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이와같이 하라 선한사마리아인 설교 누가복음 10장 25-37절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눅10:25-37
우리가 서로 얼굴은 잘 모르지만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찬양
하는 우리 성도들과 함께 아름다운 예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지요. 지금 동남아에서는 매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또 동남아
로부터 중국과 북한까지 이어지는 가뭄 대에 해당하는 지역은 가물어서 곡식이 흉
작으로 걱정들이 태산인데, 금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맑은 가을 하늘을 주시
고, 또 풍년을 주시고 이런 저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주일마다 이렇게
나와서 우리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셔서 여러분이 ‘주여 나에게 이와 같은 많
은 은혜를 주시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주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십니
까?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음성 듣게 하옵소서.’ 하는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
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율법사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성경을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그가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직 자세
히 모르시는 분은 이 단어 자체가 요즘 우리가 쓰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에 율법사
가 뭐냐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사이 우리 현대말로 하면 ‘율사(律師)’
라고 할 것입니다. 법을 전공한 사람, 또는 법 쪽에서 일을 하는 전문가라고 보시
면 됩니다. 당시 유대 나라의 법이라는 것은 전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전공하고 율법에 대해서 유권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을 가
지고 있고, 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을 일컬어서 율
법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서기관들도 상당수가 이 율법사의
그룹에 속한 자들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대 나라의 엘리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대해서 좀 알다 보니까 예수님을 평생 못살게 굴었던 사람
들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에게서 어떤 티를 잡아내어 법망에 걸어 넣
으려고 매일 강아지 따라다니듯이 따라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이런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약점을 찾아보려고 질
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기가 막힌 질문을 했습니다. 비록 좋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
이지만, 질문 하나만은 끝내주는 질문을 했어요.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제일 먼저 물어야 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면, 그
정확한 대답을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그런 질문이 있다면 바로 이 질문이기 때문입
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혹은, 요즘 우리가 많이 쓰는
말로 바꾸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좀 더 쉽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천국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아직도 이런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는 캄캄한
흑암 속에서 헤매는 사람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좀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
만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다 이 질문을 했고, 이 질문에 대한 대
답을 얻었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예
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율법사가 누군가 하는
것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물으나 마나지요. 다 알고 계
십니다. 그가 좋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그에
게 거꾸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 이 말씀을 바꾸
면 “너 율법사가 아니냐? 몰라서 묻니? 너 율법에 정통한 사람인데 네가 한번 대답
해 봐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랬더니 이 율법사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27절
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
이다.”
예수 믿으면서 이 구절 못 외우시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구구단 못 외우는
학생하고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본문을 일컬어 모든 율법을 전부 요약해서 표현
한 말씀, 율법의 대강령, 율법의 주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있는 모든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27절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
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전인격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1계명부터 4계명까지 범할 리가
없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
되이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에, 다 팽개치고 제
맘대로 놀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면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다
지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웃을 내 몸처럼만 사랑할 수 있다면 부모 공경하
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범할 리가 없습니
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죄를 범합니까? 그러니까 모든 율법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율법 하면 보통 구약 성경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이야기합니까? 창세기
부터 신명기까지 소위 모세 오경이라고 하는 부분을 들지 않습니까? 결코 만만한
분량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 끝까지 읽으려면 아마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데 이 율법사가 그런 모세 오
경에서 영생 얻는 방법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뽑아냈으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
합니까? 백 점 짜리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율법사가 대답은 그렇게 빈틈없이 했지만, 그가 어떤 사
람인가 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아는 것만큼 살지 않는 사람
이었습니다. 남은 가르치면서 자기는 가르칠 줄 모르는 위선자였습니다. 자기 이웃
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인 줄을 알면서도 스스로는 그대
로 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
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이 율법사들은, 예수님이 표현한 것처럼 “자기
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문에서 막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1장 46절에서 주님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을 하셨는지요. “화 있을진
저.” 현대말로 바꾸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이
정도의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보면 소름 끼치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 다음 말씀을 보
