 :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매매를 알선하는 영업을 하는 집
토방(土房) : 마루에 놓게 된 처마 밑의 흙마루
장(場)도막 : 장날과 다음 장날 사이
상수(常數) : 자연으로 정해진 운명
뒷공론(-公論) : 겉으로 떳떳이 나서지 아니하고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
항용(恒用) : 드물거나 귀할 것이 늘 있어서 보통임
전방(廛房) : 가게. 상점
사시장천(四時長天) : 사시사철. 늘
실심(失心) :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맥이 빠짐
한풀 : 기운. 끈기
대근하여 : 견디기에 힘들어
건듯하면 : 조금만 주의를 소홀히 하면
널다리 : 널빤지로 건너지른 다리
고의(袴衣) : 남자의 여름 홑바지
고주(苦酒) : 독한 술. 술을 많이 마심. 또는 그런 사람
전 : 전적으로. 완전히
낫세론 : 나이로는
무던하다 : 성질이 너그럽고 수더분하다
훌칠 : 물살에 쏠릴
해깝게 : 가볍게
기특(奇特)한 : 말이나 행동이 기이하고 신통한
등어리 : 등허리
실족(失足) : 발을 헛디딤. 행동을 잘못함
피마(-馬) : 성장한 암말
딴은 : 아닌게 아니라
훗훗이 : 훈훈하게
아둑시니 : 어둠의 귀신
청청하게 : 소리가 맑고 시원하게
어지간히 : 거의 근사하게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믓하게 사 본 일이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 가서 한 몫 벌어야겠네. : ‘사 본 일 있을까?’는 ‘물건을 많이 팔아 보았던 적이 있었던가?’라는 뜻이다. 물건을 주고 돈을 사는 행위가 장사이기 때문이다.
“달이 뜨렷다?” : 이 말은 이 작품의 지배적인 배경이 여름날의 달밤이 될 것임을 암시해 준다.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 장꾼이라면 피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한다는 것으로 인물들의 신분과 처지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계집 목소리로 문득 생각난 듯이 조 선달은 비죽이 웃는다. : 계집의 목소리를 듣자, 문득 충줏집을 좋아하는 허 생원을 생각한 조 선달은 놀려대듯 슬그머니 웃는다.
“화중지병이지. 연소 패들을 적수로 하구야 대거리가 돼야 말이지.” : 허 생원도 충줏집에 관심이 많으나 충줏집을 좋아하는 젊은 패거리들과 상대하여 이길 수 없으므로, 자신에게는 충줏집이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충줏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 : 허 생원의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 준 부분으로, 나이가 들긴 했으나 순박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 생원은 조금도 동색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는 다 지껄였다. : 동이와 허 생원의 성격을 대비하여 나타내고 있다. 허 생원이 고집이 있고 완고한 반면, 동이는 다소곳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냉큼 꼴 치워. :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서름서름한 사인데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마음이 섬짓해졌다. : 그다지 친숙하지 못한 사이라 서먹서먹한데 너무 지나치게 다룬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애숭이를 빨면 죄 된다. : 나이 어린 젊은이와 시시덕거리면 못 쓴다. 순진한 젊은이를 유혹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짐승도 짐승이려니와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 허 생원과 동이의 따뜻한 인간애가 두드러지게 드러난 표현이다. 서로 다투긴 했어도, 순박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라 금방 화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 나귀의 생긴 모습을 묘사한 부분으로 늙은 허 생원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다.
허 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 나귀의 행동이나 늙고 볼품없는 모습이 허 생원 자신의 행동과 모습에 닮아 있음을 깨달은 부분이다. 즉, 허 생원이 나귀와 동일감을 느끼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 ‘나귀’에 대해서 하는 말이지만 ‘늙은 주제’는 ‘허 생원’을 동시에 가리키는 효과를 나타낸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 긴 산중턱에 굽이쳐 난 길을 지금 걸어가고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 산 속이 너무나 조용하여, 달이 마치 짐승처럼 살아서 숨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산중턱에 온통 메밀밭이 펼쳐져 있어서, 막 피기 시작한 꽃에 달빛이 내려 되비치는 모습이 소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심히 황홀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다.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 : 소중하게 간직한 추억이다. 그 날 달밤의 로맨스에 대한 미련을 지울 수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아비 어미란 말에 가슴이 터지는 것도 같았으나 : 허 생원이 동이를 꾸짖을 때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라고 한 말에 대하여, 실상 아버지가 없는 동이의 심적인 괴로움을 나타낸 말이다.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 성 처녀가 가족과 더불어 제천으로 도망간 사실을 연상해 볼 때, 동이가 허 생원의 아들일 것이라는 암시 부분이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이가 알렸다. : 고갯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점점 더 힘들어, 나이가 들었음을 새삼 깨닫곤 하였다.
밤 물은 뼈를 찔렀다. : 밤의 냇물은 뼈에 사무쳐 찌르는 듯이 몹시 차가웠다.
총각 낫세론 동이 무던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 아직 총각의 나이를 면하지 못한 동이로서는 무던한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사정 이야기를 듣고 딱한 신세로군.
시원스리 말은 안 해 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 동이 어머니의 친정이 봉평이고, 허 생원이 성 처녀와 사랑을 맺은 곳도 봉평이라는 공통점을 미루러 볼 때, 동이가 허 생원의 아들일 것이라는 둘째번 암시이다.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이구? : 허 생원은 동이가 자신의 아들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을 알아채고 확인해 가는 과정이다.
“그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허 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디었다. : 동이가 자신의 아들일 것이라는 충격에 발을 빗디디었다는 표현이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혔으면 하였다. : 동이가 틀림없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물을 다 건넜는데도 둘의 처지가 서글픈 생각이 들어 더 업혀 혈육의 정을 느끼고 싶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 동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거의 확신하였기 때문에, 물에 빠져 몹시 추웠지만, 마음은 들뜨고 가벼웠다.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 발단부에 허 생원이 왼손잡이였던 것과 관련된다. 자연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왼손잡이는 유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연 과학적 이론이나 근거로 풀 것이 아니다. 단지, 주인공 허 생원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 무엇보다도 한 폭의 수채화(서양화에서,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린 그림)와 같은 정경이 떠오른다. 하얀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메밀꽃, 그리고 물레방아간의 풍경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배경은 우선 남녀 간의 사랑을 아름답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실 허 생원과 성 서방네 처녀의 인연은 어떻게 보면 한갓 하룻밤의 애욕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메밀꽃이 핀 달밤에 정취가 있기에 허 생원은 그날 밤의 인연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배경에는 ‘길’이 있다. 봉평에서 대화로, 대화에서 제천으로 넘어가는 길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떠돌이 허 생원의 삶을 표상하는 공간이다. 길이 있기에 성 서방네 처녀와의 만남이 있었고, 떠돌아다니는 삶이기에 이별이 있었다. 또한 길이 있기에 자기 아들 동이와의 우연한 만남이 있었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길’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또 다른 만남이라는 작품 전체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배경이자, 떠돌이 삶을 운명처럼 수용하는 허 생원의 삶의 방식을 형상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라는 허 생원의 대사는 예사롭지 않다. ‘길’은 허 생원의 운명론적 삶을 표상하는 자연적 배경이요, ‘달’은 성 서방네 처녀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매개체로서의 자연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감상2
1936년 <조광(朝光)>에 발표된 단편소설. 메밀꽃이 피었던 달밤. 한 여인과 맺은 단 한번의 사랑의 추억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그러나 다시 만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장을 떠돌았던 한 장돌뱅이 생활의 애환을 통해 삶의 한 단면을 그려낸 이효석의 소설이다. 달밤의 메밀꽃밭을 배경으로 설정한 시적인 묘사가 이효석의 서정적 문체와 함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만남과 헤어짐의 구도를 갖춘 이 작품은 유랑인의 삶이 ‘길’이라는 무대에서 삶의 상징성을 띤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작품은 남녀간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친자 확인(親子確認)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기본 줄기를 이룬다. 이 이야기가 겉과 속을 이루면서 미묘한 운명을 드러내는 과정에 ‘길’이 등장한다. 그 ‘길’은 낭만적 정취를 듬뿍 머금은 달밤의 산길이다. 물론, 그 길은 허 생원 일행에게는 생업(生業)의 길목이지만, 괴로운 인생사의 현장이기보다는 삶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세계이다. 온갖 각다귀, 잡배가 우글거리는 장터의 산문적(散文的)인 현실과는 격리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일 듯이 들리는’ 운문적(韻文的)인 몽환(夢幻)의 세계이다. 여기에 사랑의 추억과 인연(因緣)의 끈질김이 어우러지면서 한 늙은 장돌뱅이의 애환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묘미는 인간과 동물의 본능적 애욕을 교묘하게 병치(竝置)시킨 구성 방식에 있다. 허 생원이 술집에 들어가 충주집을 탐내고 있을 때, 그의 당나귀는 암놈을 보고 발정(發情)을 한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하는 아이들의 말소리를 허 생원은 자신에 대한 조소처럼 느낀다. 이것만이 아니다.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에 허 생원은 성 서방네 처녀와 꼭 한번 정을 통한다. 평생 처음이요, 마지막 기회였다. 허 생원이 처녀에게 잉태시킨 것처럼 당나귀는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나귀의 까스러진 갈기, 개진개진한 눈은 허 생원의 외양(外樣)과 흡사하다.
이 소설은 세련된 언어와 시적 분위기 속에서 낭만적 정서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궁싯거리다’, ‘칩칩스럽다’, ‘농탕치다’ 등의 다채로운 어휘와 함께, 허 생원 일행이 달밤에 걸어가는 장면은 언어 예술의 한 진경(眞境)을 이루고 있다. 그러기에 김동리(金東里)는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고 평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낭만적 필체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파장 무렵의 시골 장터 풍경 묘사, 주인공 허 생원을 닮은 나귀 묘사 등은 뚜렷한 사실성을 지니고 있다.
이해와 감상3
1936년 <조광(朝光)>에 발표된 전지적 작가 시점의 단편 소설로서, 떠돌이 인생의 비애를 그려 낸 작품이다.
시적 정서가 향토적 배경과 토속적인 언어와 함께 전편에 산뜻하고도 애틋하게 흐르는 소설이다. 작자는 이 작품에서 ‘애욕의 신비성을 다루려 했다’고 그의 논문 “현대 단편 소설의 상모(相貌)”에서 밝히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의 목적을, 허 생원이나 동이의 인생에 대한 것보다 숨막힐 듯한 메밀꽃이 피는 달밤의 정경을 나타내려는 데 초점을 두었다. 조 선달, 허 생원, 동이 등은 인격체로서의 소설적 인물이 아니라, 당나귀와 같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사물의 차원에 해당한다.
줄거리보다 작품의 분위기와 서정성을 중시한 시적 수필의 소설로서 평가받고 있다.
