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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여인 (막 14:3-9) – 목회자료 – 기독교 멀티미디어 사역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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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옥합을 깨뜨린 여인 (막 14:3-9) – 목회자료 – 기독교 멀티미디어 사역자 커뮤니티 그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그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 게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으 며, 누가복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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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옥합을 깨뜨린 이유(지상에서의 마지막 수요일)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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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64.옥합을 깨뜨린 이유(지상에서의 마지막 수요일) : 네이버 블로그 이 여인은 누구인가요? 마가복음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12장에는 나사로의 누이 동생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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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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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향품과 향유를 예비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눅23:55,56). 그런데 ‘옥합을 깨뜨렸다’는 구체적인 표현은 마가복음(막14:3)에서만 …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향품과 향유를 예비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눅23:55,56). 그런데 ‘옥합을 깨뜨렸다’는 구체적인 표현은 마가복음(막14:3)에서만 … 성경에 예수님과 관련된 향유에 대하여, 예수님의 머리(마26:7, 베다니; 막14:3, 베다니), 예수님의 발(눅7:38, 나인; 요11:2,베다니)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향품과 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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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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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여인(2003. 3. 30)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명상하는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이 거룩하고 엄숙한 계절에 정치와 종교의 자유를 위한 청교도의 경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가공할 만한 폭탄 세례를 죄 없는 이락 국민들 머리 위에 퍼붓고 있다는 것은 실로 시성모독이고 아이러니 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저는 이 청교도의 빗나간 후손들과는 달리 옥합에 기름을 가득 담아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위에 부은 한 여인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중에서 마가가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이것이 마태와 누가에게 기초 자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도 이 이야기를 다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당시에 이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마태복음만이 마가복음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고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내용은 비슷한 것도 있지만 서로 다른 배경과 인물은 그리고 있습니다. 가령 이 사건의 배경이 마가복음에는 문둥병 환자인 시몬의 집이고 누가복음에는 바리새파 사람인 시몬의 집이며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에 관해서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누가복음은 그 동네의 죄인인 한 여인으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나사로의 누이이고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그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서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는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복음서에 따라 달리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참다운 믿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 자료인 마가복음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예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고 계신데 한 여인이 나타나서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그 향유의 값은 300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미불로 환산하면 500불 정도이고 우리 돈으로 약 60만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60만원이 그리 큰 돈은 아닐지 모르나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큰 부자도 아닐 터인데 그렇게 엄청난 금액의 향유를 조금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거기서 이 광경을 본 몇 사람이 값진 것을 낭비한다고 하면서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면 좋았겠다고 나무란 것을 보면 그 값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향유가 비싸고 아깝다고 하는 경제적 계산을 일삼고 있는 반면에 이 여인은 그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예수의 머리 위에 몽땅 부었다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아마 이 여인도 돈 아까운 줄 알 것이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좋다는 것쯤은 아는 지각 있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린 것은 아마도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 생명을 주신 은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와 헌신과 믿음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종교적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인간형을 보게 됩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유형의 인간들은 모두 예수님을 흠모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이 여인으로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소유 전체를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이 여인의 행동을 사시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물질적 타산에 골몰하는 사람들입니다.
여인의 행동은 참 신앙인의 것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비 신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신앙에는 계산이나 타산이 있을 수 없으나 나약하거나 불순한 신앙에는 항상 계산과 변명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면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것을 초월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소유 전체를 하느님께 바치는 헌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언제나 모험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유한하고 상대적인 세상에 살면서 절대적이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한한 모든 것을 바치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두 주인 곧 하느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태 6:24).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세속적인 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 즉 침식이나 휴식, 오락과 취미활동을 모두 반납하지 아니하고서는 큰 뜻을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차원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값지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즉 물질, 시간, 마음 전체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랑과 정의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값진 향유를 무가치하게 벼렸다고 판단하고 여인을 비난하는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도 하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일’이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값진 향유를 자기 머리 위에 붓는 그 모습을 보신 예수께서 마음에 충만한 기쁨을 맛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지난 날 죄를 지은 여자로서 주님의 용서의 사랑으로 인해 온전한 인간으로 변하여 정성을 바쳐서 주님께 헌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예수께서는 감개가 무량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녀의 순수한 행동이 감동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자연도 아름답고 젊은이들에게는 사랑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 차원 올라가서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 미의 절정이 있습니다. 예술의 세계는 우리의 청각과 시각을 미치도록 황홀하게 만드는 소리와 색깔로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시와 문학의 세계는 글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묘사해 줍니다.