십시오.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 바로 이게 율법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져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사람이 힘이 세어 금방 일어나서 가볍게 지고 가면 간단하지만, 힘이 부쳐 일어나
다가 주저앉고 일어나다가 주저앉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옆에 가서 좀 도와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어나 걸어갈 수 있도록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저는 초등
학교 시절에 많이 해 봤습니다. 어머니께서 무거운 짐을 이고 끙끙 앓으면서 일어
나다가 푹 주저앉으면 일어날 수 있도록 해드리느라고 거들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게를 지고 일어나다가 푹 쓰러지면 아버지가 와서 일으켜주시면서 그것도
못 지냐고 하시지요. 못 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남에게
짐을 지운 사람은 옆에서 도와줘야 됩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해라. 어느 계명
지켜라. 어느 율법을 지켜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짐을 잔뜩 지워주고는 자기는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옳도다. 네 말대로 가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이 율법사가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에서
“선생님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갔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도리어 자기의 악한 근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저, 선생님, 이웃이 누
구입니까?” 하고 말꼬리를 잡고 나왔습니다. 이웃에 대한 논쟁을 한번 해보자는 것
입니다. “도대체 누굴 가지고 이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내 몸처럼 사랑할 이웃
이 도대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한번 우리 논쟁 좀 해봅시다.” 하는 식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랑이라는 것은
실천이 중요한 것이지 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사랑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론을 가
지고 따지기 보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이 사랑인데, “도대체 이웃
이 누구입니까? 정의 좀 내려봅시다. 이웃의 개념이 뭡니까?”하고 대들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굳어있는 사람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자기는 제대로 살지 않으면서
성경 이야기만 가지고 나오면 그 말의 의미가 어떻고, 개념이 어떻고, 오늘날 이런
시대에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한다면서 요란하게 떠드는 사람들이 많습
니다. 목사가 그렇게 떠들면 그게 자기 전공이니까 밉지라도 않을텐데 평신도들이
그렇게 요란을 떨면 정말 밉습니다. 꼴 보기가 싫어요. 그 말씀대로 사는 것만 해
도 벅찬데, 언제 그걸 가지고 말장난 할 수 있습니까?
누가 네 이웃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그의 악한 의도를 아시면서도 친절하게 이웃이
누군가를 이야기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도상에서
강도 만난 어떤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도망간 제사장, 레위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도와서 생명을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
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이야기를 잘못 보면 비유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
해 예수님께서 이웃이 누군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적당히 꾸며서 한 이야기로 듣기
쉽다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단순한 비유정도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네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네 사람 중에 세 명이 유대인이고 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입
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앙숙의 관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어요. 더러운 피가 섞였
다고 해서 완전히 인간 이하로 다루면서 멸시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서러움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 하면 이가 갈리는 것입니다. 자다가도 생각하면 울화통
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종족은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기나긴 세월을
원수지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유대인이요, 율법사도 유대 사람이요, 예수님을 둘러서서 예수
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다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유대인
틈바구니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미화하고 유대인들은 전부 다 악역으로 몰아붙이
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그 자리의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갈까요? 속된
말로 뼈도 못 추릴 수 있는 분위기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그런
데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고 난 다음에도 예수님에게 대항한다든지 트집을
잡는다든지 공격한다든지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이것은 뭔가 이유
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예수님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때 유
대 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실제로 있었던 어떤 이야기를 들고 나오셨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혹 그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환히 들여
다보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질문을 던진 율법사를 위시하여 그 자리에 서있는 상당
수의 사람들이 언젠가 저질렀던 일을 끄집어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다시 말하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이 바로 너 아니냐? 너도 한때 그
런 짓을 하지 않았냐?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냐?” 하는 식으로
그들의 양심을 찔러서 변명을 못하도록 이야기를 끌고 갔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기가 질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이야기
를 단순히 만들어낸 비유 정도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미터 정도 되는 높은 언덕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여리
고는 해저 400미터 가까이 저 아래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여러분이 성지순례를 가
셔서 여리고와 예루살렘 사이를 한번 여행해 보십시오. 거리는 얼마 안됩니다. 기
껏해야 여기서 수원 정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짧은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거리에 전체 1200-1300미터의 높이 차가 있는 그런 지형이면 그 비탈을 내려가는
길이 험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험하니까 자연히 도둑놈이 끓고, 강도들
이 가끔 설치던 그런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혼자서 그 길을 가지 않으려
고 했고, 할 수 있으면 몇 사람들이 모여서 그 길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이 급한 일이 있었는지 혼자서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
니다. 그 당시에는 입고 있는 옷도 강도들이 탐을 내던 물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옷이 귀한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강도들이 이 사람을 완전히 홀딱 벗겼습니다.