이해와 감상4
‘메밀꽃 필 무렵’은 장돌뱅이의 애환을 그렸지만 그들의 현실 자체를 주목하지는 않았다. 작가는 허 생원·조 선달·동이를 장돌뱅이라는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의 현실적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물의 전형으로는 그리지 않았다. 이들은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자연 풍경의 한 부분으로 보일 정도로 공간적 배경과 융합되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산문적이라기보다 시적(詩的)이다. 이러한 시적 분위기의 조성에는 작가가 극적(劇的) 제시(提示)보다는 요약적 제시 또는 편집자적 논평을 즐겨 사용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출처 : 김윤식·김종철 공저 한샘출판 문학)
“메밀꽃 필 무렵”의 서정성
허 생원 일행이 달빛 아래 메밀밭을 지나가는 장면이 잘 보여 주듯이 작가는 숨막힐 듯한 메밀꽃의 색깔, 그 분위기를 중점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지, 허 생원의 생애나 동이의 기구한 운명에 맞추기 위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달빛에 젖은 산길의 풍경이 조성하는 분위기를 하나의 미(美)로 본 것이다.(출처 : 김윤식·김종철 공저 한샘출판 문학)
“메밀꽃 필 무렵”의 등장 인물
“메밀꽃 필 무렵” 은 주로 세 사람의 인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데, 중심 인물인 허 생원은 숫기가 없는 ‘아둑시니’ 같지만 때로는 투전을 해서 모은 돈을 몽땅 날려버리는 호탕한 면도 있는 장돌뱅이이다. 젊은 시절, 성 처녀와 맺은 단 한 번의 애정의 연분(緣分)을 잊지 못하고 사는 외로운 인물이지만, 달빛에 감동하기도 하는 정서적인 일면도 있으며 평생을 나귀와 함께 장터에서 보낸 그는, 외곬으로 살아 온 소박한 자연인이란 점에서 전통적 토속 한국 사회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부인물(副人物) 격인 조 선달은 독특한 자신만의 성격이 나타나 있지 않고, 허 생원의 성격을 보조적으로 가끔씩 나타내 주는 인물이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생원.” 같은 대화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다른 하나인 동이는 미혼 청년으로, 허 생원의 친자(親子)인 것으로 암시되는 외로운 인물인데, 크게 보면 허 생원의 분신(分身)이라 해도 과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나 떳떳지 못한 어머니의 직업이나 행위(의부를 얻음)에도 별 불만 없이 주어진 환경에 순응(順應)하며 집을 나와 돈을 벌어 어머니를 모시려고 하는 효자다. 본능적으로 여자(충줏댁)를 접하지만 허 생원의 질책(叱責)에 순종하는 그도 역시 자연인의 전형(典型)이라 할 것이다. 특히 별 기교가 없는 순박미(純朴美)를 지닌 점에서는 허 생원과 그 맥락(脈絡)을 같이 한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세상살이의 핵심에서 벗어나 소외된 떠돌이 주변인(周邊人)들이다. 즉, 하나같이 고독(孤獨)하고 쓸쓸한 사람들이다. 그 중 주인물(主人物)인 허 생원이야말로 정착할 곳 없는 유랑인(流浪人)의 가련하고 고독한 모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지은이는 그러기에 아이들의 나귀에 대한 놀림이나 ‘허 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등의, 주막에서의 묘사를 통해 허 생원을 늙고 볼품 없는 나귀의 몰골에 자주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주인공 허 생원의 성격이나 작품상의 효과를 위해서 나귀의 과거 내력이나 초월(超越)적 운명과 함께, 그 형태상의 외모나 행동의 양상까지도 유사하게 설정했는데, 이는 소설의 예술성을 한껏 높이고 있다. 결국 양자 사이에는 깊은 공통점이 있게 되는데 정서적 융합까지 가능했기 때문에 서정적 정감을 더 한층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소설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나귀’ 의 목 뒤 털과 눈곱 낀 젖은 눈은 바로 허 생원의 모습이고, 암나귀를 보고 발광하는 늙은 나귀의 행위는 충줏집을 찾아간 허 생원의 행위와 부합(符合)되며, 단 한 번의 일로써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보게 한 나귀의 운명은 허 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 단 하룻밤의 인연에서 동이를 얻게 된 것과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허 생원과 나귀의 등식 관계가 단순한 묘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주제와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원초적인 삶과 본능의 세계를 추구(追求)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합일점(合一點)을 발견하고 거기서 인간의 참된 모습을 찾으려는 이 작품의 기본적인 관념과 일치(一致)하고 있다 할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
이 작품에서는 배경이 전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작품을 서정적이고, 시적인 경지로 승화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핵심적 모티브는 ‘혈육 찾기’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작품의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봉평 장터와 봉평에서 대화로 가는 길의 달빛과 메밀꽃 그리고 개울은 하나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공간적 배경은 자연과 인간의 친화 또는 조화를 의미하는 낭만적 공간이다. 시간적 배경은 현재의 시간에 허 생원의 과거와 동이와 그의 어머니의 과거가 삽입되고 거기에 다시 동이와 허 생원 그리고 조 선달의 미래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일상적 시간이다. 특히, 자연적 배경이 중심을 이루는데, 달이 비치는 메밀밭과 산길이 향토적 서정이라는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순박한 인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허 생원과 동이를 결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공간적 배경은 강원도 봉평 장터와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메밀꽃이 흐드러진 밤길. 메밀꽃 핀 개울가는 단순한 자연적 정경에 그치는 배경이 아니라, ‘인생의 인연’을 상징하여 작품 주제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메밀꽃 핀 산길의 달밤은 낭만적인 자연 배경으로, 허 생원의 옛이야기를 꺼내는 데 효과적이다. 또한 ‘봉평’은 허 생원과 동이 어머니를 만나게 한 곳이면서도 허 생원과 동이를 만나게 한 공간으로 구성상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런 낭만적인 배경은 작품의 주제를 애수(哀愁)에 찬 그리움으로 이끌어 간다.
“메밀꽃 필 무렵”의 구성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발생한 허 생원과 동이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과 둘이 부자 사이임이 확인되는 과정이 동일 선상에서 진행되는 단일 구성이다. 허 생원이 봉평장과 대화로 가는 길에 겪은 일과 그가 회상한 과거의 일이 뒤섞여 나타난다. 그런데 두 개의 다른 사건이 존재하나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단일 구성인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표현
인간의 삶을 운명적으로 표현한 세 가지로서, 단 한번의 연애에 대한 추억과, 동행하는 ‘동이’가 아들이라는 생각과, 등장하는 세 인물들이 모두 불행하고 외로우며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진술 방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사건을 전개시키는 기본적인 진술 방법과, 메밀꽃이 피어 있는 밤길의 감각적인 묘사와, 사건의 전개 및 성격과 심리 등의 표출과, 허 생원의 과거 행적 등 서술자가 필요한 부분만 간추려 해설하고 있다. 덧붙여 표현상 특징으로는 애욕과 혈육에 얽힌 인간의 정과 그 신비성을 서정적인 필치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고, 사실적인 배경 묘사는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체적 진행은 대화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암시와 추리 기법이 동원되고 있다. 아울러 문체에서도 간결한 대화와 사실적인 문체와 함께, 토착어와 순수한 우리말을 통해 토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한결 시적 분위기 연출하면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귀’의 상징성
허 생원과 나귀가 장돌뱅이 20년의 생활을 함께 지냈다는 점, ‘가스러진 목덜미’나 ‘개진 젖은 눈’ 등의 외모가 서로 닮았다는 점뿐만 아니라, 나귀가 암탕나귀를 보고 욕정을 부리며 발광하는 것이 허 생원이 충줏집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나귀는 허 생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동물로 허 생원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메밀꽃 필 무렵”에는 주인공 ‘허 생원’과 함께 그와 정서적으로 융합하는 동물로 ‘나귀’를 상징적으로 등장시켜 이 소설의 예술성을 한껏 높이고 있다. 즉, 주인공 ‘허 생원’의 성격이나 작품상의 효과를 위해서, ‘나귀’의 과거 내력이나 초월적 운명과 함께, 그 형태상의 외모나 행동의 양상까지도 유사하게 설정된 것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양자 사이엔 공통점이 있게 되며, 정서적인 융합까지도 가능했기 때문에 서정적 정감을 더 한층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소설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나귀’의 목 뒤 털과 눈곱 낀 젖은 눈은 바로 ‘허 생원’의 모습이요, 암나귀를 보고 발광한 늙은 ‘나귀’의 행위는 충줏집을 찾아간 ‘허 생원’의 행위와 부합되고, 단 한 번의 일로써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보게 한 ‘나귀’의 운명은 ‘허 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 단 하룻밤의 인연에서 동이를 얻게 된 것과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허 생원’과 ‘나귀’의 등식 관계가 단순한 묘사 관계에 머물지 않고, 주제와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원초적인 삶과 본능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합일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인간의 참된 모습을 찾으려는 이 작품의 기본 관념과 일치하고 있다.
‘허 생원’과 ‘나귀’와 주제와의 관계
허 생원과 나귀는 정서적으로 융합하는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나귀의 과거 내력이나 외모, 행동의 양상이 허 생원과 흡사하다. 허 생원의 성격이나 작품상의 효과를 위해서 나귀의 과거 내력, 형태상의 외모나 행동의 양상까지도 유사하게 설정한 것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양자 사이엔 공통점이 있게 되며 정서적인 융합까지도 가능했기 때문에 서정적 정감을 더 한층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나귀의 목 뒤 털과 눈꼽 낀 젖은 눈은 바로 허 생원의 모습이요, 암나귀를 보고 발광한 늙은 나귀의 행위는 충줏집을 찾아간 허 생원의 행위와 부합되고, 단 한 번의 일로써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보게 한 나귀의 운명은 허 생원의 성 서방네 처녀와 단 하룻밤의 인연에서 동이를 얻게 된 것과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허 생원과 나귀의 등식관계가 단순한 묘사 관계에 머물지 않고, 주제와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원초적인 삶과 본능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지은이의 주제 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거기서 인간의 참된 모습을 찾으려는 이 작품의 기본 관념과 일치하고 있다. (표 참조)
‘허 생원’과 ‘나귀’의 유사점과 주제
‘메밀꽃 필 무렵’에는 주인공 허 생원과 함께 그와 정서적으로 융합하는 동물로 나귀가 등장하고 있다. 허 생원의 성격이나 작품상의 효과를 위해서 나귀의 과거 내력이나 초월적 운명과 함께, 그 형태상의 외모나 행동의 양상까지도 유사하게 설정한 것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양자 사이엔 공통점이 있게 되며 정서적인 융합까지도 가능했기 때문에 서정적 정감을 더 한층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소설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나귀’의 목 뒤 털과 눈꼽 낀 젖은 눈은 바로 허 생원의 모습이요, 암나귀를 보고 발광한 늙은 나귀의 행위는 충줏집을 찾아간 허 생원의 행위와 부합되고, 단 한 번의 일로써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보게 한 나귀의 운명은 허 생원의 성 서방네 처녀와 단 하룻밤의 인연에서 동이를 얻게 된 것과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허 생원’과 ‘나귀’의 등식관계가 단순한 묘사 관계에 머물지 않고, 주제와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원초적인 삶과 본능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합일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인간의 참된 모습을 찾으려는 이 작품의 기본 관념과 일치하고 있다. (출처 : 권영민 저 지학사 문학)
‘메밀꽃 필 무렵’의 성 서방네 처녀
내가 읽어본 ‘메밀꽃 필 무렵’은 이야기로서는 사실 재미가 없다. 이야깃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흥미의 대상이 될 만한 요소도, 긴장감도 없다. 개연성만 가득 찬, 그저 밋밋하고 흐릿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성 서방네 처녀’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동이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만 넌지시 알려 줄 뿐 스토리 라인 상에서 물러앉게 한 인물이지만 내 관심은 자꾸 이 인물로 향하곤 했다. 장돌뱅이의 애환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과연 성 서방네 처녀는 조 선달이 장돌뱅이인 줄 알면서 마음을 주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고, 충주집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성 서방네 처녀의 이미지와 충주집의 이미지는 분명 다를 것이다.” 라는 단언 아닌 단언도 해보는 식이었다. 어쩌면 성 서방네 처녀는 해마다. ‘메밀꽃 필 무렵’이 되면 행여 조 선달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속절없이 물레방앗간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메밀꽃이 질 무렵’이면 또다시 그리움 속으로 조 선달을 밀어 넣고 마음을 굳게 여미는 삶을 반복하곤 했을 것이다.
만일 이 소설을 병렬 구조로 하여 성 서방네 처녀에 초점이 놓이는 스토리 라인을 설정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래도 조 선달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 라인만으로는 인간의 삶의 모습이 너무 단순화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워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과의 인연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 생활에 임하는 자세들도 그렇고 우리에게 주어진 작품 내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삶의 모습은 달관한 사람들의 그것이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체념한 사람들의 그것으로 보일 따름이다. “차라리 시적인 것에 가까운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미적인 쾌감을 준다.”는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이 왠지 공허하게 와 닿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과 관계된 맥락 때문이리라는 판단이 든다. 그렇기에 성 서방네 처녀의 이야기를 병행시키면서 그 삶의 모습을 그려내었더라면 이 작품을 통한 삶의 의미 파악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들을 해 본다.
나는 소설작품들을 읽으면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스토리 라인들을 내 나름대로 재구성해 가면서 읽는 버릇이 있다. 그런 읽기 방법이 그리 잘못된 것이 아니리라는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그 과정을 통해 통상적으로 읽을 때보다 나에게 더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어차피 문학 작품을 읽는 일은 그것을 통해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고자 해서 하는 일이기에 자신의 독특한 읽기 방법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인연이나 운명, 사랑에 관심이 많은 요즈음 이기에 드러나 있지도 않은 ‘성 서방네 처녀’의 삶이 자꾸 영화의 한 장면같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김동환, ‘비평적 에세이 쓰기’, ‘문학과 교육’ 통권 제 7호, 1999년 봄호)
이효석 소설의 문체상 특징
주어(主語) 없는 문장 : 대상 속에 사람(자신)을, 사람 속에 대상을 융화시켜 하나가 되게 한다. 한 주어 안에 포함되는 모든 경우를 적극 포착하여 문장에서 받는 인상을 부드럽게 한다. 마침표에 관계없이 같은 정서와 분위기 속에서 같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다.
(예)
드팀전 장돌이를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 닷새만큼씩의 장날에는 달보다도 확실하게 면에서 면으로 건너간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 장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비유(比喩) : 이효석의 소설은 대개 참신한 은유나 직유로 가득 차 있다.
(예)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개인어(個人語) : 이효석은 사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감칠맛 있고 실감나는 개인어(individual language)를 많이 써서 표현의 효과를 높였다.
(예)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 듯하였다.
