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9 순조 가계도 31 Most Correct Ans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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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s-역사-0001] 조선왕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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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에 솟아 오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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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에 솟아 오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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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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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최후[편집]

가족 관계[편집]

순조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참고 문헌[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조선 순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 순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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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3대~25대 왕 순조, 헌종, 철종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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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3대~25대 왕 순조 헌종 철종 가계도 본문

조선 23대~25대 왕 순조, 헌종, 철종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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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가계도_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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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가계도_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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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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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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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7: 영조에서 순조까지 –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 Google Sá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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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7: 영조에서 순조까지 -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 Google Sá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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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가계도_사도세자,순조,효명세자,헌종,철종,고종,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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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가계도_사도세자 순조 효명세자 헌종 철종 고종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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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의 가계도

[제23대 순조실록] 1.순조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1790-1834, 재위 기간 1800년 7월-1834년 11월, 34년 4개월)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순조 대는 17, 18세기를 통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사회 의식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정치의 기강이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일대 사회 혼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순조 대의 정치적 사건의 대표적인 예는 후에 외교적인 분쟁으로까지 비화하는 천주교 박해를 들 수 있다. 벽파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으며 정적인 시파와 남인들을 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박해, 순조의 친정 뒤에 이어진 을해박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수만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이어졌다. 또한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이며, 수빈 박씨의 소생이다.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공, 자는 공보, 호는 순재였다. 정조와 선빈 성씨 사이에 난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1800년(정조 24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다. 이는 곧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가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것은 곧 유교 윤리를 받든다는 명분도 얻을 뿐더러, 반대파인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실권을 잡자마자 척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순조 1년에 들어서자마자 정순왕후는 곧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 오가작통법을 썼다. 이는 본래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서 서로 강도, 절도 같은 범법 행위가 일어나는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치안 유지법이었다. 그 방법을 천주교도 색출에 동원하여 다섯 집끼리 서로 천주교도가 있는지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였다. 그 중에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신자가 나오면 다섯 집이 모두 화를 입게 되는 악명 높은 오가작통법을 써서 전국을 피바다로 몰아 넣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넘었는데 이 중에는 진짜 천주교 신자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연루되어 죽은 이도 많았다. 당시 잡혀 죽거나 귀양을 간 시파나 남인계 인물로는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있었다. 신유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가리켜 ‘신유사옥’이라 하는데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는 완전한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 일이었다. 1800년 정조 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의 6촌 오라비인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가 있었으나 결국 1802년 순조 2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한편 왕의 친정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 을해년에는 경상, 충청, 강원도의 신자들을 죽이고, 1827년에는 충청, 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1804년 순조가 열다섯이 되던 해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정조의 유탁을 받은 영안부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 편에서 있던 시파계 일문이었으나, 규장각대교 당시 탕평을 건의하는 등 당색을 드러내지 않는 처신으로 벽파 세상이 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뒤 1년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을 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다. 이후로 국왕의 장인인 국구가 된 김조순은 나이 어린 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세도 정치의 첫장을 열게 된다. 후대 사가들은 김조순이 그런 대로 청류임을 표방하여 어떤 종류의 벼슬도 사양하며 오로지 국왕의 보필에 전념을 다했다고도 하지만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 일문이었다. 이들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해 버리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견제 세력이 없는 정권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안동 김씨 일문이 요직에 앉아 한 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전횡과 뇌물 수수를 일삼으니 공평한 인사의 기본인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 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함께 왕조 사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탐관오리 등이 횡행하고 농민층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자 농민층의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도 정권의 성립 초기부터 시작된 농민들의 민란이 전국 각지에서 5차례에 걸쳐 크게 일어났으며, 마침내 1811년(순조 11년) 홍경래의 난으로 발전했다.