그리고 아마 저항을 했는지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빈사상태에 빠져서 쓰
러졌습니다. 그리고 강도들이 다 도망가고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죽습니다.
그때 마침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다가 신음하는 소리가
나서 보니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벌거벗겨져 누워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가다가 이런 일을 당하면 충격을 보통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당해보지는 않았
지만, 상상만 해도 이건 보통 심각한 도전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이
지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피하여 도망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여리
고로 내려가는 길인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지 잘 모릅니다. 하
나지만 성경에 보니 그가 길로 내려갔다고 되어 있으니까, 내려갔다면 틀림없이 예
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지방에 갈 때 내려간다고
하지 올라간다고는 안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여리고로 가
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이었습니다. 한편 자기 집은 분명히 여리고에 있었
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일을 전부 총지휘하고, 그 제사 일
을 실제적으로 지도하기 위해서 자기가 맡은 당번이 있습니다. 어느 달은 어느 제
사장, 어느 제사장, 이런 식으로 당번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이 이런 당
번이 되어 여리고의 집에 가족을 두고 예루살렘에 가서 한 달 정도 제사장으로서의
일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여리고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한 달 동안 떨어져 있
던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발걸음을 재촉하며 내려갔겠습니까? 가족이 보고
싶었고 더욱이 내려가는 길은 강도가 가끔 출몰하는 곳이기 때문에 은근히 불안해
서 걸음을 더 빨리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보
았으니 무슨 생각이 나겠습니까? ‘이 사람 건드렸다가는 오늘밤에 내가 집에도 못
갈지 모르겠다. 강도가 또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내가 제사장인데 이 피 묻은 사람
건드렸다가 내가 부정해지면 어떻게 하냐? 아무도 보는 사람 없지 않아? 모르겠다.
가자.” 하고는 그냥 가버린 겁니다.
얼마 후에 레위 사람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레위
사람이 누굽니까? 제사장 밑에서 제사의 실제적인 모든 일을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성직자예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아마 집이 여리고
에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어떤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
다. 가서 보니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
이 와서 보고는 피하는 대신에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역시 33절 끝 부분을 보십
시오. “그를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wcka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이미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앙숙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누워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이 유대인이고, 자기는 사마리아인이니
까, ‘잘됐다. 꼴 좋다.’ 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처지입니다. 좀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 같으면 돌멩이를 들고 한 방 치고 갈지도 모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를 보자마자 마음에 불쌍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불쌍하다는 감정이 드
니까 지나갈 수가 없지요. 나귀를 세우고 짐을 풀어서 포도주와 기름을 내 가지고
는 상처에 바르고 피를 닦고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나귀 위에
억지로 끙끙거리면서 싣고는 천천히, 천천히 조심해서 가장 가까운 동네 여관으로
들어가, 뜨거운 물찜질을 하면서 아마 밤새도록 간호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는 다음날 아침에 자기 갈 길이 바빠 떠나면서, 여관 주인을 불러 우리 나라 돈으
로 한 20십만 원 정도, 이틀 일하면 벌 수 있는 돈을 주면서 “이 환자를 좀 봐 주
십시오. 제 대신 좀 봐주십시오. 제가 며칠 후에 또 오겠습니다. 만약 돈이 부족하
면 그때 와서 계산할 테니까 정성껏 봐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고는 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자,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냐?”