대상과 인물 속에 서술자의 감정을 용해시키는 문체
(예)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출처 : 권영민 저 지학사 문학)
‘메밀꽃 필 무렵’의 표현
– 사실적 문체 : 전체적으로 낭만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작품이나,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진 부분이 많다. 가령, 파장(罷場) 무렵의 시골 장터 풍경의 제시나, 주인 허 생원을 닮은 나귀의 묘사,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의 묘사 같은 것은 뚜렷한 사실성을 지닌다.
– 시간 교차에 의한 서술 :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미묘한 심리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도 이 작품의 특색이다. 과거의 시간은 주로 요약에, 현재의 시간은 장면 제시에 의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 교차는 작품 속에서 차지하는 줄거리의 성격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메밀꽃이 하얗게 핀 여름 밤의 달빛을 매개체로 하여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교차함에 따라 꿈과 환상의 세계를 더듬게 되는 허 생원의 내면 세계를 입체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대화에 의한 플롯 진행, 부자 관계의 암시, 봉평과 제천 등의 지명을 반복 사용하여 의식과 감정을 고조시키는 기법 등도 소설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더한다.
문학사적 의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그의 다른 소설인 “돈”이나 “산” 그리고 “들”에서 볼 수 있는 향토색 짙은 서정성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앞의 작품들과 다른 점은 분명한 스토리를 가진 것이다. 허 생원이 봉평장을 떠나 대화로 가는 길에서 젊은 시절에 성서방네 처녀와 가진 정사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하다가 동이가 성서방네 처녀가 낳은 자기 자식임을 확인하는 내용에 성서방네 처녀의 가출과 사생아의 출산, 그리고 동이의 가출 등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첨가된다. 허 생원은 자연에 동화된 원시적인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그의 삶은 반사회적이고 반문명적인 성격을 지닌 작품으로 낭만주의 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기법적 특징
본 작품의 중간 부분은 대화 장터로 길을 떠난 직후, 허 생원의 쓸쓸한 장돌뱅이의 반평생이 소개되는 대목부터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외로운 장돌뱅이의 실패담으로서, 서두에서 나귀의 망령된 행동으로 상징되고 각다귀들의 놀림으로 돋보여진 허 생원의 왜소화된 모습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아울러 그에 대한 인간적 매력과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와 함께 ‘계집이란 쌀쌀하고 매정한 것’ 이라며 계집과는 평생 인연이 멀다고 신세타령을 하는 대목은 그 다음 소개되는 20년 전 성 서방네 처녀와의 인연이 그의 일생의 예외적 사건이요, 그에게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추억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이 괴이한 인연에 대한 회고가 본 중간 부분의 핵심이 된다.
이 회고는 허 생원 자신의 투박스런 말로 술회된다. 그리고 저 유명한 메밀꽃 핀 달밤의 섬세한 배경 묘사가 이 회고담을 감싼다. 그리고 화자의 투박한 어투와 묘한 대조를 보이며 그 빈 구석들을 살뜰하게 메워주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꿈 속같이 몽롱한 환상적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속에서는 낮에 그리고 각다귀패의 놀림감이요, 계집에게 무시받던 ‘얼금뱅이’ 라도 ‘봉평서 제일 가는 일색’ 인 성서방네 처녀와 그 ‘무섭고도 기막힌 밤’ 의 기연(奇緣)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라서 이 배경의 시적인 묘사 대목이 본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으며 일부 평자들에게는 그 속에 주제가 들어 있다고 여길 만큼 중요시되고 있다. (출처 : 윤병로, 이효석의 순수 지향과 ‘메밀꽃 필 무렵’)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단편 ‘메밀꽃 필 무렵’ 은 평양 창전리 시절 다알리아, 시르비아, 석죽 등이 만발한 정원 속에서 생활하며 집필해 온 1936년 10월 <조광>에 발표하셨던 작품인데, 발표하자마자 주위의 심한 비난과 모략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나의 아버지께서 이 작품을 발표하실 때는 봉건적 사회 풍습이 지배하던 시대라 이를 탈피하여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창작을 하셨는데 당시의 사회 풍습에서는 이런 작품이 통할 리가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개의치 않았지만 내면적으로는 심한 정신적 고통이 따랐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유진오 선생이 심적으로 많이 감싸 주었다고 한다. 유진오 선생은 언젠가 옛날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당시 조선에선 허물만이 존재하던 시대라 친구가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출처 : 이나미, 마지막 날의 아버지 이효석)
이효석
1907. 2. 23 강원 평창~1942. 5. 25 서울.
소설가로 장편소설보다 단편소설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이국에 대한 동경을 소설화했다. 호는 가산(可山).
생애와 활동
이시후(李始厚)의 맏아들로 태어나 가정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920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5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시절 조선인학생회 문우회에 참가하여 기관지 〈문우〉에 시를 발표했고, K.맨스필드, A.체호프, H.J. 입센, T.만 등의 작품을 즐겨 읽으며 문학관의 정립에 힘썼다. 당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비슷한 경향의 소설을 써서 유진오 등과 동반자 작가로 불렸다.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보름 정도 근무하다 경성(鏡城)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이때부터 작품활동에 전념하여 1940년까지 해마다 10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1933년 구인회에 가입했고, 1934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0년 아내를 잃은 시름을 잊고자 중국 등지를 여행하고 이듬해 귀국했으며, 1942년 뇌막염으로 언어불능과 의식불명 상태에서 죽었다.
문학세계
1925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봄〉이 가작으로 당선되고, 이어 〈매일신보〉에 소설 〈나는 말 못했다〉 등과 〈조선지광〉에 〈도시와 유령〉·〈기우 奇遇〉 등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초창기에 발표한 〈노령근해 露嶺近海〉(조선강단, 1930. 1)· 〈상륙〉(대중공론, 1930. 6)·〈마작철학〉(조선일보, 1930. 8. 9~20)·〈북국사신〉(신소설, 1930. 9) 등은 경향문학의 성격이 짙은 작품들이다. 1932년부터 생활이 점차 안정되자 초기의 경향문학에서 벗어나 향토적·이국적·성적 요소에 관심을 갖고, 〈돈 豚〉(조선지광, 1933. 10)·〈수탉〉(삼천리, 1933. 11)·〈산〉 (삼천리, 1936. 1~3)·〈분녀〉(중앙, 1936. 1~2) 등을 발표했다. 〈돈〉은 인간의 성적 본능을 돼지의 동물적인 성본능에 비유하고 있으며, 〈분녀〉는 성적으로 타락해가는 분녀를 통해 유교적 도덕에 과감히 도전하고 있다. 한국현대 단편소설의 대표작이기도 한 〈메밀꽃 필 무렵〉(조광, 1936. 10)은 그의 산문적 서정성이 가장 빼어난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인 메밀꽃 핀 개울가는 단순히 정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를 하나로 포함하며, 인연의 매체로 나타나 있다. 1930년대말에는 자연과 인간본능의 순수성을 시적 경지로 끌어올리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낙엽기 落葉記〉 (백광, 1937. 1)·〈개살구〉(조광, 1937. 10)·〈장미 병들다〉(삼천리문학, 1938. 1)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작품들은 이전의 향토적인 소설과 달리 서구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단행본으로 펴낸 장편 〈화분〉(1939)은 〈돈〉에서와 마찬가지로 관능적인 사랑을 그렸고, 이는 인간의 본연에 심취했던 작가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소설집으로 〈성화 聖畵〉(1939)·〈벽공무한 碧空無限〉(1941)·〈황제〉(1943)·〈월야의 두 여인〉(1962) 등이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동반자 작가(同伴者 作家/ fellow traveler)
(러)poputchik. 동반작가라고도 함.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반대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지지·선동하지도 않았던 작가.
동반자작가라는 말은 레온 트로츠키가 〈문학과 혁명〉(1925)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예술가가 아닌 혁명의 예술적 동반자라는 뜻으로 처음 썼다. 이 말은 예술가는 지적 자유를 필요로 하며 과거의 문화 전통에 의지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소비에트 초기에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예술이 등장할 때까지 과도기의 역할을 한다고 여겨 동반자작가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프(RAPP)를 중심으로 한 극좌적 프롤레타리아 문학가들은 〈독자와 작가〉라는 신문에 실린 〈동반자인가 반(反)프롤레타리아 작가인가〉라는 글에서 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동반자문학을 명확하게 대립시켰다. 그리하여 1920년대 후반 동반자작가라는 말은 반(反)혁명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제2회 혁명작가 세계대회(하리코프 회의)에서 동반자문학은 혁명적 소부르주아 문학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그러나 1931년 중반부터는 동반자작가들을 한 종파로 바라보는 입장이 비판받았다. 1920년대에 가장 재능있고 인기있던 소비에트 작가들 가운데 오시프 만델스탐, 레오니드 레오노프, 보리스 필냐크, 이삭 바벨, 일리야 에렌부르크와 ‘세라피온 형제들’의 동인들이 동반자작가에 속한다. 지금에 와서는 이들이 문학계를 지배했던 시대를 소비에트 문학의 개화기였다고 평가한다. 1950년대 냉전시에는 다른 나라에서도 동반자작가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특히 미국에서의 동반자라는 말은 공산당의 정식당원은 아니지만 공산당의 목적과 정책을 동조·지지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카프에 가입은 하지 않았으나 작품활동에 있어 카프가 주창하는 이데올로기에 동조하고 있는 작가’를 동반자작가로 보았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1930년 권환·박영희 등으로부터 논의되기 시작해 1931년 하리코프 회의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1932~3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검토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경우와 비슷하게 동반자작가를 종파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여 문예통일을 위한 바른 해결을 찾지 못했다. 이 점은 뒤에 창작방법논쟁에서 엄하게 비판되었다. 카프는 이효석·유진오를 동반자작가로 보았으나 그 범위를 넓히지는 않았다. 반면 김기진은 이무영·채만식·박화성·엄흥섭을 동반자작가로 보았는데 이것은 카프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것과는 무관하게 작품의 성격에 따라 나눈 것이다. 그밖에 장혁주·조벽암·최정희·김해강·함대훈·김영팔을 덧붙이기도 했다. 1933~34년에 카프 내에서 전향문제 등으로 상황이 악화되자 동반자작가들은 마르크스주의 세계관과 관계를 끊고 새로운 문학적 자세를 갖게 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1. 작품 선정의 취지와 지도 방법
이 작품은 봉평을 무대로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을 배경으로 한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인물의 삶과 자연적 배경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주목하여 학생들이 이 작품의 묘미를 감상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2. 작품 지도안
1. 내용 구성
제재 : 메밀꽃을 배경으로 한 남녀 간의 사랑
주제 : 떠돌이의 삶을 통해 본 인간 본연의 애정
출전 : <조광> 제12호 (1936)
2. 이해와 활동의 길잡이
이 작품을 읽으면 무엇보다도 한 폭의 수채화(서양화에서,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린 그림)와 같은 정경이 떠오른다. 하얀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메밀꽃, 그리고 물레방아간의 풍경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배경은 우선 남녀 간의 사랑을 아름답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실 허 생원과 성 서방네 처녀의 인연은 어떻게 보면 한갓 하룻밤의 애욕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메밀꽃이 핀 달밤에 정취가 있기에 허 생원은 그날 밤의 인연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배경에는 ‘길’이 있다. 봉평에서 대화로, 대화에서 제천으로 넘어가는 길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떠돌이 허 생원의 삶을 표상하는 공간이다. 길이 있기에 성 서방네 처녀와의 만남이 있었고, 떠돌아다니는 삶이기에 이별이 있었다. 또한 길이 있기에 자기 아들 동이와의 우연한 만남이 있었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길’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또 다른 만남이라는 작품 전체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배경이자, 떠돌이 삶을 운명처럼 수용하는 허 생원의 삶의 방식을 형상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라는 허 생원의 대사는 예사롭지 않다. ‘길’은 허 생원의 운명론적 삶을 표상하는 자연적 배경이요, ‘달’은 성 서방네 처녀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매개체로서의 자연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어구풀이
<187쪽>
달이 뜨렸다. : 이 작품에서 ‘달’은 허 생원이 자신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는 매개로 등장하는 중요한 소재이다.
<188쪽>
허 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 성 서방네 처녀와의 단 한 번뿐인 인연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189쪽>
거나해짐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 동이에 대한 허 생원의 관심이 드러난다. 이는 이후에 허 생원과 동이의 특별한 인연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짐승이었다. : 허 생원과 나귀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는 허 생원과 나귀의 처지가 동일시되는데, 이는 나귀가 새끼를 새로 얻었다는 작품 결말부분에서 허 생원과 동이의 부자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190쪽>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 왼손잡이는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허 생원과 동이가 부자임을 암시하는 증거가 된다.
<191쪽>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 달에 푸르게 젖었다. : 시각적 대상을 청각적 이미지(숨소리)와 촉각적 이미지(젖었다)를 동원하여 섬세하게 묘사한 장면이다.
소금을 뿌린 듯이 ∼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이 작품의 특징인 서정적 분위기와 섬세한 묘사가 잘 드러난 구절이다.