서북인 차별 대우 철폐와 세도 정권의 가렴주구 혁파, 정도령의 출현 등을 기치로 내세운 이 반란은 몰락 양반과 유랑 지식인, 서민 지주층의 재력과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대규모 반란으로서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체제 변혁까지를 도모하는 정치적 반란이기도 했다. 광산노동자, 빈농, 유민들을 봉기군의 중심 부대로 삼고서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출병했다. 그리하여 거병한 지 열흘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정주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해 들어간다.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보급로가 끊긴 채 무려 4개월 동안 관군과 대치하다가 1812년 4월 마침내 관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제도를 기치로 내걸었던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큰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농민층의 자각을 가져왔고 조선 후기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사건이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민란과 역모 사건이 끊이지 않았으며, 1821년(순조 21년)에는 서부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목숨을 잃었다. 또한 순조의 34년 재위 기간 중 1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나는 등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았다. 순조는 집권 초기에는 정순왕후를 둘러싼 경주 김씨 일문 아래 있었고, 친정을 하게 된 15세 이후로는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 아래 있었다. 순조 역시 세도 정권의 전횡을 모를 리 없었기에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외척 세력인 풍양 조씨 일문의 세도 정권을 만들어 냈을 뿐,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당시의 세도 정권은 당쟁이 없는 대신에 반대파가 없는 독 재 정권으로서 민생과 사회 문제는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영예에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한편 학문을 좋아한 순조는 20권 20책에 달하는 개인 문집인 ‘순재고’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학문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양현전심록’, ‘대학유의’, ‘정조어정홍재전서’, ‘서운관지’, ‘동문휘고’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순조는 34년 간의 치적을 남기고 1834년 11월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순원황후 김씨에게서 1남 4녀를 두었으나 효명세자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손자인 환으로 하여금 왕통을 잇게 한다. 그의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2. 순조의 가족들 순조는 순원황후 김씨 외에 숙의 박씨가 있을 뿐이다. 순원왕후 김씨가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를 비롯하여 4녀를 낳고, 숙의 박씨가 1녀를 낳았다. 순원황후 김씨(1789-1857)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0년(정조 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1802년(순조 2년) 10월에 왕비로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 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제23대 순조 가계도

정조와 수빈 박씨의 차남이 제23대 순조(1790-1834, 재위 기간 : 1800년 7월에서 1834년 11월까지 34년 4개월이며 2명의 부인과 1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순원왕후 김씨에게서 1남 4녀(효명세자인 익종,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일찍 죽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명의 공주), 숙의 박씨에게서 1녀(영온옹주)를 두었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하여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한다.

순조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효명세자(1809-1830)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 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순조(純祖, 1790년 7월 29일 ( 음력 6월 18일 ) ~ 1834년 12월 13일 ( 음력 11월 13일)는 조선의 제23대 국왕(재위 : 1800년 8월 23일 ( 음력 7월 4일 ) ~ 1834년 12월 13일 ( 음력 11월 13일 ) 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생애 [ 편집 ]

탄생과 즉위 [ 편집 ]

성은 이(李), 휘는 공(玜)이며,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이다.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박준원의 딸 수빈 박씨(綏嬪 朴氏)이다. 왕비(王妃)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1790년(정조 14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탄생하였다.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던 정조는 아들이 태어나자 크게 기뻐하였다.[1]

1800년(정조 24년) 1월 1일, 세자에 책봉되었으며[2], 6월 정조가 죽자[3],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즉위와 함께 왕의 법적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4]

수렴청정기 [ 편집 ]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의 폐위를 주장했던 벽파와 뜻을 같이 하였고, 수렴청정 기간 동안 벽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므로, 이들은 정조 때 집권 세력이었던 시파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1802년(순조 2년), 장용영을 혁파하였다.