그러니까 율법사는 대답은 찰떡같이 잘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지
요.”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관심의 악
이 이야기가 주는 핵심적인 교훈이 몇 가지 있습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세요. 첫
째는, 내 이웃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느냐가 중요
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
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보고 무슨 감정이 있겠습니까?
감정이 있다면 미운 감정이고, 가급적이면 멀리 가고 싶은 감정이지, 무슨 감정이
따로 있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와, 내 마음이 막 끌린다. 그립다. 보기만 해
도 반갑다.’ 하는 감정이 생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
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은 감정을 떠나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이 없
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셋째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민족
간의 감정이나 개인의 감정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적인 모
든 여건을 극복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넷째는,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사람이 보지 않아도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
다. 아무도 없는 심심산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
섯째는,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찾으려고 멀리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내 주변에 나가면 얼
마든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사랑하려면 말부
터 앞세우지 말고 명령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교훈들이 이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과연 누구의 자화상을 많이 닮아 있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입니까? 아니면 제사장입니까? 레위 인입니까? 누가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더 잘 그리고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는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알고 있어요.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저보다
도 훨씬 앞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평신도들 많습니다. 반면에 불행하게도, 제사장이
나 레위인과 비슷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 없는 사람들도 상당
히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장과 레위 인은 지금 성전에 가서 한 달 동
안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얼
마나 많은 시편의 말씀과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었습니까? 예복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며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을 찬송했습니까? 쉽게 말하면 은
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 많이 받고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막
상 사랑을 주어야 할 대상을 보았을 때 그들은 슬금슬금 피하고 도망갔습니다. 그
렇다면 그들이 받은 은혜란 도대체 무슨 은혜입니까? 그 은혜가 그들에게 무슨 도
움이 됩니까? 오늘 우리도 잘못하면 그들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
나님 앞에 와서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돌아가지만,
막상 가정에 돌아가서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서 우리 자신이 정말 사마리아 사람
처럼 사랑을 실천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다는 것
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관심
입니다. 어찌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까? 아무리 보는 사람
이 없고 아무리 으슥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강아지 새끼라도 죽어 가는 것을 보면
측은해서 뭔가 좀 도와주고 싶을 텐데, 사람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그대로 지나갈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냉담한 가슴에서 나오는 이런 무관심이 오늘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아는 냉혹한 이기주의가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
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가 점점 무서운 무관심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무관심이 제
사장의 마음에 있었고 레위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헷셀이라고 하는 성경학자가 구약에 있는 선지서들을 연구한 다음 참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움직였던 히브리 예언자들이 남긴
위대한 공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관심의 죄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인
간에 대해 가지는 무관심에 하나님은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외친 사람들이 선지
자들이다.” 그는 이어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무관심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염두에 두고 구약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옳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들의 제사는 받지 않겠다. 너희들 손에 묻
은 피부터 씻으라. 나는 너희들이 저울추를 속여 가며 거짓말하면서 장사하여 떼돈
벌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제사 지내고 헌물 바치고 십일조 바치는 것, 원치 않는
다. 너희들 손에 있는 더러운 죄를 씻으라. 만약에 씻지 아니하면 너희들 두 손을
들고 기도해도 내가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피묻은 손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해친 손이 아닙니까? 거짓말한 손과 남의 것을 착취한 손은 또 무엇입니까?