<192쪽>
옛 처녀가 만나면 ∼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 ‘정착’을 꿈꾸는 조 선달과 달리 허 생원은 떠돌이 인생을 자신의 숙명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나 있다. ‘길’은 떠돌이 인생을 상징하는 소재이고, ‘달’은 옛 추억에 대한 회상을 매개하는 소재이다.
<193쪽>
봉평? 그래 그 아비의 성은 무엇이구? : 동이가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하는 허 생원의 심리가 반영된 대사이다.
<194쪽>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 옛 여인이 아직도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기를 기대하는 허 생원의 심리가 반영된 대사이다.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 나귀가 새끼를 얻었다는 것은 허 생원이 자신의 아들을 찾았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허 생원이 자신과 나귀의 처지를 동일시하는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두 사람이 부자 관계라는 점을 암시한다. 또한 서정적인 배경 제시를 통해 여운을 남기며 작품을 마무리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3. 작가 사전
이효석(李孝石, 1907∼1942) :
강원도 평창 출생. 호는 가산(可山).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유령과 도시’를 발표하면서 경향 문학의 동반 작가로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도시 유랑민의 비참한 생활을 고발한 것으로, 그 뒤 이러한 계열의 작품들로 인하여 유진오와 더불어 카프 진영으로부터 동반자(同伴者) 작가라는 호칭을 듣기도 하였다.
1932년경부터 그의 작품세계는 사회 문제 특히 빈곤층의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순수 서정의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성(性)적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인간 본연의 애욕의 세계를 탐구하기도 하였다. ‘산’, ‘화분’, ‘돈(豚)’ 등의 작품은 남녀의 사랑과 성(性)적 애욕의 세계, 인간과 자연의 교감 등을 담고 있는 후기 이효석 소설의 대표작이다.
3. 자료실 돋보기
1.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여름날이다. 장터를 떠돌며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여름은 매우 후텁지근하고 불쾌한 시간적 배경이지만, 달이 뜬 여름날 밤의 정취는 매우 낭만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러한 시간적 배경에 허 생원의 과거, 동이와 그의 어머니의 과거가 교묘하게 삽입되어 시간적 배경은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강원도 봉평 장터와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메밀꽃이 흐드러진 달밤이다. 이 공간은 단순히 인물이 이동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허 생원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소이며, 또한 허 생원의 추억을 더욱 아름답게 부각시키는 낭만적 공간이다. 그리고 떠돌이 인생의 인연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성하는 배경이다.
2. 더 찾을 거리
– 이효석의 ‘돈(豚)’
줄거리 :
주인공 식이는 돼지 한 쌍을 사서 길렀으나 수놈은 죽고 암놈만 겨우 살아 남았다. 여섯 달을 키운 후 씨돼지에게 맡겼으나 돈만 허비하고 실패했다. 달포가 지나 육중한 수놈에게 씨를 붙여 가까스로 성사시켰으나, 두 돼지가 일을 치르는 동안 식이는 달아난 이웃집 분이를 생각한다. 기차를 타고 어디로든 가면 분이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식이는 하마터면 열차에 치일 뻔하고 돼지는 열차에 깔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식이는 넋을 잃고 금새 쓰러질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작품 해제 :
이효석의 후기 작품들은 인간의 본능적인 성애(性愛)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돈(豚)’에서처럼 동물의 성행위와 등장인물의 성적 욕구를 병치시키는 기법을 반복함으로써, 인간의 성욕이 갖는 동물적 본성에 탐색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 작품은 여전히 유교적인 성윤리가 지배적이던 시대에 대담하게 인간의 성욕을 표현해 냄으로써 독특한 작가적 지위를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성욕을 곧 동물적인 본능으로서 제시하는 수준에 그칠 뿐,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갖는 의미에 대한 천착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 이효석의 ‘들’
줄거리 :
중학교를 퇴학 맞고 처음으로 도회에서 쫓겨 시골로 내려온 ‘나’는 변하지 않은 버들 숲 둔덕과 과수원의 모습을 보며 기쁨을 느낀다. 어느 날 나는 개울녘 풀밭에서 한 자웅(雌雄)의 개가 장난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그것을 계속 지켜보다가 주위에 옥분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득추에게 가난하다고 파혼 당한 처지이다. 나는 그녀를 측은히 생각했고, 그녀도 자기를 동정해 주는 ‘나’를 좋아했다. 일요일이 되어 ‘나’는 문수와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둘은 이 협착한 땅에 자유로이 책도 읽고 지낼 수 있고 아무리 자유로운 말을 외쳐도 중지 당하는 법이 없는 ‘들’이 있음을 기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나’는 과수원으로 몰래 딸기를 따러 가다가 옥분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 자게 된다. ‘나’는 옥분과의 일을 문수에게 말하려다가 문수 또한 옥분과는 남이 아닌 처지라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무거운 감정이 가벼워짐을 느끼게된다. 그 후 문수는 정학 처분을 받았으나, 영영 학교를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나’와 문수는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돌연히 문수가 끌려간 후 소식이 없게 된다. ‘나’는 문수가 돌아오면 함께 지낼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여름 계획을 세운다.
작품 해제 :
이 소설은 사회 운동을 하다가 학교에서 쫓겨나서 ‘들’을 벗삼아 사는 한 주인공의 이야기로, 세상 사회의 부자유스러움과 속박에서 벗어난 기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죄의식이 전혀 없는 성(性)의식이 나타나 있다. 즉 ‘들’의 서정적인 배경 속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는 자연적 욕구의 일부분이면서 도덕적 가치 이전의 근원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이효석의 에로티시즘 미학은 그의 자연 회귀 소설의 기저를 이루는 미학적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효석을 가리켜 흔히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 또는 ‘위장된 순응주의자’라는 단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종래의 경향적 색채에서 탈피하여 자연으로의 회귀를 통한, 인간의 근원적인 서정 세계를 구축했다는 의견과 상통한다.
4. 참고 자료
‘메밀꽃 필 무렵’은 장돌뱅이들의 세계를 다룬 이야기이다. 장돌뱅이는 장사꾼이나 상인 등과 공통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이들은 떠돌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지역에서 정착하여 상업을 하는 이들의 계층과는 구분된다.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삶은 주기적인 반복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생활 리듬은 운명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계의 특징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성적(性的)인 유인력이 작중 인물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그러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 ‘메밀꽃 필 무렵’이다. 우선 동이와 충주집의 관계, 그를 질타하는 허 생원의 심리가 성적인 유인력을 매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이효석 소설을 특징짓는 한 징표로 지적되는 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성적인 모티프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갈등은 혈연의 윤리적인 통제를 통해 해소된다. 그것은 허 생원과 동이 사이가 성적인 대립을 끝까지 용납할 수 있는 그러한 사이가 아니라는 점이 유도한 결과이다. 둘의 관계는 이른바 핏줄의 관계인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은 친숙한 세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친숙성은 이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우선 앞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인물 사이에 갈등이 없다는 점이 친숙성의 다른 면모이다. 이는 운명적인 삶을 살아가는 허 생원의 고칠 수 없는 과거사를 회상하는 가운데 전개되는 사건의 특성에 연관되는 점이다. 정확히 반복되는 리듬을 타고 이루어지는 삶의 친숙성은 자연과 친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메밀밭을 묘사한 데서 사용된 비유를 통해, 허 생원이 당나귀를 자신의 분신으로 동일시하는 데서, 그리고 담론 주체의 상호 전환에 전혀 무리가 없는 데서 찾아지는 특징이다.
이 낯설지 않음은 다시 여러 층위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작가와 작가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소재 차원의 세계 사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효석은 자기가 태어난 고장에서 정착한 작가라고 하기 어렵다.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그는 보통학교를 마칠 때까지만 고향에서 생활한다. 이후 서울에 와서 학교를 다녔고, 처가가 있던 경성에서 생활했는가 하면, 평양에서 교편을 잡다가 중국 등지를 여행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친숙한 세계는 작가의 기억이 잠재된 고향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친숙한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 지어 작중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낯설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인물들 사이에 갈등이 없는 관계이다. 또한 작중 인물이 대하는 자연이 낯설지 않은 자연이라는 점이 친숙성의 한 면이다. 80리 밤길을 걷는 데 아무 불편이 없을 정도로 지리가 낯익은 것이다. 작중 현실에 대한 독자들의 관계가 낯설지 않다. 이는 우리들 이전 세대의 삶에 대한 비애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긴 하지만, 익숙해진 세계임에 틀림없다.
이런 친숙한 세계는 소설의 인식적 기능을 제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가 우리 소설적인 맥락에서 연관지어 깊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한국 문학 전통을 논하는 자리에서 심도 있는 검토가 있어야 할 과제이다. 아직 소설 본질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세계, 폐쇄적인 세계에 집착하는 이유의 검토가 있어야 한다. 모든 소설은 이전 소설에 대한 반역이라는 명제를 꼭 수용하려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통의 변형과 창조에 대한 소설적 시각은 마땅히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소설이 친숙한 세계를 다룬다는 방향으로 편향된다는 것은 소설의 논리적인 대응 논리를 약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성을 띠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우한용, <소설 교육론>)
참고 문헌 :
정명환, ‘위장된 순응주의-이효석론’, <창착과 비평>(1963 겨울∼1969 봄)
이상옥, <이효석 연구>(민음사, 1984)
이해하기
1.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을 생각하면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배경과 인물 성격의 형상화, 배경과 주제 제시의 관련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1) 메밀꽃이 피는 계절은 어느 때인가?
예시 학생 활동 : 여름철
(2) 장 풍경이나 여름 밤의 산길 풍경은 주제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예시 학생 활동 :
이 작품에서 장의 풍경은 찌는 듯한 여름 낮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떠돌이 장돌뱅이에게는 매우 짜증나는 시간이다. 이는 이후에 묘사되는 여름 밤의 산길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여름 달밤의 풍경은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더욱 아름답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며 떠돌이 인생의 인연이라는 작품의 주제와 긴밀히 연결된다.
(3) 이 작품에는 사회 현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작품에서 당대 사회의 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시 학생 활동 :
이 작품에서 그 당시의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소재나 사건은 장날의 풍습, 장돌뱅이의 생활상 등이다. 이를 통해 아직은 근대적 상권이 형성되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시대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고 주로 남녀 간의 사랑과 순수 서정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이 지어진 때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던 1930년대 후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당시의 시대적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2. 이 작품은 해가 점차 기우는 시간에서 시작되어 보름달이 환하게 뜬 자정 무렵의 시간대에서 끝난다. 우리는 시간을 표시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시계를 사용하지만, 이 작품이 씌어졌던 시대에는 시계가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시간의 경과는 어떤 식으로 제시되고 있는지 작품 속에서 찾아보자.
교수 학습 방법 : 배경 묘사 등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부분을 찾아보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187쪽) : 여름 낮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190쪽) : 저녁 무렵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191쪽) : 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194쪽) : 시간의 경과
3. 이 작품에서 나귀는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허 생원과 나귀의 공통점을 들고, 작가가 왜 나귀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말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허 생원과 나귀를 묘사하고 있는 부분, 허 생원이 나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부분을 찾게 한 후, 이를 통해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생각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이십 년의 세월을 함께 한 나귀의 모습은 허 생원의 모습과 동일시되고 있다. ‘까스러진 목 뒤 털과 개진개진 젖은 눈꼽낀 눈’은 허 생원의 모습과 동일시되고 있으며, ‘닳아 없어진 굽’ – 허 생원의 인생 역정을 암시한다. 또한 ‘암나귀를 보고 발광하는 늙은 나귀의 암샘’ 은 충줏집에 대한 허 생원의 연정과 동일시되며, ‘피마에게 새끼를 보게 함’ 은 성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의 인연으로 동이를 얻게 되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렇게 작가는 나귀를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허 생원의 인생살이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4. 이 작품은 주인공의 내면 세계를 배경 묘사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서정성을 드러내는 구절을 찾아보고, 이를 통해 작가가 노리는 미적 효과는 무엇인지 말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자연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게 한 후, 이러한 배경묘사가 작품의 주제 형상화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생각하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메밀꽃이 핀 달밤의 서정적인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와 같은 구절에서는 자연물 속에 인간이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배경 묘사는 허 생원과 성 서방네 처녀가 물방앗간에서 맺었던 하룻밤의 인연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이러한 배경 묘사는 인간과 자연의 하나됨,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옛 추억과 더불어 살아가는 떠돌이 인생의 숙명적인 삶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해 준다.
확장하기
1. 이 작품에서 허 생원은 불우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젊은 시절의 사랑의 감정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하나의 소설 작품은 독자에 의해 내면화됨으로써 그 생명력이 살아난다. 허 생원이라는 인물의 삶에 대해 학생들이 한편으로는 동화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거리를 둠으로써 다른 인물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1) 허 생원이 동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오늘 같이 달이 밝은 여름밤에는 어김없이 당신과 나누었던 젊은 날의 추억이 떠오르오, 그 동안 잘 지내고 있었는지 궁금하구려, 오늘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은 당신의 아들이자 나의 아들인 동이를 만났기 때문이오.