아름다움은 우리 인간에게 심미적인 만족만 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명을 구원하기 까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아카데미 남자 주연상을 받은 영화 ‘피아니스트’는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폴란드 태생 유대인 피아니스트인 스필만의 생애를 극화한 것입니다.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프라하에서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던 스필만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치의 체포를 피하여 폐허가 된 어떤 건물 옥상에 숨었다가 불행하게도 나치 사령관에게 발견됩니다. 사령관은 스필만의 전직이 피아니스트인 것을 알고 그 건물에 남아있는 피아노를 치게 합니다. 스필만은 쇼팡의 폴랜드 무도곡인 그랜드 폴로네이즈(Grande Polonaise)를 너무나 아름답게 연주합니다. 이 음악에 감동한 독일 사령관은 스필만을 살려주게 되고 후퇴하기 전에는 먹을 것까지 가져다줍니다. 아름다움이 두 사람 모두를 아름다움의 극치에 이르게 하는 동시에 스필만의 생명까지 구하여 주었습니다.
예배도 예술과 같이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속삭임이고 찬송은 우리 마음에서 울러 퍼지는 참회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기도와 찬송의 진실함과 순수함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하느님까지도 감동케 하는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말과 소리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와 바하의 ‘미사곡 B단조’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의 행동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물론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미스 코리아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경건하고 헌신적인 행동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의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감격하여 순수하게 드리는 마음은 참 아름다음의 극치로 승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 나약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믿음 없음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삶이 주관을 잃어버리고 흔들리며 유혹을 자주 받게 됩니다. 삶이 질서를 잃게 되고 일관성도 살아지게 됩니다. 결국 산다는 것이 볼품없이 되고 마음의 기쁨과 환희는 상상 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아름다운 삶은 그림의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신앙의 나약함에 고착되지 아니하고 작은 믿음을 기초로 하여 최선을 다할 때 거기서 믿음이 자라고 그 작은 믿음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것처럼 아름다움의 극치에 도달하는 계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상 아름다움의 절정에 오른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태어날 때부터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작은 믿음과 아름답지 못한 모습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은혜와 헌신을 통하여 큰 믿음과 아름다움의 극치에로 비약한 것입니다. 자연과 하나 되고 삶 전체를 하느님께 바친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 문둥병 환자와 함께 살다가 자기고 문둥병자가 된 성 다미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평생을 전도자로 살아간 존 웨슬리, 미국 흑백인 모두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M. L. 킹,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 등 이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신앙과 아름다움에서 시작하여 신앙의 절정과 함께 아름다운 삶의 극치를 보여준 위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엄청난 값의 향유를 모두 예수님 머리 위에 부었다는 것은 방관자들의 말처럼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지 않는 무관심에서 나온 행동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참 이웃 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이면서도 서로 연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하느님 사랑을 부르짖고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고 또한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 안에 그 뿌리를 두지 않으면 이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 여인이 자기의 값진 것을 모두 바쳐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최선을 다하여 가난한 이웃도 사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여인은 주님께 드린 것 만큼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남겨 두었으리라는 것을 믿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머리에 부어진 향유의 값을 따지고 있는 방관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합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사용하신 동사의 시상은 현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신앙도 현재적인 동시에 이웃사랑도 현재적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근거한 사랑은 언제나 현재적이어야 합니다. 나는 과거에 어느 누구를 사랑했다는 것은 사랑의 유골에 불과하고 미래에 어느 누구를 사랑하리라는 것은 사랑의 유령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은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표현될 때만 살아있는 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2주 전 일간지에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인 조범구 박사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는 지난 25년간 매월 둘째 토요일 마다 부산에 내려가서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1400명을 무료 진료해 줌으로서 보령의료 봉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조용하고 수습은 성격의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하여 수술 받을 수 없는 어머니들의 호소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어린이들을 보면서 그냥 등을 돌릴 수 없어 시작한 것이 25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 애들이 지금은 건강하게 자라서 결혼하고 인사 오는 청년들과 박사학위를 받고 논문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박사는 기독교 신앙과 자기의 활동을 연결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세브란스의과대학의 기독교 정신과 세브란스의 정신적 지주인 김명선 박사의 신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참된 믿음은 이웃 사랑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참 믿음과 참 사랑은 쌍둥이 형제와 같은 것입니다.