사랑을 베풀지 않고 자기만 아는 사람으로 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거룩한 제물을 드리는 것, 하나님은 이런 것을 싫어하
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하나님은 긍
휼을 원하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이웃에 대한 관
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희생을 베푸는 사랑이 긍휼입니다. 그런 일을 실제로 하
지 않으면서 교회에 나와서는 거룩한 체하고 예배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을 모르는 사람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제사가 무엇입
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의식 아닙니까? 요즈음 말로 하면 우리가 위선적으로
드리는 그런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위즐이라고 하는 사람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
니라 무관심입니다. 교육의 반대는 무지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아름다움의 반대
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죽음 모두에 대
한 무관심입니다.” 우리의 자화상이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거의 비슷하게 닮았다면
“하나님, 나의 무관심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는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
는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씀을 명령으로 받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딱 닫아걸고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옆집
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든, 불이 나든,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며 벽을 쌓아 놓고 나
만 아는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이 무관심,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적용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도
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를 보고 무관심하면 안됩니
다. 생활이 궁핍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나 병이 들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밤낮 없이 시달리는 사람들, 곁에 앉아서 그 고
통을 함께 나누는 그런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피하면 안됩니다. 요한1서 3장 18
절,19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행동할 때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적으로 강도 만나서 죽어 가는 우리 이웃을 보고 무관심하면 안 된다
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힘들 때 위로해 주는 이런 자선에서
만 끝나면 그것은 반쪽 사랑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데까지 가야 온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참 이웃이 되기를 원하면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염려
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보십시
오. 영적으로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
붙들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매일매일 끌려가는 사람들이 얼마
나 많습니까? 서초 지역 전부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통계상으로는 20여 퍼센트가 크리스천이
라고 하지만 문에 교패를 붙여 놓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형식적으로 교회만 다닐
뿐, 그 마음이 세상에 팔려 성령의 다스림을 받기 보다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
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영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
들에게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어제 능인선원 앞을 지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서초동에 있는 능인선원 말고 개포
동에 새로 지은 능인선원 말입니다. 제가 지나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대형 버스
여러 대가 길가에 서있고,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지나가면서 자세히 봤습니다. 큰 플래카드가 걸려 있기에 뭐라고 쓰여있는가 하고
보았더니 ‘제24기 불교대학 입학생 모집 정원 5000명’ 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
다. 우리 교회 평신도 성경대학과 비슷한 것을 하나 봅니다. 그런데 정원이 5000명
이랍니다. 그것도 벌써 24기 째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도대체 거
기서 뭘 배우고 가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숫자를 모집한다는 것을 보고 ‘야, 이거
큰일났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저 눈앞에 보이는 우상, 눈앞에 보이는
미신에 혹해서, 진리가 아닌 것을 배우느라고 밤낮없이 저렇게 야단들이구나. 왜
저 모양이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무관심했다는 말입니다. 교회 와서 열심히 기도해
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경제적인 축복을 주셨습니까? 그 경제적인 축복을 받자마
자, 내가 즐기고 우리 집 크게 늘리고 내 자식 치장하는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웠
지,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와 같은 물질적인 축복을 주셨는가를 놓고 ‘이것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고 깊
이 생각해 본 일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크게 받으면 받을수록 더
이기주의자가 되고 더 무관심한 사람이 되어, 우리만 은혜 충만한 것처럼 돌아다니
니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 채 지금 가서는 안될 길로 가고 있는 것 아닙니
까? 여러분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두고도 마음이 편합니까?
저는 종종 예배시간에 나와 앉아있으면서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내가 비
정한 예배자가 아닌가, 내가 정말 하나님이 미워하는 예배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 안 믿는 식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
서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이웃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놔두고 나 혼자 와서 두 손들고 찬송하고 하
나님 앞에 소리내어 기도하고 할렐루야 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얼마나 받으실까
요?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이웃을 불
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고 예수 안 믿는 사람에 대해서 안타까와 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우리만 좋아라고 즐겁게 예배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받으실까요?