당신이 설마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닌지요? 그래요, 당신이 나를 잊을 리가 없겠지요. 당신은 지금쯤 아마 나를 원망하며 지내고 있을 테니까요.
그날 밤, 우리는 아름다운 메밀밭의 풍경에 취해 하룻밤의 기막힌 인연을 맺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나 같이 못난 사람에게 어찌 그리 기막힌 인연이 생길 수 있었는지…… 하지만 난 당신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었소. 당신을 다시 찾았을 때 당신네 집안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으니까. 만일 내가 당신을 찾을 수 있었다손 치더라도 당신을 책임질 수는 없었을 거요. 난 어차피 떠돌이 인생이니까.
보고 싶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 세세한 사연도 듣고 싶소.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당신을 다시 만난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일 것만 같소. 공연히 당신의 상처를 더욱 키우기만 할지도 모를 일이요. 그리고 어차피 나는 떠돌이 장돌뱅이 인생을 정리할 수도 없으니.
하지만 당신에게는 든든한 아들 동이가 있으니 마음이 놓이기도 하구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은 이 못난 내가 아니라 동이가 아닐까 싶구려. 다만 한 가지 기억해 주길 바라오. 지금도 달이 밝은 밤이면. 그리고 메밀꽃이 흐드러진 산길을 지날 때면 당신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2) 허 생원이 지니고 있는 삶의 가치에 대해 토론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학생1 : 난 허생원이 순수를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첫사랑인 물레방앗간 처녀를 잊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래. 그리고 허 생원은 장돌뱅이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텐데도 ‘평생 달 보며 살겠다’ 고 말할 정도로 여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난 허 생원의 순수와 여유로운 삶의 자세를 배우고 싶어.
학생2 : 난 허 생원이 현실을 도피하는 비겁한 사람으로 보여. 평생 장돌뱅이로 살아가겠다는 말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끼리 서로 부딪치며 공동체 속에서 일정한 책임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는데 허 생원은 개인주의가 너무 강해.
2. 이 작품에는 흑백의 색채 이미지가 잘 대비되고 있다. 이 작품을 흑백 영화로 제작한다면, 어느 장면에 흑백의 이미지를 배치하겠는지, 시나리오로 각색할 것을 예상하면서 그 장면을 재구성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이 작품의 특징은 아름다운 자연의 이미지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주목하여 학생들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학습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이 작품에서 흑백의 이미지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은 메밀꽃이 핀 달밤의 정경이다. 밤의 정경은 기본적으로 어두운 색채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 ‘달’ 과 ‘메밀꽃’ 은 흰색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어두운 물방앗간에서 만난 성 서방네 처녀의 환한 얼굴도 강렬한 흑백의 대립을 보여 준다.
예컨대 교과서 191쪽11행부터 192쪽9행까지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S#1 어두운 밤길
허 생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가. 점차 카메라는 어둠 쪽으로 이동한다. 화면 바깥에서 허 생원의 음성 ”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S#2 메일밭의 밤 풍경
어두운 산길이 롱샷으로 포착된 다음, 점차 하얀 메밀꽃으로 카메라가 이동한다. 화면 바깥으로 나귀의 방울소리 들리고.(사이)
허 생원의 소리. “장 선 꼭 이런 밤이었네.” 허 생원의 얼굴 클로즈업.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냐.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 가는 일색이었지.”
S#3 30년 전의 어느 날 밤. 객주집 토방
젊은 시절의 허 생원. 토방 밖으로 나간다. 담배를 파는 젊은 시절의 허 생원 클로즈업.
S#4 물방앗간 내부
성 서방네 처녀 울고 있다. 다가가는 허 생원,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
S#5 어두운 밤길
허 생원, 담배를 끄고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여전히 어두운 밤하늘.
S#6 물방앗간 내부
성 서방네 처녀의 환한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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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작가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라는 구절로 유명한, 이효석 작가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메밀꽃 필 무렵’으로 익숙하지만, 원제(원래 제목)는 ‘모밀꽃 필 무렵’입니다.
1936년 10월에 쓰여진 작품인데, 같은 해에 쓰여진 작품들이 쟁쟁해요.
이상 작가의 ‘날개’, 그리고 김유정 작가의 ‘동백꽃’등이 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읽었고, 익숙하게 느끼는 단편인데, 이 작품 속 공간배경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은 이 작품 때문에 관광객이 꾸준히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람들 머리 속엔 메밀꽃, 하면 봉평이 떠오른다고 하더군요.
사실만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묘사를 곳곳에서 사용한 소설인데, 그 묘사의 수준이 높아서 풍경이 유독 아름답게 표현된 책이기도 합니다. 아름답고, 여러분이 배웠던 ‘공감각적’인 문장도 많이 있어요.
이야기 시작 전에 생원을 설명해줄게요. 조선시대 배경이라면 벼슬 중 하나를 말하는거지만, 이건 나이많은 선비, 나이가 좀 있는 남자들을 예의있게 부르는 말입니다.
편하게 한다면, “어이 허씨~ 허군~” 정도가 되겠지요? 그치만 예의있게 “허선생, 허선생님” 정도의 호칭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1930년대 어느 여름날 강원도 봉평에서 대화장터로 가는 길에 일어나는 일인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허생원이 동이라는 인물에게 마음을 열면 열수록 허생원과 동이의 실제 거리도 가까워지게 되는 이야기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요.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는 정말 예쁘고 고운데, 대신 냄새가 영 좋지 않대요, 그래서 정작 직접 가보면 소설 속에서 상상했던 환상이 깨진다고 하니 미리 알아둬도 좋겠지요?
밤중에 달빛 아래에서 보면 더더욱 아름답다고 합니다. 색이 저렇게 하야니까 그럴만도 하네요.
메밀꽃밭을 구경중인 사람들 모습인데, 풍경이 예쁘긴 예쁘죠?
이 글은 이효석 작가의 대표작인데, 작가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해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메밀꽃이 피어있는 달밤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할도 하거든요.
문장에서 묘사하는 풍경을 최대한 상상하며 읽어보길 바랍니다.
가끔 어떤 작품을 가지고 영화나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을 때, ‘에이 책 읽으면서 상상한 모습보다 별론데?’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상상 속의 풍경이 현실 속 풍경을 압도할 때, 제대로 상상한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문장을 찬찬히 보면서 어떤 모습일지 머리로 그려보세요.
이 책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진행되고,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판매하던 ‘장돌뱅이(떠돌이 장수를 낮춰 부르던 호칭)’ 허생원의 삶, 그리고 슬픔과 소소한 기쁨, 그 안에서 만났던 우연한 인연 등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장돌뱅이’는 시장을 뱅뱅 돌면서 물건을 파는, 떠돌이 상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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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인물(네이버 지식백과 부분 발췌, +(더하기) 이후로는 쌤이 추가)
· 허생원 : 평생 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아 살아온 인물. 못난 얼굴과 가난, 소심한 성격 때문에 평생 혼자 살아왔죠. 젊은 시절 성 서방네 처녀를 만나 하룻밤을 지냈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해요.
+ 소설의 주인공이며 왼손잡이이고 얼금뱅이(얼굴에 수두자국이 있는걸 ‘얽었다’고 하는데,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는 사람을 놀리듯 낮춰부르는 말.)에, 한평생 장돌뱅이로 살았지만 재산도 많이 못 모은 늙은이입니다. 젊은 시절엔 돈을 벌긴 벌었는데, 노름(도박)으로 다 날리고, 가족은 늙은 나귀 한 마리 뿐이에요. 그러다보니 나귀를 무지 아끼죠.
· 동이 : 젊은 장돌뱅이(여러 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인물이에요. 허생원처럼 왼손잡이이며 순한 성품을 갖고 있어요. 왼손잡이는 두사람의 부자관계를 암시하는 문학적 창치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게 될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확인하세요.
· 조선달 : 허생원의 친구이자 동료로 허생원과 함께 장돌뱅이로 살아온 인물이에요. 허생원의 말을 누구보다 잘 들어주는 친구죠. + 이 사람도 나이가 지긋하고, 동이와 장을 함께 다니면서 그들의 곁을 지켜주는 인물이지요.
· 성서방네 처녀 : 젊은 시절 허생원과 하룻밤을 지낸 사이로, 허생원이 평생 그리워하는 인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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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모밀꽃 필 무렵
이효석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뭇군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 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치 않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이 동업의 조선달을 나꾸어 보았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 본일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 몫 벌어야겠네.”
“오늘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날 산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여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필과 주단바리가 두고리짝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각이 어수선하게 남았다.
다른 축들도 벌써 거진 전들을 걷고 있었다. 약빠르게 떠나는 패도 있었다. 어물장수도, 땜쟁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된다. 장판은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해 놓고 계집의 고함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생원, 시침을 떼두 다아네…… 충주집 말야.”
계집 목소리로 문득 생각 난 듯이 조선달은 비죽이 웃는다.
“화중지병이지. 연소패들을 적수로 하구야 대거리가 돼야 말이지.”
“그렇지두 않을 걸. 축들이 사족을 못쓰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 군 해두 왜 그 동이 말일세. 감쪽같이 충줏집을 후린 눈치거든.”
“무어 그 애숭이가 ? 물건 가지고 나꾸었나부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그 길만은 알 수 있나….. 궁리 말구 가보세나 그려. 내 한 턱 씀세.”
그다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 것을 좇아갔다. 허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얼음뱅이 상판을 쳐들고 대어설 숫기는 없었으나,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일도 없었고,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줏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 충줏집 문을 들어서서 술좌석에서 짜장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어찌 된 서슬인지 발끈 화가 나 버렸다. 상 위에 붉은 얼굴을 쳐들고 제법 계집과 농탕치는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제법 난질꾼인데, 꼴사납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농탕이야.장돌뱅이 망신만 시키고 돌아다니누나. 그 꼴에 우리들과 한몫 보자는 셈이지.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 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된 눈망울에 부딪칠 때, 결 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생원은 조금도 동색하는 법없이 마음먹은 대로 다 지껄였다.
어디서 주워먹은 선머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라, 냉큼 꼴치워.
그러나 한 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하염없이 나가는 꼴을 보려니,도리어 측은히 여겨졌다. 아직도 서름서름한 사인데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마음이 섬짓해졌다. 주제도 넘지, 같은 술손님이면서두 아무리 젊다구 자식 낳게 된 것을 붙들고 치고 닦아셀 것은 무어야 원. 충줏집은 입술을 쭝긋하고 술 붓는 솜씨도 거칠었으나, 젊은 애들한테는 그것이 약이된다고 하고 그 자리는 조선달이 얼버무려 넘겼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애숭이를 빨면 죄 된다. 한참 법석을 친 후이다. 담도 생긴 데다가 웬일인지 흠뻑 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허생원은 주는 술잔이면 거의 다 들이켰다. 거나 해짐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헐 작정이었누 하고,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모질게 책망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얼마나 지난 뒤인지 동이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고 정신없이 허덕이며 충주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생원 당나귀가 바를 끊구 야단이예요.”
“각다귀들 장난이지 필연코.”
짐승이도 짐승이려니와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뒤를 따라 장판을 달음질하려니 거슴츠레한 눈이 뜨거워질 것 같다.
“부락스런 녀석들이라 어쩌는수 있어야죠.”
“나귀를 몹시 구는 녀석들은 그냥 두지 않을걸.”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가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꼽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슬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니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투르르거렸다. 콧물이 튀었다. 허생원은 짐승 때문에 속도 무던히는 썩었다. 아이들의 장난이 심한 눈치여서 땀 밴 몸둥아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좀체 흥분이 식지 않는 모양이었다. 굴레가 벗어지고 안장도 떨어졌다. 요 몹쓸 자식들, 하고 허생원은 호령을 하였으나 패들은 벌써 줄행랑을 논 뒤요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이 호령에 놀래 비슬비슬 멀어졌다.
” 우리들 장난이 아니우.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발광이지.”
코흘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고 녀석 말투가.—–”
“김첨지 당나귀가 가 버리니까 온통 흙을 차고 거품을 흘리면서 미친소같이 날뛰는걸.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우. 배를 좀 보지.”
아이들은 앙돌아진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뭇 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리워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아이의 웃음소리에 허생원은 주춤하면서 기어코 견딜 수 없어 채칙을 들더니 아이들을 쫓았다.
“쫓으려거든 쫓아보지.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줄달음에 달아나는 각다귀에는 당하는 재주가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나도 후릴수 없다. 그만 채찍을 던졌다. 술기도 돌아 몸이 유난스럽게 화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한이 없어. 장판의 각다귀들이란 어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조선달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드팀전 장돌림을 시작한 지 이십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장을 빼논적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지방도 헤매기는 하였으나 강릉 쯤에 물건 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내를 돌아다녔다. 닷새만큼씩의 장날에는 달보다도 확실하게 면에서 면으로 건너간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있는 마을에 거의 가까왔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 더구나 그것이 저녁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 푼이나 모아 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읍내에 백중이 열린 해 호탕스럽게 놀고 투전을 하고 하여 사흘 동안에 다 털어 버렸다.