원유관 차림의 순조 어진 (1830년)

신유박해 [ 편집 ]

정순왕후와 벽파는 천주교와 그 교리에 대하여 사학(邪學, 주자학 이외의 거짓 학문)으로 간주하여 강경책을 펼쳤고, 정순왕후는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

대왕대비(정순왕후)가 하교하기를, “선왕(정조)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 경기 · 충청)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이보다 앞서 서양국(西洋國)에서는 이른바 야소(耶蘇)의 천주학(天主學)이 있었는데, 대개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의 이야기로 현혹시켜,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윤리를 업신여기며 강상을 어지럽혔으니, 이교(異敎) 가운데 가장 윤기(倫紀)가 없는 것이었다. 그 책이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유전(流傳)되었는데, 더러 빠져들어 어그러지는 자가 있었으므로, 정조 시대에 법으로 엄금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법망에서 빠져 나간 여얼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강습하여 점차 서로 오염시켜서 포청에 붙잡히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1월 10일 (정해)

정순왕후는 사교금압(邪敎禁壓)을 통해 인륜을 무너뜨리는 천주교도들의 마음을 돌이켜 바꾸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역률로 종사한다고 하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래의 행정 체계인 오가작통법은 천주교도를 색출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하교에 따라 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당시 조선에 입국한 청나라의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다.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 인물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등이 처형되고, 정약용 등이 유형에 처해졌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언군 또한 아내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가 세례를 받은 사실이 알려져 가족이 사교에 물들때까지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사되었다. 신유박해로 인해 이로 인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같은 해 황사영[5]은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에 대하여 청나라 북경의 주교에게 그 전말을 백서에 적어 전달하려다 적발된 황사영 백서 사건을 일으켰고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공노비의 해방 [ 편집 ]

1801년(순조 1년), 대왕대비 김씨는 윤음을 내려 공노비(公奴婢) 중 내노비 36,974구와 시노비 29,093구 등 6만 6천여명을 모두 양민으로 삼도록 하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노비안(奴婢案)을 거두어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게 하였다.[6]

세도 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 편집 ]

세도정치의 시작 [ 편집 ]

탕평이 실패하고 붕당정치가 약화되면서, 권력이 특정 가문에 집중되어 국정이 운영되는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가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순조 시기부터 헌종과 철종에 걸쳐 3대 60여년간 왕의 외가와 처가 일족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었다. 또한 순조 이전부터 국정을 주도하던 비변사가 세도정치 시기의 권력의 핵심 기구로 부상하면서 육조와 의정부가 무력화되었다.

1803년(순조 3년), 대왕대비 김씨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과 그 일파에 의해 실각하면서[7]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후 순조는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이들은 비변사의 요직을 독점하였고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세도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순조의 외숙부인 박종경 등으로, 순조 중기에는 안동 김씨 주도하에 반남 박씨가 공존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들은 정계의 요직을 장악하였다.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줄이고자, 자신의 외가인 반남 박씨와 세자빈의 가문인 풍양 조씨 등을 기용하며 권력을 분산시켰다.

순조의 재위 후반기에는 김조순이 죽고 그의 아들인 김좌근이 군국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일가 친척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의 세도가문들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고 하층민을 착취하였으며, 뇌물수수와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삼정의 문란 [ 편집 ]

세도 정치기에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 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양반 관료 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수탈이나 토호(土豪)의 세금 전가는 주로 농민층에 집중되어 지주전호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전정과 군정, 환곡 모두 본연의 틀에서 벗어나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며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이 사회전반에 나타났다.

사회의 혼란 [ 편집 ]

홍경래의 난 [ 편집 ]

1811년(순조 11년) 12월부터 1812년(순조 12년) 5월까지 5개월에 걸쳐 발생한 홍경래의 난은 순조 시대에 평안도 일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홍경래 등이 부농과 사상(私商)을 규합하였고, 여기에 삼정의 문란 속에서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과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까지 가세하였다.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자제(父老子弟)와 공사천민(公私賤民)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기자와 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벼슬아치가 많이 나와 급제하고 문물이 발전한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으며, 또한 정묘호란에는 양무공 정봉수가 충성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돈암 선우협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의 재주가 또한 이곳 서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西土)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 시험에 당하여서는 서토의 글을 빌었으니 400년 동안 서토의 사람이 조정을 버린 적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재앙별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 이르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중략)

— 홍경래의 격문

반란이 일어나자 순조는 관서의 도신(道臣) 수신(帥臣) 및 수령, 문무 사민(文武士民), 이서(吏胥), 군교(軍校)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하였다.