4.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 여인이 한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14:8)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여기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의 머리 위에 부은 행위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계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여인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사건을 미리 예측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지만 예수께서는 여인의 행동과 자기의 고난의 함수관계를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신앙의 행위는 부지불식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여인이 주님의 머리 위에 유향을 부은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의 시신에 유향을 바르고 장례를 치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가 인류구원을 위해 희생하신 골고다와 무덤에 까지 주님과 함께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손에 있는 옥합을 보존만하고 깨뜨릴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헌신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옥합을 깨뜨리는 용기가 없다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성패는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옥합을 유효적절하게 깨뜨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의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것이 작고 보잘 것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은 주님의 고난을 통해 인류구원에 참여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까지 한국인 4명과 많은 평화주의자들이 살인적이 폭탄이 비 오듯 하는 이락의 수도 바그다트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며 구호활동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퍼붓는 폭탄에 비하면 그들의 힘은 먼지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며 그것을 위해 위험을 불사한다는 것은 그 무고한 사람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값진 향유를 부은 이야기를 가지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죄 속에 빠졌던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고 그 기쁨과 감사를 주님께 되돌리므로 후세에 감동을 남기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의 존재와 소유 전체를 주님께 바치는 헌신적 믿음과 함께 아름다움의 극치를 나타냈습니다. 그의 믿음은 추상적인 것에 머물지 아니하고 자기와 함께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행위는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에 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거룩한 사순절에 우리도 이 여인처럼 옥합을 깨뜨리므로 ‘너희는 아름다운 일을 했다’, 그리고 ‘너희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는 주님의 응답을 듣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
이계준 목사
마가 14:3-9, 고후 2:12-17
First Korean Church in Cambridge
2/1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4 옥합을 깨뜨린 여자 (A Broken Alabaster Jar)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4:1-9
1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 이들이 말했습니다. “명절 동안에는 안 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킬 수 있어.”
3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있는, 문둥병에 걸렸던 시몬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병을 열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4 그러자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서로 말했습니다. “어째서 향유를 낭비하는 거지?
5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여자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만두어라. 어째서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7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원하면 언제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8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죽기 전에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 이 여인이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1 It was now two days before Passover and the Festival of Unleavened Bread. The leading priests and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ere still looking for an opportunity to capture Jesus secretly and kill him.
2 “But not during the Passover celebration,” they agreed, “or the people may riot.”
3 Meanwhile, Jesus was in Bethany at the home of Simon, a man who had previously had leprosy. While he was eating①, a woman came in with a beautiful alabaster jar of expensive perfume made from essence of nard. She broke open the jar and poured the perfume over his head. / ①Or reclining
4 Some of those at the table were indignant. “Why waste such expensive perfume?” they asked.
5 “It could have been sold for a year’s wages①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So they scolded her harshly. / ①Greek for 300 denarii. A denarius was equivalent to a laborer’s full day’s wage