나귀까지 팔게 된 판이었으나 애끊는 정분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념하였다.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장돌림을 다시 시작할 수 밖에는 없었다. 짐승을 데리고 읍내를 도망해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짐승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었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산을 모을염은 당초에 틀리고,간신히 입에 풀칠 하러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호탕스럽게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 하나 후려보지도 못하였다. 계집이란 쌀쌀하고 매정한 것이었다.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신세가 서글퍼졌다. 일신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꼭 한번의 첫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두 도무지 알 수 없어.”
허생원은 오늘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 내려는 것이다. 조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도 없었으나, 허생원은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 부지.”
아무렴! 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를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주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은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으나 성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 날 판인 때였지. 한 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 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건 그 다음날이렷다.”
“다음 장도막에는 벌써 온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판은 소문에 발끈 뒤집혀 오죽해야 술집에 팔려가기가 상수라고 처녀의 뒷 공론이 자자들 하단 말이야. 제천 장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나? 하나 처녀의 꼴은 꿩 궈먹은 자리야.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수 좋았지. 그렇게 신통한 일이란 쉽지 않어. 항용 못난 것 얻어 새끼 낳고 걱정늘고, 생각만 해두 진저리가 나지··· 그러나 늙으막바지까지 장돌뱅이로 지내기도 힘드는 노릇 아닌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생애와두 하직하려네. 대화쯤에 조그만 전방이나 하나 벌이구 식구들을 부르겠어. 사시장천 뚜벅뚜벅 걷기란 여간이래야지.”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테야.”
산길을 벗어나니 큰 길로 틔어졌다. 꽁무니의 동이도 앞으로 나서 나귀들은 가로 늘어섰다.
“총각두 젊겠다, 지금이 한창 시절이렷다.충주집에서는 그만 실수를 해서 그 꼴이 되었으나 설게 생각 말게.”
“처,천만에요. 되려 부끄러워요. 계집이란 지금 웬 제격인가요. 자나 깨나 어머니생각뿐인데요.”
허생원의 이야기로 실심해 한 끝이라 동이의 어조는 한 풀 수그러진 것이었다.
“아비 어미란 말에 가슴이 터지는 것도 같았으나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 피붙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 걸요.”
“돌아 가셨나?”
“당초부터 없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생원과 선달이 야단스럽게 껄껄들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랴 했으나 정말이예요.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나,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있는 고장도 모르고 지내와요.”
고개가 앞에 놓인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내렸다. 둔덕은 험하고 입을 벌리기도 대견하여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건뜻하면 미끄러졌다. 허생원은 숨이 차 몇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이가 알렷다. 동이 같이젊은 축이 그지없이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바탕 쭉 씻어 내렸다.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 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나 밤 물은 뼈를 찔렀다.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서 전망나니예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할 날 있었을까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고 하니 집꼴이 무어겠소.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쳐나서 부터 이 짓이죠.”
“총각 낫세론 동이 무던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물은 깊어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맹이도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 듯하였다. 나귀와 조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넜으나 동이는 허생원을 붙드느라고 두 사람은 헐씬 떨어졌다.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리 말은 안해 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봉평 ?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이구 ?”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 하다가 허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었다.
앞으로 꼬구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버렸다. 허비적거릴수록 몸은 걷잡을 수 없어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퍽이나 흘렀었다. 옷째 쫄딱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여윈 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안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여하실 것 없어요.”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
“늘 한 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 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랫다?”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 더 업혔으면도 하였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요? 생원.”
조선달은 바라보며 기어이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했던가?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 쭝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 귀새끼 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를 도는 때가 있 다네.”
“사람을 물에 빠치울 젠 딴은 대단한 나귀새끼군!”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 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신이 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도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이 아래 글은, 단어의 뜻이 풀어져 있는 ‘직역’ 버전입니다. 원작 문장의 맛을 느껴보셨다면, 아래 버전을 읽어보세요. ^^ 아예 요즘 소설처럼 풀어진 건 맨 밑에 있습니다.
모밀꽃 필 무렵
이효석
여름 장이란 원래 잘 되지 않아서 해는 쨍쨍하지만 장이 선 곳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놓은 여러 천막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덥고 뜨끈뜨끈하게 만든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무리가 길거리에 별일 없이 머뭇머뭇 거리고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무리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필요는 없다. 매우 귀찮고 염치없게 날아드는 파리떼도 모기랑 똑 닮아서는 크기는 훨씬 큰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찮다. 어릴적 걸린 수두 자국 때문에 얼굴이 얼금얼금 파인 자국이 있고 왼손잡이인 허선생, 이 책에서는 허생원이라 부르겠다. 허생원, 그는 드팀전을 담당하는 장사꾼이었다. 드팀전은 무명, 삼베, 비단 등 온갖 옷감 뭉치들을 둘둘 말아 파는 곳을 말하는데, 사람이 하도 없으니 장터를 보던 허생원은 결국 같은 일을 하는 친구 조씨, 조선배를 낚으려고 시도했다. 여기서는 조선달이라고 부르겠다.
“그만 할까?”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번이나 만족스럽게 물건을 팔아 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 장에서나 잔뜩 벌어야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겠구만.”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 날 번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천막을 걷고 벌여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 천과 주단 몇 킬로그램 커다란 상자 두 개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각이 정신없이 지저분하게 남았다.
다른 무리들도 벌써 거의 장사를 정리하고 있었다. 얄밉도록 재빠르게 떠나는 무리도 있었다. 생선장수도 구멍난 냄비를 고쳐주는 땜장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모습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강원도 평창의 두 지역,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먼저 간 무리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 리 밤길을 힘없이 천천히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장터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아 돈벌어야 하는 걸 장돌뱅이라 부른다. 장돌뱅이라면 이 지역 저 지역 돌아다니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장터는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되어있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술취한 놈 욕설에 섞여 계집의 몹시 악을 쓰며 덤벼드는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늘 계집의 고함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허선생, 시침을 떼두 다 아네…… 충주에 사는 그 여인.. 말야.”
충주에 사는 여인을 충줏댁이라 부르던 조선달은 계집 목소리를 듣고 갑자기 생각난 듯이 허생원을 보며 웃는다.
“화중지병(그림의 떡)이지. 나도 관심이야 있지만 젊은 패거리들을 라이벌로 생각해봐야 상대가 되겠나.”
“그렇지두 않을걸. 무리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곤 해두 왜 그 동이라는 녀석말일세, 감쪽같이 충주댁을 그럴듯한 방법으로 꼬셔낸 것 같거든.”
“뭐 그 어려보이는 놈이? 물건으로 꼬셨나 보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자세히 알 수 있겠나…… 고민 말구 가보세나 그려. 내 한턱 쏘겠네.”
그다지 가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지만 쫓아갔다. 허생원은 계집과는 인연이 별로 없었다. 얼금뱅이 얼굴을 쳐들고 들이댈 숫기도 없는, 수줍은 사람이었고 계집 쪽에서 맘에 들어한 적도 없었으나, 인생의 절반을 쓸쓸하고 꼬이게 살아왔다. 충주댁을 생각만 해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어버린다. 충주댁 집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술집 자리에서 진짜로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날카로운 기분이 어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발끈 화가 나버렸다. 상 위에서 붉은 얼굴을 쳐들고 제법 계집과 서로 좋다고 만지작거리며 노는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제법 술과 여자에 빠져 하는 짓이 좋지 않은 인간이라 꼴사납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희롱질이야. 장돌뱅이 망신만 시키고 돌아다니는구먼. 그 꼴을 하고는 우리들과 같이 장사를 해보자는 이거야?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부터 꾸짖고 타일렀다.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흥분한 눈망울을 마주쳤을 때, 그 참에 뺨따귀를 한 대 갈겨 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동이도 화를 내고 팩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생원은 조금도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말해버렸다
― 어디서 주워 온 덜 자란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너에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퍽이나 기분이 좋겠다. 장사란 믿음직스럽게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슨 필요야, 나가거라, 니 꼴 볼일 없게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그러나 한마디도 말대꾸나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나가는 꼴을 보려니, 도리어 동이가 안타깝게 생각됐다. 아직도 서먹한 사이인데 너무 심하게 한 게 아닐까 하고 마음이 섬뜩해졌다. 내가 오버를 했구나. 같은 술손님이면서도 아무리 젊다고 자식 나이 쯤 되는 것을 붙들고 치고 몰아세우고 나무랄 것은 무어야, 원.. 충주댁은 입술을 쫑긋하고 술 따르는 솜씨도 거칠었으나, 젊은애들한테는 그렇게 한 번쯤 혼나는 것이 약이 된다고 하며 그 자리는 조 선달이 대충 얼버무려 넘겼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어린 젊은이를 유혹하는 것은 죄 짓는 것이야.
한참 난리를 친 후이다.
깡도 생긴데다가 웬일인지 흠뻑 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허 생원은 주는 술잔마다 거의 다 들이켰다. 술에 얼큰하게 취하자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가 나가서 어떻게 하고 있을지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뺏어서 어떡하려고 했나 하고, 어리석은 내 꼬락서니를 냉정하게 꾸중하는 마음도 한 편에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동이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나를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고 정신 없이 허덕이며 충주댁의 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허생원 아저씨 당나귀가 묶어놓은 줄을 끊구 야단이 났어요.”
“각다귀 같은 장난꾸러기 짓이지 분명히.”
짐승도 짐승이지만 아까 나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해놓고 나에게 당나귀 일을 알려주러 온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뒤를 따라 장터를 달려가려니 게슴츠레하게 뜬 눈이 괜히 눈물로 뜨거워질 것 같다.
“말려보려 했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녀석들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나귀를 몹시 귀찮게 구는 녀석들은 항상 그냥 두지 않더라고.”
허생원과 반평생을 같이 지내 온 짐승이었다. 같은 술집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터에서 장터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거칠거칠한 목 뒤 털은 주인 허생원의 머리털처럼 쉽게 조각조각 바스러지고, 없어보이게 물기가 엉겨붙어있는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꼽이 흘렀다. 끝이 닳아서 털이 다 없어지고 자루만 남은 빗자루처럼 짧게 쓸려 말려올라간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봤자 어차피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발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로 신발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 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조금씩 스며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알아보았다. 간절히 부탁하는 듯한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가워한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니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약간 벌린채 투르르거렸다. 콧물이 튀었다. 허생원은 짐승 때문에 속도 꽤 썩었다. 아이들의 장난이 심했는지 땀에 쩔은 나귀의 몸뚱어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도저히 흥분이 식지 않는 모양이었다. 목에 묶은 줄이 벗겨지고 허생원이 올라타던 안장도 떨어졌다. 요 몹쓸 자식들, 하고 허생원은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무리들은 벌써 도망을 친 뒤고, 몇 명 남지 않은 아이들이 소리에 놀라 조심조심 힘없이 멀어졌다.
“우리가 장난쳐서 그런게 아니에요.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미친놈처럼 저런거지.”
코흘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고 녀석 말투가 쯔쯔.”
“김씨 당나귀가 가버리니까 하루종일 흙을 차고 입에서 거품을 흘리면서 미친 소같이 날뛰는걸.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고요. 배쪽을 좀 보시지. 아저씨 나귀 고추가 섰다고요.”
아이는 못마땅하게 삐진듯한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생원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마치 긴 시간 여자와 인연이 없어서 외로웠던 자신의 모습같았다. 다른 사람들 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려 설 수 밖에 없었다.
“늙은 주제에 암컷에게 흥분하는 셈이야, 저놈의 짐승이.”
아이의 웃음소리에 허 생원은 주춤하면서 결국 견딜 수 없어 채찍을 들더니 아이를 내쫓았다.
“쫓으려거든 쫓아 보지.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냉큼 달아나는 각다귀 같은 놈들에게는 당할 방법이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나도 휘둘러 때릴 수 없다. 결국 채찍을 던졌다. 술기운도 돌아 몸이 다른 날과 달리 심각하게 화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끝이 없어. 장터의 각다귀 녀석들이란 어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조 선달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드팀전 장을 돌면 물건을 팔기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 장을 빼논 적은 거의 없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쪽에도 가고, 멀리 영남 지방도 헤매기는 하였으나 강릉 쯤에 물건 하러 갈 때 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네를 뱅뱅 돌아다녔다. 5일 동안 장날에는 달뜨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건너간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을 살펴보러 간 일도 별로 없었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의 도착했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 게다가 그것이 저녁 쯤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겪는 것이건만 허 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을 꽤 모아 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동네에 음력 7월 보름날 기운넘치고 절제하지 못하며 놀고 투전이라는 도박을 하고 또 하여 3일 동안에 돈을 다 잃었다. 나귀까지 팔게 된 판이었으나 정이 끓어넘치는 애틋한 마음에 그것만은 이를 악물고 단념하였다. 결국 애써 번 돈이 효과없이 도로 날아가버려 장돌이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는 없었다. 짐승을 데리고 동네를 도망쳐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짐승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었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산을 모을 생각은 할 수도 없었고,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며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겁대가리없이 시원시원하게 놀았다고는 해도 계집 하나 옆에 두지는 못하였다. 계집이란 좀 쌀쌀하고 냉정한 것이었다.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꼴이 슬퍼졌다. 자기 몸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 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딱 한 번있었던 첫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 번의 괴상하고 묘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때만은 그도 살아있는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지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
허 생원은 오늘 밤도 또 그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다. 조 선달은 그와 친구가 되고 나서 지겹도록 들어 왔다.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도 없었으니 허 생원은 시침을 떼고 반복할 만큼 반복하고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딱 어울리거든.”