“ 임금은 말한다.

아, 그대 관서의 백성들은 나의 애통한 고명(誥命)을 분명히 듣도록 하라.

아, 황천(皇天)이 우리나라를 돌보지 않아

경신년(1800년) 여름에 우리 황고(皇考)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 승하하셨으므로

보잘 것 없는 나, 소자가 어린 나이로 어렵고 큰 유업을 계승하여 지금 1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덕이 부족하여 위로는 천명(天命)을 경외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민심에 답하지 못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잊지 못하고 근심하며 두렵게 여기면서

혹시라도 우리 선대왕께서 물려주신 소중한 유업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지난번 가산(嘉山)의 토적이 변란을 일으켜

청천강 이북의 수많은 백성(生靈)이 도탄에 빠지고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나의 죄이다. ” — 《비변사등록》 · 《승정원일기》, 1811년(순조 11년) 12월 23일 (정묘)

“ 아, 그대 서토(西土)의 백성들은 나를 저버린 적이 없는데

나는 임금의 책임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여

그대들에게 어지러이 소요가 일어나 놀라고 동요하는 환난을 당하게 하였으니,

내가 실로 그대들을 저버린 것이라, 내 어찌 더 할 말이 있겠는가. ” — 《비변사등록》 · 《승정원일기》, 1811년(순조 11년) 12월 23일 (정묘)

반란군은 가산과 박천, 곽산, 선천, 정주성을 점령하고 세를 확장하여 한때 청천강 이북을 점령하였으나 관군과의 항전 끝에 모두 진압되었다. 홍경래는 전란 중에 사망하여 이후 참수되었고, 우군칙 등 반란의 관계자들 역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또한 정주성에서 생포된 백성 2983명 중, 여자 842명과 10세 이하의 남자아이 224명을 제외한 1917명 모두 처형된 후 효수되었다.[8]

자연재해와 기근 [ 편집 ]

순조 연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수십차례에 걸쳐 기우제를 행하였다. 19세기 초반의 이상저온현상으로 봄의 날씨가 매우 건조하고, 가뭄이 잦아 곡식과 작물의 재배가 힘들어졌고, 농민들은 유리걸식 하였다.[9]

1803년(순조 3년), 평안도와 함경도에 재해가 발생하고 강화에는 기근이 들었다. 1804년(순조 4년), 평양성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5천호가 연소하자 위휼하였다.

1809년(순조 9년), 전라도와 충청도에 큰 흉년이 들어 세를 감면하였다. 1814년(순조 14년)에는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에 기근이 들었다. 1832년(순조 32년)에도 경기, 충청, 황해도에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순조는 매년 기우제를 지냈으나 가뭄이 가장 극심했던 1809년(순조 9년)부터 1811년(순조 11년) 까지는 무려 33회에 걸쳐 기우제를 지냈다. 가뭄이 발생하지 않는 해에는 홍수와 역병이 돌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

“ 여러 도(道)에 흉년이 들었어도 나는 진실된 마음으로 백성을 품어 보호하지 못하였고,

백가지 제도가 모두 병들어도 나는 참다운 마음으로 이끌어서 통솔하지 못하였다.

강연을 오랜 동안 정지하여 게으르고 거칠어진 한탄이 있고,

여러가지 업무가 정체되었는데도 진작시키는 공이 없으니,

위로는 천심(天心)에 미더움을 줄 수 없고 아래로는 민생을 편안하게 할 수가 없었다. 홍수와 가뭄과 충재가 금년에 와서 극심한 재앙을 불러왔는데,

또 이 겨울에 천둥의 변고까지 발생하였다.