6 But Jesus replied, “Leave her alone. Why criticize her for doing such a good thing to me?
7 You will always have the poor among you, and you can help them whenever you want to. But you will not always have me.
8 She has done what she could and has anointed my body for burial ahead of time.
9 I tell you the truth, wherever the Good News is preached throughout the world, this woman’s deed will be remembered and discussed.”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이 여자가 누구냐 하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이 여자의 아름다운 헌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1-2절 말씀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음모와 흉계 속에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 시키신 역사적인 날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을 말합니다. 이 때 누룩 (leaven)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반죽에 누룩을 넣지 않고 빵을 만들면 곧 딱딱하게 굳어서 먹기도 힘들고 맛도 없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면서 과거 조상들의 고난의 삶을 기억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라는 말씀이 상황의 급박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시계는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긴박하게 모임을 갖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이 일에 가담했고, 율법학자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한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다양한 이유들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성모독죄 (blasphemy)를 범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도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도 있었습니다. 유월절 축제만 아니었으면 금방이라도 예수님을 체포할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했다가 혹시라도 유월절 축제에 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온 몸에 전율(戰慄, thrill)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유월절을 결정적인 타이밍으로 보고 계셨습니다. 모든 유대인 가정에서 어린양을 잡고 유월절 식사를 하는 때를 맞춰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이번 유월절을 결정적인 기회로 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사람들은 혹시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이번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실까요?’ 하고 서로 물었습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체포하려고 누구든지 예수를 보거든 즉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1:56-57) 과연, 누구의 계획대로 될까요?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For the foolishness of God is wiser than man’s wisdom,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man’s strength).” (고린도전서 1:25) 맞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깥의 상황은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그 시간에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시몬은 전에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 (a man who had previously had leprosy)’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만일 시몬이 그 때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기회가 없을 뻔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것을 드리는 일, 헌신하는 일, 섬기는 일은 절대로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기회가 많이 있을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 (누가복음 12:20)’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결정하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그 곳에 머물며 사업을 벌여 돈을 벌어 보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안개와 같아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야고보서 4:13-14)
한창 식사가 진행 중일 때, 한 여자가 매우 비싼 향유가 든 옥합 (alabaster jar)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아이구, 왜 저 비싼 향유를 저렇게 낭비하는 거지?” 하면서 향유를 아까워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몇 몇 사람들이 화를 냈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먼저 이의를 제기했고, 다른 제자들도 유다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유다의 계산에 의하면,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시가로 계산하면, 적어도 30,000 불 정도 되는 큰 금액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마가복음 말씀에서는 이 여자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의 가격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식사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면서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이 여자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So they scolded her harshly).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향유를 부은 이 여자의 신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식사에 초대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지금 자신을 만지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at kind of woman is touching him. She’s a sinner!” (누가복음 7:39) 이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이 찬송가 가사에도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이 여자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나와 있지만, 이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향유의 가격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향유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아깝다고 하지 않고 슬쩍 듣기 좋게 포장을 합니다. “Why waste such expensive perfume? It could have been sold for a year’s wages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이렇게 낭비하지 말고 이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속 마음이 들킬까 봐 포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향유를 주님께 드린 여자의 신분을 문제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죄인의 신분으로 식사 자리에 갑자기 뛰어든 이 여자에 대한 불쾌감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식사에 예수님을 초대했던 시몬은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예언자가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예언자였다면 이 여자가가 누군인지 알았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지했을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런 생각 역시 예수님을 놓치고 있습니다.
두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씀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깨뜨린 옥합 속에 든 향유가 300데나리온이 나간다는 것을 이 여자가 모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이것입니다. “왜 이 여자는 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을까?” “향유를 부어 드린 대상인 예수님은 과연 누구냐?”
다행히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용서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용서 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 증거로 이 여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였다.” (누가복음 7:47)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왜 그 여자가 예수님께 그렇게 비싼 향유를 부어 드렸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즉석에서 이 여자에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 7:50)”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질문에 질문을 낳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경에 이해가 안 가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구세주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 바디매오는 어떻게 알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 라고 불렀을까요? 갈릴리의 어부들은 무슨 생각으로 즉시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문제를 속 시원하기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분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만이 나의 많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식사 자리에 와 계시다는 얘기를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옥합을 집어 들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옥합은 결혼을 앞 둔 여자들이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서 모아 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에게 옥합은 그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가면서 고이 모아 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이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여자는 옥합보다 자기의 죄를 용서 받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삶을 청산할 수만 있다면, 옥합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옥합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이런 결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옥합이 무엇입니까?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옥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그 옥합을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깨뜨릴 것입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깨뜨릴 것입니까? 질문을 바꿔 볼까요?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깨뜨렸습니까? 주님은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를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많이 용서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적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주님은 이 여자를 편들어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원하면 언제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죽기 전에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6-8절) 유대의 장례 풍속 중에 죽은 사람의 몸에 향유를 발라주는 절차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니고데모가 ‘몰약과 알로에를 섞은 향유 (mixture of myrrh and aloes)’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9).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서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1).