조 선달 쪽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한쪽이 찌그러져있기는 했으나 보름을 살짝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하게 흘리고 있다. 대화 지역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산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산중턱에 구부러져 난 길이다. 밤을 지난 때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분위기에에서 달이 마치 짐승처럼 살아있는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무더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식물 줄기 향기같이 그 상태가 여리여리하니 슬픔을 느끼게 하여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한줄로 가기 시작했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 쪽으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뒤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실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기분이 상쾌해 심심하지는 않았다.
“장이 열린 꼭 이런 날 밤이었네. 상인이 물건을 받아 사거나 파는 집 흙마루는 무더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 지역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딜가나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어쩐지 누군가 볼 것만 같아서 옷을 벗으러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간거야. 이상한 일도 많아.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의 딸과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에서 제일가는 빛나는 외모였지.”
“만날 운명이었나보지.”
물론이지 하고 답하면서 말을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기다리는 놈이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었단 말야. 짐작은 됐는데, 성 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집에 있는 물건을 팔고 나가기에 바빴던 때였지. 한 집안 일이니 딸에게도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이라도 보낼텐데 시집은 죽어도 싫다고하지…… 그런데 말야, 처녀가 울 때처럼 정을 느끼는 순간이 잘 없지.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것 같았는데 걱정거리가 있을 때는 두려움이 사라지기도 쉬운 듯해. 이래저래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제천인가 어딘가로 도망을 간 건 그 다음날이었나?”
“다음 장날과 다음 장날 사잇기간에는 벌써 성서방네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터판은 소문에 발칵 뒤집혀서, 어차피 술집에 팔려갈 운명이라고 처녀의 뒷담화를 엄청들 하더란 말이야. 내가 제천 장터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나. 그러나 처녀의 모습은 꿩 구워먹은 자리처럼 아무것도 흔적없이 안 보이더군. 첫날밤이 결국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 지역이 마음에 들어서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토록 잊을 수 있었겠나.”
“자네가 재수 좋은거지. 그렇게 신기한 일이란 쉽지 않어. 항상 평범하게 못난 짝 얻어 새끼 낳고, 걱정거리 늘고 생각만 해두 지긋지긋하지…… 그러나 늙을 때까지 장돌뱅이로 지내기도 힘들지 않겠는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일도 그만두려네. 대화 장터 근처에 조그만 가게나 하나 열고 식구들을 부르겠어. 사계절 내내 뚜벅뚜벅 걷기란 너무 힘든일이란말이야.”
“그때 그 추억의 처녀나 만나면 같이 살아볼까…… 난 죽을 때까지 장돌뱅이로 살면서 이 길 걷고 저 달을 볼 테야.”
산길을 벗어나니 큰길이 나타났다. 맨 끝에 따라오던 동이도 앞으로 나서 나귀들은 옆으로 늘어섰다.
“총각두 젊잖아, 지금이 한창 좋을 때인데. 충주댁에서는 그만 실수를 해서 내가 그렇게 행동했으나 너무 서운하게 생 말게.”
“처,천만에요. 오히려 부끄러워요. 계집이 지금 왜 필요하겠어요. 자나깨나 어머니 생각뿐인데요.”
허생원이 장터에서 했던 말로 힘이 좀 빠져있던 후라 동이의 말투는 꽤 기운없이 가라앉아있었다.
“애비 에미란 말씀을 아까 하셔서 가슴이 터질 것도 같았지만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 핏줄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걸요.”
“돌아가셨나?”
“원래부터 없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디있겠나.”
허 생원과 조 선달이 야단스럽게 껄껄들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말이에요. 제천 지역에서 낳을 때가 되기도 전에 일찍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왔어요.”
산고개가 앞에 있어서 세 사람은 나귀를 잠시 쉬게 했다. 산 언덕은 험하고 입을 벌리기도 힘들정도로 만만치 않아서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툭하면 미끄러졌다. 허 생원은 숨이 차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 했다. 산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이 든게 느껴졌다. 동이 같은 젊은 무리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바탕 쪽 씻어 내릴만큼 많이 흘렀다.
산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물이었다. 장마에 흘러가 버린 나무판 다리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아서 옷을 벗고 건너가야 했다. 남자들이 더울 때 입는 얇은 바지를 벗어 띠로 등에 매고 반 벌거숭이의 우스운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나 밤 물은 뼈를 찌를 것 처럼 차가웠다.
“그래, 대체 자네를 길러준 건 누구였어?”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새아버지와 결혼하고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을 아주 지독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라서 새아버지란 인간이 완전히 개망나니예요. 철들면서부터 제가 새아버지에게 맞기 시작했으니 하루라도 편했겠습니까. 어머니는 그걸 말리다가 발에 채이고 맞고 새아버지가 칼을 휘두르는 행동도 겪곤 하니 집 꼴이 어떻겠어요.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쳐나와서부터 이 장돌뱅이 짓을 하고 있죠.”
“총각이 나이치고는 굉장히 너그럽고 털털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안타까운 신세로군.”
물은 깊어서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 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미끄러워 금방 물살에 쓸려가버릴 것 같았다. 나귀와 조 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넜으나 동이는 허 생원을 붙잡아주느라고 두 사람은 훨씬 멀리 떨어졌다.
“어머니의 고향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나?”
“아이고 말도 마세요, 시원하게 말은 안 해주지만 봉평이라는 얘기는 들었죠.”
“봉평? 그래 그 아버지의 성은 뭔가?”
“알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
“그,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어쩐지 흐릿해지는 눈을 까물까물 떴다 감았다가 허 생원은 어리석게도 발을 잘못 디뎠다. 앞으로 고꾸라지자마자 온몸이 풍덩 빠져 버렸다. 허우적거릴수록 몸을 어찌할 수 없어서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많이 흘러갔다. 옷이 쫄딱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딱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가볍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비쩍 마른 몸이라 덩치 큰 젊은이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미안하네. 내가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걱정마세요.”
“그래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지는 않는 것 같던가?”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새아버지와도 갈라져서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 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악물고 벌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라고 했나?”
동이의 믿음직스러운 등허리가 뼈에 사무치도록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혀있기를 바랐다.
“하루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생원.”
조 선달은 허생원을 바라보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나귀 때문이야. 나귀 생각하다가 발을 헛디뎠어. 말 안 했던가. 저 늙은 꼴에 제법 암놈을 만나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동네 강릉집 다큰 암놈 말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 새끼같이 귀여운 게 없단 말이야. 그걸 보러 나는 일부러 동네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뜨릴 정도면 아닌게 아니라 대단한 나귀 새끼구만.”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자고. 뜰에 불을 피우고 훈훈하게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 주고. 내일 대화 장터 보고는 제천으로 갈테다.”
“허생원 자네도 제천으로 가나?”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함께 가겠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어둠의 귀신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도 가볍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맑고 시원하게 울렸다.
달이 평소보다 더 기울어졌다.
아래는 읽기 완전 편한 버전! 요즘 소설같이 편하게 읽힐 거예요. 이걸 충분히 읽고나서 맨 위에 원본을 꼭 읽으세요.
여름 장터는 워낙 덥다보니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해는 쨍쨍하지만 장터는 벌써 사람없이 쓸쓸하다. 더운 햇살이 벌려놓은 천막 밑으로 등줄기를 뜨끈뜨끈하게 만든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돌아간 뒤이고, 나무꾼 무리가 물건을 못 팔아 길거리에 별일 없이 머뭇머뭇 거리고 있다. 석유병 받고, 고기 몇 마리나 사면 충분히 만족하는 이 무리들을 계속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벌레 새끼처럼 들러붙는 장난꾸러기들도 귀찮다. 마치 파리떼나 모기놈과 똑닮은 각다귀같다. 어릴적 걸린 수두 자국 때문에 얼굴이 얼금얼금 파인 자국이 있고 왼손잡이인 허 선생은 옷감 장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친구 조 선생을 꼬드겼다.
“그만 갈까?”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 번도 대박난 적이 없어. 내일 대화 장터에서나 잔뜩 벌어야겠네.”
“오늘 밤은 밤새 걸어야 될걸.”
“달이 뜨겠구만”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생이 그 날 번 돈을 세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뒷정리를 마저 했다. 옷감들을 담으니 커다란 상자 두 개가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각이 지저분하게 남았다.
다른 무리들도 벌써 거의 다 정리하고 있었다. 얄밉도록 재빠르게 떠나는 무리도 있었다. 생선장수도, 구멍난 냄비를 고쳐주는 땜장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모습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강원도 평창의 두 지역,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먼저 간 무리들은 어딜가든 밤길을 하염없이 걸어가야 한다. 장터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아 돈벌어야 하는 장돌뱅이라면 이 지역 저 지역 돌아다니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장터는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되어있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술취한 놈 욕설에 섞여 계집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덤벼드는 목소리가 찢어질 듯이 들렸다. 항상 이런 계집의 고함 소리로 장날의 저녁이 시작되는 것이다.
“허선생, 시침을 떼두 다 알아…… 충주에 사는 그 여인.. 충주댁 말야.”
조선생은 계집 목소리를 듣고 갑자기 생각난 듯이 허생원을 보며 웃는다.
“그림의 떡이야. 나도 관심은 있지만 충주댁에게 젊은 놈들이 엄청 들이댈텐데, 그 놈들을 라이벌로 생각해봐야 상대가 되겠나.”
“그렇지두 않을걸. 무리들이 엄청 들이대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지만 뭐. 그렇다곤 해두 왜 그 동이라는 녀석말일세, 감쪽같이 충주댁을 그럴듯한 방법으로 꼬셔낸 것 같거든.”
“뭐 그 어려보이는 놈이? 뭐 좋은 물건으로 꼬시기라도 했나 보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자세히는 모르지…… 고민 말구 가보세나 그려. 내 한턱 쏘겠네.”
그다지 가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지만 쫓아갔다. 허선생은 계집과는 인연이 별로 없었다. 수두자국 투성이인 얼금뱅이 얼굴을 쳐들고 들이댈 숫기도 없는 수줍은 사람이었고, 계집 쪽에서 맘에 들어한 적도 없었으니, 인생의 절반을 쓸쓸하게 살아왔다. 충주댁을 생각만 해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어버린다.
충주댁 집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술집 자리에 진짜로 동이가 있었다. 그걸 보니 왜 기분이 날카로워졌는지 모르겠지만 발끈 화가 나버렸다. 상 위에서 붉은 얼굴을 쳐들고 계집과 서로 좋다고 만지작거리며 노는 것을 보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술과 여자에 빠져 하는 짓이 올바른 모습이 아니라 그런지 보기 싫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희롱질이야. 장돌뱅이 망신만 시키고 돌아다니는구먼. 그 꼴을 하고 우리들과 같이 장사를 하자는 거야?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 꾸짖고 타일렀다.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눈망울을 마주쳤을 때, 참을 수 없어 뺨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동이도 화를 내고 팩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생원은 조금도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말해버렸다
어디서 주워 온 어린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너에게도 아비 어미가 있겠지. 그 꼴 보면 퍽이나 부모 기분이 좋겠다. 장사란 믿음직스럽게 해야 되지, 계집이 뭐가 필요해, 나가거라, 니 꼴 볼일 없게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그러나 한마디도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나가는 동이의 모습을 보니, 도리어 동이가 안타깝게 생각됐다. 아직 서먹한 사이인데 너무 심하게 한 게 아닐까 하고 마음이 짠해졌다. 내가 선을 넘었구나. 같은 술손님이지만 아무리 젊어도 자식 나이 쯤 되는 것을 붙들고 때리고 몰아세울 필요가 있었나. 원참..
충주댁은 입술을 삐죽하고 술도 거칠게 따랐으나, 젊은애들은 그렇게 한 번쯤 혼나는 것이 약이 된다고 하며 그 자리는 조 선달이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어린 젊은이를 유혹하는 것은 죄 짓는 것이야.
한참 난리를 친 후이다.