물론 가족전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붙들고 교회 가
자고 해서 따라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우리의 마음 자
세가 중요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와서
앉아있어도 마음은 안 믿는 내 남편, 안 믿는 내 자식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
을 두고 나 혼자 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나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
을 흘리면서 ‘주여, 어떻게 하든지 그 영혼을 구원하게 해 주옵소서.’하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여
보, 교회 갔다 올게요.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요. 밥은 저 식탁에 다 준비해 놨어
요. 알겠어요? 저 갔다 와요.” 하고는 혼자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은혜 받고
돌아가서 “여보, 나 교회 갔다 왔어요. 식사 잘 했어요? 자, 오늘 2시부터 축구 대
회 있다지요? 우리 같이 봅시다.”하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야 없으리 믿습
니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그런 식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 믿는 분이 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 인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죽어 가는 사람을 내버리고 혼자 도
망가는 사람이나 뭐가 다르냐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루살이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그런 확률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대형 여객기 사고를 보아도 그렇고, 하루에 40-50명이 죽어 가는
우리 나라의 교통사고 현장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또 우리 주변에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강도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중도금 주려고 갔다가 끌려가서 죽었지 않습
니까?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예상하지도 않았던 급성 질병이 나를 아예 사
지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게 세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장 복음 전해서 구원하지 아니하면 영원히 기회를 놓칠 사람들
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 가족 중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을 보고 무관심하고, 믿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제사
장이나 레위 인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오늘 당장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불러
가신다면 그 사람들이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저는 입에 올리기가 싫어서 말을 잘
안 합니다만 그들이 갈 곳이 지옥밖에 더 있습니까?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이 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바가 있었습니
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참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양계장을 하고 있었는데, 양계장에 피워둔 연탄 난로에서 불이 나서 삭풍이 불어닥
치는 12월 한밤중에 대화재가 났습니다. 난데없는 불길에 휩쓸리게 되자 거기서 기
르던 닭 500마리와 앙고라토끼 200마리가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다가
전부 내의 바람으로 뛰어나왔지요. 거기에 와서 교육을 받던 생도들 몇십 명도 정
신없이 뛰어나왔습니다. 나와 보니까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모피용 앙고라
토끼의 털에 불이 옮겨 붙으니까 완전히 새빨간 폭탄이 되어버렸습니다. 닭은 닭대
로, 토끼는 토끼대로 막 날뛰니까 이건 생지옥입니다.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아무
리 애를 써도 불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김 장로님이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우리 이 자리에 조용히
앉아서 저 광경을 보면서 살아있는 교육을 받읍시다.” 이젠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지라 전부 멀찌감치 앉아서 닭들과 토끼들이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불에 타
죽어 재가 되는 그런 끔찍한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이미 때가 늦었는데도 살아보려
고 아우성을 치는 닭이나 토끼들을 보면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육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날, 그 영
혼은 속절없이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에 떨어져 울부짖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
각을 하니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불길이 다 사그라진 후에 김 장로님은 교육생들을 이끌고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을 통해서 그때 교육생으로 와 있던 사람 중에 자기 손으로 1천 명 이상 되는 깡패
를 길러내고 경찰관까지도 폭행을 한 전력이 있는, 대전에서 왔다는 깡패 두목이
그 불타는 양계장의 현장을 지켜보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회개하고 목사가 되
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던 교육생 중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임영철이라는 청년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법관 되는 것
을 포기하고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와서 농군이 되었고 나중에는 김용기 장로님의
첫째 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살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게 되면
그들이 가게될 곳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강도 만난 사람하고는 비교가 안 되
는 것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을 당해야 하고 영원한 저주
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 이웃을 보고 우리가 무관심하다면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힘들
고 귀찮고 돈이 들어도 그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
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
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습니
까? 시간도 내 드리고 물질로도 도와주시고 마음도 서로 나누시면서 그들을 사랑하
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영적으로 강도 만난 가족이 있습니까? 이웃이 있습니까? 여
러분 가만히 계시면 안됩니다.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
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서 “너도 그렇게 하
라.” 하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명령대로 우
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주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