재앙이라는 것은 공연히 생기는 법은 없으니, 반드시 그것을 불러들인 원인이 있다.

그 재앙을 불러들인 근본은 바로 나에게 있으니,

내 마음을 살펴봄에 스스로 부끄럽고, 이어서 또 애통스럽다. ” — 《순조실록》 30권, 1828년 10월 26일 (임진)

1814년(순조 14년), 함경도 갑산과 삼수, 경상도에 대대적인 홍수가 발생하였고, 1815년에도 홍수가 발생하였다.[10] 1818년에는 황해도 신천이, 1819년에는 충청도 공주에서 홍수가 발생하였다. 1821년(순조 21년)에는 역병이 돌아 많은 백성들이 사망하였다.

이양선의 출현 [ 편집 ]

서양의 이양선들이 조선의 해안에 출현하였다. 《순조실록》에 기록된 이양선은 모두 영국의 배였다. 이양선이 해안가에 나타나면 최대한 빨리 바다로 내보내고, 이들에 대한 기록을 청나라 조정에게 보고하는 것이 조선의 이양선에 대한 기본 대처방안이었다.

1816년(순조 16년) 7월 19일, 충청 수사 이재홍의 장계가 올라왔는데, 충청도 마량진 갈곶 밑에서 영길리국(英吉利國)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은 이양선에 있던 낯선 사람들과 언문이나 한자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장계에서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또한 “이들의 배에 들어가보니 내부는 무척 컸고,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배는 무척 빠른 속도로 바다를 빠져 나갔습니다.” 라고도 했다. 이들이 영국인임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준 한 폭의 서전에서 영길리국이라는 국명이 나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11]

1832년(순조 32년) 7월 21일에는 로드 애머스트(The Lord Amherst) 호(號)가 공충도 홍주의 고대도(古代島)[12] 해안에 나타났다. 이 배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간첩 휴 해밀턴 린지가 승선해 있었다. 그는 카를 귀츨라프와 함께 광둥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청나라 여러 해안의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경제·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13][14] 이 배의 선원들과 홍주 목사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는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었다. 이들은 영길리국의 배이며, 청나라와 국력이 대등하여 조공을 바치치도 않는다고 했다. 영길리국의 정보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조선에게 교역을 하고 싶다는 청을 여러번 했으나, 조선 측에서는 이에 대해 강력히 거부하며, 이들이 원하는 물품들을 제공하고 이들을 되돌려 보냈다.[15]

한양의 쌀 폭동 [ 편집 ]

영조, 정조 시대부터 사상(私商)이 성장하고 부농이 늘어나면서 이들은 지주들과 결탁하여 시장의 쌀값과 물가를 조종하였다. 쌀은 주식이며 농민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으므로 쌀값의 상승은 이미 이전부터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1833년(순조 33년), 경강상인들은 쌀을 모아놓고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시장 경제를 교란시켰는데, 원하는 만큼 쌀값이 형성되지 않으면 쌀을 시중에 풀지 않는 일이 잦았고, 이에 한양의 쌀값이 치솟자, 이를 견디지 못한 난민들이 가게를 부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난동을 부린 주모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상인 2명도 처형되었다.[16]

이후 조정에서는 난민들을 선동한 주모자는 강하게 처벌하고, 난민들과 상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상인들의 곡식 무역을 죄로 삼지 않는 다는 점과, 시장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을 경계하고 되를 속이고 물을 섞어 곡식을 판매하는 행위를 강하게 처벌하는 등의 자구책을 마련하였다.[17]

재위 후반 [ 편집 ]

대리청정 [ 편집 ]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순조 19년),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순조 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대리청정 3년 만에 세자가 요절하면서 막을 내렸다.

궁궐 화재 [ 편집 ]

1803년(순조 3년),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창덕궁 인정전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1829년(순조 29년) 10월, 경희궁 융복전과 회상전, 집경당 등이, 1830년(순조 30년)에는 창경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과 통명전 등 400여 칸의 전각이 전소되었다.