깡도 생긴데다가 웬일인지 흠뻑 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허 생원은 주는 술잔마다 거의 다 들이켰다. 술에 얼큰하게 취하자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가 나가서 어떻게 하고 있을지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뺏어서 어떡하려고 했나 생각도 하고, 어리석은 내 꼬락서니를 스스로 꾸짖는 마음도 한 편에 있었다. 그덕에 한참 뒤 동이가 헐레벌떡 황급히 나를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고 정신 없이 허덕이며 충주댁의 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허씨 아저씨! 아저씨 당나귀가 묶어놓은 줄을 끊구 야단이 났어요.”
“장난꾸러기 놈들 짓이지 분명히. 각다귀 같은 놈들.”
짐승도 짐승이지만 아까 나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해놓고 나에게 당나귀 일을 알려주러 온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뒤를 따라 장터를 달려가려니 게슴츠레하게 뜬 눈이 괜히 눈물로 뜨거워질 것 같다.
“말려보려 했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녀석들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나귀를 매번 귀찮게 굴어. 그 놈들은 항상 그냥 넘어가지 않더라고.”
허선생과 반평생을 같이 지내 온 짐승이었다. 같은 술집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터에서 장터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거칠거칠한 목 뒤 털은 주인 허선생의 머리털처럼 금방 바스러지고, 없어보이게 축축히 젖은 눈은 주인의 눈처럼 눈꼽이 흘렀다. 털이 다 닳아서 자루만 남은 빗자루처럼 짧게 말려올라간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봤자 어차피 다리까지는 닿지도 않았다. 닳아 없어진 발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굽으로 신발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 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조금씩 스며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알아보았다. 간절히 부탁하는 듯한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가워한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니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약간 벌린채 투르르거렸다. 콧물이 튀었다. 허선생은 나귀 때문에 속도 꽤 썩었다. 아이들의 장난이 심했는지 땀에 쩔은 나귀의 몸뚱어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도저히 흥분이 식지 않는 모양이었다. 목에 묶은 줄이 벗겨지고 안장도 떨어졌다. 요 몹쓸 자식들, 하고 허선생은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무리들은 벌써 도망을 친 뒤고, 몇 명 남지 않은 아이들이 소리에 놀라 조심조심 멀어졌다.
“우리가 그런게 아니에요.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미친놈처럼 저런거지.”
코흘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고 녀석 말투가 쯔쯔.”
“김씨 당나귀가 가버리니까 하루종일 흙을 차고 입에서 거품을 흘리면서 미친 소같이 날뛰었다고요.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고요. 배쪽을 좀 보시지. 아저씨 나귀 고추가 섰다고요.”
아이는 못마땅한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마치 긴 시간 여자와 인연이 없어서 외로웠던 자신의 모습같았다. 다른 사람들 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려 설 수 밖에 없었다.
“늙은 주제에 암컷에게 흥분하는 셈이야, 저놈의 짐승이.”
아이의 말에 허 선생은 주춤하면서 결국 견딜 수 없어 채찍을 들더니 아이를 내쫓았다.
“쫓으려거든 쫓아 보지.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냉큼 달아나는 각다귀 같은 놈들에게는 당할 방법이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나도 휘둘러 때릴 때도 놀림을 받는다. 결국 채찍을 던졌다. 술기운도 돌아 몸이 다른 날과 달리 심각하게 화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끝이 없어. 장터의 각다귀 녀석들이란 어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조 선생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옷감가게 장을 돌면 물건을 팔기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선생은 봉평 장은 꼭 갔다. 빼놓은 적이 없었다. 충주 제천 쪽에도 가고, 멀리 영남 지방도 기웃거리기는 하였으나 강릉 쯤에 물건 떼러 갈 때 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네를 뱅뱅 돌아다녔다. 5일 동안 장날에는 달뜨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건너간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을 살펴보러 간 일도 별로 없었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풍경 그자체가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나절 동안 뚜벅뚜벅 걷다가 장터 마을에 거의 도착했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 때가 있다. 그것이 저녁 쯤이라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겪는 일인데도 허 선생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을 꽤 모아 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동네에 음력 7월 보름 쯤 절제하지 못하며 놀고 도박을 하고 또 하여 3일 동안에 돈을 다 잃었다. 나귀까지 팔게 된 판이었으나 정이 끓어넘치는 애틋한 마음에 그것만은 할 수 없다고 이를 악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결국 애써 번 돈이 허무하게 날아가버려 장돌뱅이 짓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나귀를 데리고 동네를 도망쳐 나왔을 때,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나귀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었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산을 모을 생각은 할 수도 없었고, 간신히 하루하루 먹고 살며 이 장터 저 장터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겁대가리없이 시원시원하게 놀았다고는 해도 계집 하나 옆에 두지는 못하였다. 계집이란 좀 쌀쌀하고 냉정한 존재였다. 평생 인연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슬퍼졌다. 내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 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딱 한 번 뿐이었던 첫 기억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던 단 한 번의 기묘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때만은 그도 살아있는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지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
허 선생은 오늘 밤도 또 그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다. 조 선생은 그와 친구가 되고 나서 지겹도록 들어 왔다.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는 없었고, 허 선생은 시침을 떼고 그 때마다 반복해서 말했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딱 어울리거든.”
조 선생 쪽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해서였다. 한쪽이 찌그러져있기는 했으나 보름달 모양을 살짝 벗어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하게 흘리고 있다. 대화 지역까지는 멀고 먼 밤길, 산고개를 두 개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게다가 산중턱에 구부러져 난 길이다. 밤을 지나서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산 속, 마치 살아있는 짐승마냥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무더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다. 피어나기 시작한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것처럼 비춰지는 것도 흐뭇한 달빛덕분이다.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 모습이 여리여리하니 슬픔을 느끼게 하여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한줄로 가기 시작했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 쪽으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선생의 이야기 소리는 뒤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실히는 안 들렸다. 그러나 동이는 동이 나름대로 기분이 상쾌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장이 열렸던 날 밤이었네. 꼭 이런 밤이었지. 상인이 물건을 받아 거래하는 집이 있는데 그 집 흙마루는 무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야. 그러니 밤중에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 지역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딜가나 하얀 꽃이야. 돌밭에 옷을 벗어놔도 됐을텐데,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어쩐지 누군가 볼 것만 같은 거야. 그래서 옷을 벗으러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갔지. 이상한 일도 많아. 거기서 난데없이 성서방의 딸과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에서 제일 빛나는 외모였지.”
“만날 운명이었나보지.”
물론이지 하고 답하면서 말을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기다리는 놈이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었단 말야. 짐작은 했지만, 성 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집에 있는 물건을 팔고 떠날 생각에 바빴던 때였지. 자기 집안 일이니 딸에게도 당연히 걱정이 됐겠지. 좋은 남자만 있으면 시집이라도 보낼텐데 시집은 죽어도 싫다고하지…… 그런데 말야, 처녀가 울 때에는 자꾸 마음이 약해져.. 그 때처럼 정을 느끼는 순간이 잘 없지. 처음에는 날 보고 처녀가 놀란 것 같았는데 더 큰 걱정거리가 있을 때는 두려움이 금방 사라질 수도 있나봐. 이래저래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그 기적 같은 일이 두렵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제천인가 어딘가로 도망을 간 건 그 다음날이었나?”
“장날과 장날 사잇기간에는 벌써 성서방네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터판은 소문에 발칵 뒤집혀서, 어차피 술집에 팔려갈 운명이라고 처녀의 뒷담화를 엄청들 하더란 말이야. 내가 제천 장터판을 몇 번이나 뒤져봤겠나. 그러나 처녀의 모습은 꿩 구워먹은 자리처럼 아무 흔적없이 안 보이더군. 첫날밤이 결국 마지막 밤이 된 것이지. 그때부터 봉평 지역이 마음에 들어서 반평생 동안 다니게 되었네. 평생토록 잊을 수 있었겠나.”
“자네가 재수 좋은거지. 그렇게 신비한 일이란 쉽지 않어. 그냥 평범하게 못난 짝 얻어 새끼 낳고, 걱정거리 늘고.. 생각만 해두 지긋지긋하지…… 그러나 늙을 때까지 장돌뱅이로 지내기도 힘들지 않겠는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일도 그만두려고 하네. 대화 장터 근처에 조그만 가게나 하나 열고 식구들을 부를거야. 사계절 내내 뚜벅뚜벅 걷기란 너무 힘든일이란 말이야.”
“그때 그 추억의 처녀나 만나면 같이 살아볼까…… 난 죽을 때까지 장돌뱅이로 살면서 이 길을 걷고 저 달을 볼 테야.”
산길을 벗어나니 큰길이 나타났다. 맨 끝에 따라오던 동이도 앞으로 나서서 나귀들은 옆으로 늘어섰다.
“총각도 젊잖아, 지금이 한창 좋을 때인데. 충주댁에서는 실수로 내가 그렇게 행동했으나 너무 서운하게 생각 말게.”
“처,천만에요. 오히려 부끄러워요. 계집이 지금 왜 필요하겠어요. 자나깨나 어머니 생각뿐인데요.”
허선생에게 장터에서 들었던 말로 힘이 좀 빠져있던 동이의 말투는 기운없이 가라앉아있었다.
“애비 에미란 말씀을 아까 하셔서 가슴이 터질 것 같긴 했지만,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 핏줄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걸요.”
“돌아가셨나?”
“원래부터 없어요.”
“그게 말이 되나.”
허 선생과 조 선생이 야단스럽게 껄껄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정말이에요. 제천 지역에서 때가 되기도 전에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왔어요.”
산고개가 하나 넘기 전에 세 사람은 나귀를 잠시 쉬게 했다. 산 언덕은 험하고 입이 안 벌려질 정도로 힘들어서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툭하면 미끄러졌다. 허 선생은 숨이 차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 했다. 산고개를 넘을 때마다 자신이 나이 들었다는게 느껴졌다. 동이 같은 젊은이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바탕 씻어 내릴만큼 줄줄 흘렀다.
산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물이었다. 장마에 떠내려갔던 얇은 나무판 다리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아서 옷을 벗고 건너가야 했다. 여름용 얇은 바지를 벗어 띠처럼 등에 매고 반 벌거숭이의 우스운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나 밤의 개울물은 뼈를 찌를 것 처럼 차가웠다.
“그래, 대체 자네를 길러준 건 누구였어?”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새아버지와 결혼하고 술장사를 시작했죠. 새아버지란 인간이 술을 지독하게 많이 마시고, 완전히 개망나니예요. 철들면서부터 제가 새아버지에게 맞기 시작했으니 하루라도 편했겠습니까. 어머니는 그걸 말리다가 발에 채이고 맞고 새아버지가 칼을 휘두르는 꼴도 보곤 하니 집 꼴이 어떻겠어요.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쳐나와서부터 이 장돌뱅이 짓을 하고 있죠.”
“총각이 나이에 비해 굉장히 너그럽고 털털하다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안타까운 신세로군.”
물은 깊어서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 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미끄러워 금방 물살에 쓸려가버릴 것 같았다. 나귀와 조 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너 갔으나 동이는 허 선생을 붙잡아주느라 속도가 늦어졌다. 두 사람은 일행과 훨씬 멀리 떨어졌다.
“어머니의 고향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나?”
“아이고 말도 마세요, 시원하게 말은 안 해주지만 봉평이라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죠.”
“강원도 봉평? 그래 그 아버지의 성은 뭔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
“그,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어쩐지 눈이 흐릿해져 까물까물 떴다 감았다가 허선생은 어리석게도 발을 잘못 디뎠다. 앞으로 고꾸라지자마자 온몸이 풍덩 빠져 버렸다. 허우적거릴수록 몸을 어찌할 수 없었다.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많이 흘러간 뒤였다. 옷이 쫄딱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딱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가볍게 업을 수 있었다. 허선생은 젖었다고는 하여도 비쩍 마른 몸이라 덩치 큰 젊은이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미안하네. 내가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그래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지는 않는 것 같던가?”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새아버지와도 갈라져서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 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악물고 벌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라고 했나?”
동이의 믿음직스러운 등판이 뼈에 사무치도록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혀있기를 바랐다.
“하루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선생.”
조 선생은 허선생을 바라보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나귀 때문이야. 나귀 생각하다가 발을 헛디뎠어. 말 안 했던가. 저 늙은 나귀놈이 제법이야. 암놈을 만나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동네 강릉집 다큰 암놈 말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 새끼같이 귀여운 게 없단 말이야. 그걸 보러 나는 일부러 동네를 도는 때가 있다네. 그 나귀 생각에 발을 삐끗해버렸어.”
“사람을 물에 빠뜨릴 정도면 아닌게 아니라 대단한 나귀 새끼구만.”
허선생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자고. 뜰에 불을 피우고 훈훈하게 쉬세.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 주고. 내일 대화 장터 보고는 제천으로 갈테다.”
“허선생 자네도 제천으로 가나?”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함께 가겠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어둠의 자식마냥 눈이 어둡던 허선생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도 가볍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맑고 시원하게 울렸다.
달이 평소보다 훨씬 더 기울어져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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