예수님은 “이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내 머리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은 나의 죽음을 미리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행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도, 예수님 주변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여자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일이 된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도 그렇습니다. 더운 날,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찬물 한 잔을 대접한 일, 외로운 사람을 방문한 일,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 일, 주님은 이런 일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 하시면서 “이런 일들이 곧 나에게 한 일이었다 (마태복음 25:40)”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 이 여인이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9절) 예수님께서 최고의 찬사를 이 여자에게 보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칭찬과 찬사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은 주님을 위해 나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바라보는 4복음서의 시각.
출처
원문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바라보는 4복음서의 시각
<4복음서의 주제>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구주이심을 증명함
마가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예-구주이심을 증명함
누가복음: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구주이심을 증명함
요한복음: 생명의 복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오신 하나님-구주이심을 증명함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은 4복음서의 아래 장,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8개 절)
마가복음: 14장 3절~9절 (7개 절)
누가복음: 7장 36절~50절 (15개 절)
요한복음: 12장 1절~8절 (8개 절)
다른 복음서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는데 7~8개 절을 할애한 반면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의 두배인 15개 절을 사용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이 우리의 죄들에 대한 용서와 용서함을 받은 자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므로 죄들에 대한 용서를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이 이 사건을 가장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관한 4복음서의 기록이 4복음서의 주제와 어떻게 부합되는지 비교하여 보면서 주님의 풍성을 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시게 된 연유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다라고만 하고 거기에 왜 계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반면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식사하고자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초대하였다라고 말씀함으로서 주님께서 그 집에 계시게 된 연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자기의 집에 초대하는 자는 문둥병자, 즉 죄인입니다.
반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누구의 집에 계셨는지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으며 단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으며 이곳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곳이라고 말씀함으로서 생명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문둥병자, 죄인, 혹은 바리새인이라는 소극적 단어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생명 안에서는 이곳이 누구의 집이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단지 베다니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곳입니다.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을 ‘한 여인’이라고만 말하지만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인’이라고 말함으로서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죄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문둥병이나 죄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마리아’라고 그 이름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감추어 주시지만 생명 안에서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또 밝히 드러내십니다.
향유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에서는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이라고 말하고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이라고 말함으로서 이 향유가 매우 값지고 순수한 나드 향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향유가 든 옥합’이라고만 말할 뿐 값지다거나 순수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죽을 죄인에게 아무리 귀하고 값진 것이 자기의 손에 있다 한들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죽음을 앞둔 죄인에게는 값진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일 리트라’라고 말함으로서 그 품질뿐만 아니라 양까지도 정확히 밝히고 있습니다(일 리트라는 현대의 측량 단위로 약 340그램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죽을 죄인에게 있어서 향유가 제아무리 값지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생명의 관점 안에서 우리가 주님께 쏟아붓는 향유는 품질에 있어서뿐 아니라 그 양까지도 주님에 의해 정확히 계측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향유를 어디에 부었는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과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구주이신 하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으며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뒤에 다가가 발치에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나서 그 발에 다정하게 입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먼저 주님의 머리에 몇방울의 향유를 부은 다음 나머지 향유로 주님의 발에 바르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닦아드린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한 사건을 바라보는 복음서들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 누가 분개하였는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의 제자들이 분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몇몇 사람이 분개하며 서로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에 그분의 제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이 마태복음을 통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이 분개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대신에 누가복음에서는 자칭 의롭다 하는 죄인인 바리새인의 생각을,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을 배반함으로 생명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왕국 안에 있는 그분의 제자들의 시각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죄인인 사람과 생명의 원수인 사람의 시각을 각각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시기는 언제인가
연대가 다함이 없는 영원하신 왕-구주에게는 때가 의미 없으며 곧 죽을 죄인에게도 때가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는 때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유월절 이틀 전에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상에 않아 계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6일전에 주님께서 베다니에 들어가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6천년 전 사람의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우주의 베다니 마을인 이곳 죄인들의 땅에 들어오셔 죽은 사람을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약 경륜과 2천년 전 베다니 마을인 이 땅에 노예로 오셔서 죄인의 집 상에 앉으셨던 주님의 신약 경륜이 연상되었습니다.
저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에 대한 4복음서의 기록을 비교해 봄으로서 4복음서의 저자가 각기 복음서의 주제에 정확히 부합하는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고 기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명의 형제님들 안에서 역사하신 그 영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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