1833년(순조 33년), 창덕궁에서 발생한 화재로 대조전과 희정당, 징광루, 옥화당, 양심합 등 400여칸이 전소되었다.[18]

최후 [ 편집 ]

최후 및 능묘 [ 편집 ]

인릉의 정자각과 비각

말년의 순조는 자녀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크게 상심하였고 웃음을 잃었다.[19]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화불능 등의 병을 앓다가 1834년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20] 능은 인릉(仁陵)이며 순원왕후와 합장되어 있다.

“ 경인년(1830년)의 참독스런 화(禍)를 당하게 하고 거듭 정리상 차마 못할 지경을 겪게 함으로써

한때의 병환을 연유하여 지금의 춘추(春秋)로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차마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으며 이것이 무슨 천리(天理)이며, 이것이 무슨 인사(人事)이겠는가? 천지가 무너져 내리고 터져 나가는 슬픔을 당하여 날아가 흩어졌던 정신을 불러 모아

평일 지극히 인애(仁愛)로웠던 성대한 덕을 대강 가까스로 써내었으나

만에 하나도 제대로 형용해 내지 못하였다.

단지 하늘에 사무치는 슬픔만 더할 뿐이어서 오장(五臟)이 갈가리 찢기는 아픔뿐이다. ” — 《순조대왕행록》, 순원왕후 지음

묘호 및 시호 [ 편집 ]

처음 묘호는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년) 지돈녕 이학수,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등의 건의에 따라 ‘이단을 배척하여 서학(천주교)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서란(西亂, 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공’을 기려 묘호를 종(宗)에서 조(祖)로 바꾸어 순조(純祖)로 개칭되었다.[21]

대한제국 고종 때 황제로 추존되면서 숙황제(肅皇帝)의 시호가 추가되었다.

시호는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이다.

가족 관계 [ 편집 ]

순조가 등장하는 작품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조선 23대~25대 왕 순조, 헌종, 철종 가계도

조선 23대 임금 순조”純祖”(출생 1790년 ~ 1834년)는 정조(22대 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공”입니다.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1800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그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11세의 나이에 순조(재위 1800년 ~ 1834년)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영조(21대 왕)의 왕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1804년 11월에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각 인물을 드라마와 영화의 캐릭터와 대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순조는 2명의 부인과 1남 5녀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드라마 <이산> 순조

순원왕후 : 효명세자”익종”(24대 헌종의 아버지), 신원불명,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숙의 박씨 : 영온 옹주

순조의 하나뿐인 아들 효명세자는 1809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영”입니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박보검)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830년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1834년 순조가 승하하자 효명세자(익종)의 아들 헌종”憲宗”(출생 1827년 ~ 1849년)이 8세의 나이에 24대 임금에 오르게 됩니다.

헌종(재위 1834년 ~ 1849년)은 4명의 부인과 1명의 딸을 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영화 <명당> 헌종(이원근)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

경빈 김씨

궁인 김씨 : 신원불명 女1

헌종이 후사가 없이 1849년 승하하자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22대 왕)의 동생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哲宗”(출생 1831년 ~ 1863년)이 19세의 나이에 조선 25대 임금이 됩니다.

철종(재위 1849년 ~ 1863년)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지만 당시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로 전국적으로 많은 지역에서 민란이 발생했습니다.

철종은 8명의 부인과 5남 1녀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철인왕후 김씨 : 왕자

귀인 박씨 : 왕자

귀인 조씨 : 왕자 1, 왕자 2

숙의 방씨

숙의 범씨 : 영혜 옹주

궁인 이씨 : 왕자

궁인 김씨

궁인 박씨

철종에게는 5명의 왕자가 태어났다고 전해지지만 모두 일찍 사망하면서 후사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철종이 1863년 승하하자 영조(21대 임금)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 흥선대원군(이하응)의 둘째 아들 고종”高宗”이 조선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가 됩니다.

영화 <명당> 흥선대원군(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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